35화 뇌물과 선물의 차이
미국에 체류 중인 손창의는 죽을 지경이었다. 도무지 말발이 안 먹힌다. 보스가 보내준 소개장 덕분에 미크로소프트 빌 게이트 회장을 만날 수 있었지만, 솔 에이전트 권한을 줄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젓는다.
대기업이긴 해도 아직 절대적이지 않은 윈도어 95가 출시되면서 그 가능성을 인정받은 미크로소프트. 워드와 엑셀을 쓸 수 있게 된 것만으로 그 확장성이 무궁무진할 것으로 손창의는 전망했다.
확실히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386으로 진입한 컴퓨터 시장은 인터넷 시대를 맞아 엄청난 속도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빌 게이트 회장은 일본 시장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손창의의 애를 태웠다.
몇 달을 허송세월하는 것인지 스스로 한숨이 나왔다. 야호는 아직 만날 계획도 잡지 못하고 있는 판이다. 우선은 미크로소프트의 독점권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관건이었다.
그때 월 단위로 리스한 차의 카폰이 울렸다.
“네, 손창의입니다.”
[나예요. 손 사장.]
“앗, 대표님. 웬일이십니까?”
[잘 안 풀리나 보죠?]
“…면목 없습니다.”
[아뇨.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나요? 미크로소프트가 쉽게 문을 열지 않을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포기 않고 계속 공략 중입니다.”
시혁은 이 매듭을 빨리 풀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직 손창의는 빌 게이트를 공략할 방안을 못 찾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다른 자리에서 극적인 타협을 하겠지만…….
‘앞당기자!’
[손 사장님. 지금 즉시 현금을 들고 시애틀 최고의 자동차 매매상을 찾아가세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얼마를 주던 포르쉐 959 모델, 특히 양산형 말고 1983년산 초기형 프로토 타입 차를 구해 달라고 하세요. 얼마를 주던 꼭이요.]
“아! 대표님께서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탁송이 되는지 그게 문제입니다.”
[다른 걱정 마시고, 우선 차부터 구매한 후 전화해 주세요. 아시겠죠?]
아무리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도 결국 애였구나. 남자란 젊으나 나이 먹으나 차에 광분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지쳐도 대표님이 갖고 싶다면 어떻게든 구해서 보내자.
포르쉐 959… 미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차가 아니다. 개구리를 닮은 동그란 눈과 낮은 보닛, 그리고 일체형 리어 윙을 갖춘 명차 959.
손창의는 쉽게 생각하고 시애틀에서 제일 큰 자동차 딜러숍을 찾았지만… 웬걸? 초기형 959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
딜러들에게 현상금 오만 달러를 걸고 나서야 겨우 소유주를 찾았다. 하지만 턱도 없는 가격을 불러 고민에 고민을 해야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얼마를 주던 꼭 사라고 했으니 나중에 채워 주시겠지. 지르자.
“보스, 겨우 구했습니다. 자그마치 백만 달러를 지불했습니다. 영수증을 같이 보낼게요. 너무 큰 지출이라서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하. 잘하셨어요. 손 사장. 양산형이 300대밖에 없는 차고, 프로토 타입 초기형은 몇 대 나오지 않았을 텐데 용케 구했군요.]
“…보스가 이렇게 차를 좋아하실 줄 전혀 예상을 못했네요. 그래도 너무 큰 지출입니다.”
[…그거 제가 탈 차 아닙니다.]
“……?”
뭔 소리야? 그 큰돈 주고 구한 차를 자신이 탈 게 아니라고?
[그 차에 환장하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마음은 있으나 너무 바빠서 미처 못 구했을 거예요. 손 사장은 그 차 몰고 미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트에게 가십시오.]
“대표님, 저번 미팅에서 빌이 그랬습니다. 다시 찾아와도 만나지 않겠다고요.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려고 생각 중입니다만.”
[손 사장님, 지금 당장 빌 게이트 비서 멀린다에게 전화를 하세요. 너네 회장에게 전해라. 포르쉐 959 초기 프로토 타입을 구했는데 운전해 보지 않겠냐고… 신발도 안 신고 튀어나올 겁니다.]
“……! 비서 이름은 또 어떻게 아십니까?”
너무 앞서갔다는 생각에 시혁은 아차 싶었다. 당연하죠, 빌 게이트는 그 여자와 결혼하는걸요. 이럴 때는 그냥 개무시하고 내가 할 말만 하는 거야.
[전에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여튼 아예 키를 줘 버리세요. 참! 근처 서킷도 하루 종일 예약해 놓고 사용권도 빌에게 같이 주세요. 뻑 갈 겁니다.]
“당신은… 정말 보스는… 신입니까?”
[하하하. 손 사장. 내일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손창의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진짜 그렇게 될지 아직 모른다. 다만, 보스가 도와주려고 나섰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이다. 몇 개월 동안 혼자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혼자가 아니었어.
이제 보스의 말을 입증해 볼 시간이다.
“안녕하세요? 일본 소프트파워 마사요시 손입니다.”
[…죄송하지만, 회장님께서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사정해도 약속, 잡아드릴 수 없어요.]
“아뇨, 멀린다 양, 굳이 약속을 잡을 필요는 없고요. 한마디만 전해 주면 됩니다.”
[…휴우, 메모는 넣어 드리겠습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말씀하세요.]
“예… 일, 1983년산 프로토 타입 포르쉐 959를 하나 구했다. 이, 서킷도 하루 종일 예약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삼, 나는 당신 회사 주차장에 있다… 이렇게만 전해 주면 됩니다. 멀린다 양.”
[…….]
“더 이상 억지 부리지 않겠습니다. 약속하죠.”
잠시 후, 손창의는 미친 듯이 건물을 뛰쳐나오는 빌 게이트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빌 게이트는 슬리퍼 차림 그대로 건물을 나오더니 주차장을 둘러보더니 곧장 손창의를 향해 또 달려왔다.
정확히는 손창의가 아니라 포르쉐 959를 향해서.
“하아, 하아, 하아… 손, 당신… 어떻게 이 차를?”
“선물입니다. 빌, 저는 내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라서요. 오늘 마지막으로 빌에게 이 차를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Oh! Nope! 안 됩니다. 이건 선물로 받기 너무 과분합니다. 제 평생의 드림카가 이 차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센스라면 당신은 일본 내 솔 에이전트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
“어차피 비즈니스는 사람이 하는 것, 상대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하는 능력이야말로 최고의 비즈니스 역량이죠.”
“아아아, 감사합니다. 빌!”
“미안하지만 손, 그 차 키… 그리고 서킷 티켓, 먼저 받을 수 없을까요?”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빌 게이트를 보며 손창의는 환하게 웃었다.
너무 기쁘면 눈자위에 물방울을 맺히고서 웃을 수 있는 거구나. 이렇게 쉬운 것을…….
* * *
삼성동 이만 평 중 팔천 평을 잘라 현도그룹에 넘겼다. 그 자리에 곧 현도백화점이 들어설 것이다. 시혁은 사십구 퍼센트 지분을 가진 어엿한 대주주가 되어 버렸다.
- 흠. 이거 괜찮네. 내년에는 분당에 현도백화점을 하나 더 유치해도 되겠다. 영감님 혈압 또 올라가겠다. 흐흐흐.
만 평의 코너변 대지에 올라갈 빌딩 청사진을 받고 보니 가슴이 뿌듯했다.
지하 3층에 지상 66층, 바닥 면적만 6천 평짜리 어마어마한 빌딩이 설 예정이다.
1995년 여의도에 올라간 63빌딩보다 6층이 더 높다. 63빌딩은 지하 3층을 빼면 실제 60층. 하지만 시혁의 K 타워는 지상 66층, 단연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다. 나머지 8천 평은 공원으로 조성해 멋진 녹지 공간을 만들 계획이었다.
실로 다 완성이 된다면 시혁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여기서 시작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의 전진기지가 여기다. 나는 그 꼭대기 층에서 내려다볼 것이다. 한 발씩 가고 있다.
기다려라. 자룡아.
“형님, 그렇게 바빠서 공부는 언제 합니까? 나한테 영어 스트레스만 주지 말고 형님도 책 좀 봐라.”
“내가 너냐? 이 닭대가리야.”
“씨. 세상 너무 불공평해. 누구는 아무리 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 그래, 태식아. 형도 신기하다. 대충 한 번씩 훑어만 봐도 마치 사진을 찍은 듯 다 기억이 나. 잊혀지지 않는 걸 어쩌랴.
“어떨 때 형님 보면 있잖아? 꼭 미래의 일을 다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다. 현도 회장님 말처럼 박수 무당도 아니면서.”
“태식아,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이 뭔지 아니?”
“엉? 그런 기막힌 묘수가 있단 말이네? 나도 좀 배우자. 뭔데?”
“미래를 창조하면 된다. 예측하는 방향대로 되도록, 내가 마음먹은 대로 성사되도록, 아예 미래를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다.”
“씨, 또 놀린다.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아니, 놀리는 게 아니고 사실이야.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면… 그때는 말이다. 내가 만들면 되거든.”
- 그게 내 최종 목표란다. 태식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만드는 거.
“너도 이제 곧 미국으로 출국하면 형이 심심하겠다. 영어도 대충 알아먹을 정도는 되었고… 고생했다. 그런데 미국 가서 어떤 공부를 할 생각이니?”
“음… 나는 있잖아. 장비 쪽으로 파 보려고. 어차피 내가 제일 관심있는 건 시스템을 구성하는 장비거든. 앞으로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가 세상을 지배할 건 뻔한데, 그 과정에서 장비가 없다면 기술 구현이 되겠나?”
“……!”
솔직히 저놈 머리를 열어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다.
시혁은 태식에게 아무런 언질을 준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동생이 스스로 길을 선택하도록 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어느새 훌쩍 커서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정해 놓고 있었다. 그것도 확실히 맞는 방향으로.
태식이가 얼마나 크게 성장할지 아직 알지 못한다. 미래에 태식은… 너무 불행한 삶을 살았었다.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화력 발전소에서 석탄을 퍼 나르는 임시직으로 근무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옷이 말려 들어가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었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태식의 장례식장에서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가.
이제 다행히 바뀌었다. 적어도 그때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 전화. 미국 K 글로벌 USA 메리웨더 대표님이란다.”
“그래?”
공사홍에게 연락을 받은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메리웨더와는 가벼운 주제로 통화를 몇 번 했었다. 그러나 시혁이 메리웨더의 경영에 관해서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메리웨도 역시 안부만 물어보고 통화를 끝냈었다.
[보스, 메리웨덥니다.]
“예, 존. 별일 없죠?”
[보스, 좀 보고가 늦었습니다만… 꼭 재가를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노벨상을 수상했던 제 지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공동대표로 모시고 싶은데 보스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하세요.”
[네, 네?]
“그렇게 하시라고요.”
[…….]
“그러라고 전권을 준 겁니다. 아! 공동대표로 등기하려면 제 사인이 있어야 하네요.”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존, 나는 말입니다. 적어도 일을 맡겼으면 철저히 믿습니다. 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제가 반대할 일을 없을 거예요. 앞으로도.”
[…감사합니다. 보스. 이렇게 믿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존, 한 가지만 명심했으면 합니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존은 프롭니다. 실적으로 증명하세요. 저는 존의 그런 능력, 하나만 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몇 개월만에 8%의 수익률을 올렸습니다. DHL로 매일 보고서를 보내는 것이 번거로워서 이제 인터넷 전자문서가 갈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요. 저는 존의 프로다운 자세를 믿습니다.”
알고 있답니다. 존 메리웨더.
당신은 결국 숟가락이 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보고는… 생각하자마자 했어야 해요. 묵혔다가 지금 할 게 아니고요. 그게 당신을 왼팔로 쓰지 못하는 치명적인 이유입니다.
머리는 빌려도, 심장을 빌릴 수 없거든. 심장은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느껴야 하는 거라고. 메리웨더.
‘당신은 숟가락에 당첨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