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36화 (36/150)

36화 만점 수집가

‘사법고시’로 알려져 있지만 정식 명칭은 ‘사법시험’이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고시라는 말이 귀에 익어 버린 탓에 불리고 있을 뿐이다.

소위 ‘개천용’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 사법고시에서 나오곤 했다. 불알 두 쪽밖에 없어도, 대학을 못 가도, 법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시험만 붙으면 ‘사’짜를 붙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판사님, 검사님, 변호사님… 일단 합격만 하면 젊든, 나이 먹었든 ‘영감님’이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었기에… 이렇게 인생역전 할 수 있는 사법고시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당연히 X나 어렵다. 죽을 만큼 힘들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 해 딱 300명만이 낙타가 되어 바늘구멍을 통과하니 가히 극악스런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중 절반이 판검사로 임용되고 나머지는 변호사로 나서게 되겠지만, 이도 너무 숫자가 적다 보니 일반인이 변호사를 선임하기 쉽지 않은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양삼 정권에 들어서서 1,000명으로 대폭 늘리긴 했었다.

민법 2,000페이지, 형법과 헌법도 1,500페이지, 선택과목 500페이지를 거의 달달 외워야 한다. 거기다 판례, 사례를 더하면 이건 안드로메다까지 길을 깔아도 될 정도다.

사람 머리는 아무리 똑똑해도 한계 용량이 있기 마련이거늘 몇 배 뛰어넘는 분량이다.

1교시는 헌법과 선택과목 시험으로 40문제, 25문제가 각기 출시된다. 100분 동안 풀어야 한다.

2교시는 형법으로 40문제, 3교시는 민법 40문제를 70분 동안 풀어야 한다.

1차 시험은 객관식이니까 잘 찍으면 되지 않느냐?

응, 아니다. 찍기와 연필 굴리기가 불가능한 구조다.

기본이 5지 선다형, 또 문제 중 절반은 8지 선다로 출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8개 보기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다. ‘맞는 것을 다 고르시오’ 또는 틀린 것을 다 고르시오’ 식이다.

웬만한 사람은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불과하고 시간 안에 다 읽는 것도 힘들다. 대단한 시험이다.

점심시간을 두 시간, 쉬는 시간을 한 시간 주는 이유도 그만큼 스트레스 만렙 시험이라는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시혁은 운동장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어제도 밤새 각 시군에 보낼 깃발 오더를 정리하느라 거의 잠을 못 잤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신체에 대해 각성을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선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감각은 더 예민하게 살아 있는데, 몸이 날씨의 변화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또 잠을 며칠 걸러도 별반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지금도 잔디밭에 누운 이유는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따가운 시선을 피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나온 것이다.

1교시를 치르고 한 시간이 주어지는 휴식시간 동안 모든 응시생이 책에 코를 박고 있는데 시혁만 멀뚱멀뚱할 수 없었다.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 당할 판이다.

하늘 참 맑다. 이렇게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면, 평화로움을 느껴야 정상인데 시혁은 눈이 시렸다. 저 뭉글뭉글한 구름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개같은 내 인생을 외치며 생매장당하던 그날의 트라우마는 깊고도 깊었다. 퍼석거리던 삽질 소리와 우수수 점점 차오르는 흙냄새. 종내에는 목을 넘고 입안까지 덮이면서 느꼈던 공포.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흙 알갱이가 눈에 들어와 쓰라렸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았었다.

백정의 차가운 눈동자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눈동자에 맺힌 이자룡의 느물거리는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기억에 감정이 더해지면 추억이 된다더니, 나는 갈수록 너에 대한 복수의 감정이 희석되지 않는다. 자룡아.’

후우, 후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분노를 삭이고 있을 때.

“너도 사람이었구나.”

“……?”

“그렇게 숨을 고르는 것을 보면 전혀 긴장을 안 한 건 아니었네?”

“시험은 잘 봤고?”

“그래, 네가 김시혁이지? 워낙 유명인사라서 몰라볼 수가 없네.”

“누구?”

“나? 네 선배지.”

뜬금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한 사람. 딱 봐도 몇 번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낭인 출신이다.

덥수룩한 수염과 소매 올이 다 삐져 나온 낡은 점퍼를 걸치고 청자 담배를 꺼내 무는 늙은 청년.

태양도 아니고, 거북선이나 은하수, 솔, 88 같은 담배가 널리고 널렸건만 노인들 때문에 단종하지 못하는 청자 담배를 꺼내는 사람.

“한 대 필래? 조금 씁쓸하기는 해도 제일 싸니까 피울 만해.”

“네. 주세요.”

“오! 너 같은 천재도 담배를 피네?”

“저 보통 사람입니다. 대통령도 외치는 판에 제가 무슨 별다를 게 있겠어요.”

“흐흐흐. 그래 잘 봤냐? 에이… 실례네. 당연한 이야기를.”

“대충. 선배는요?”

“글쎄… 워낙 많이 봐서 눈에 익을 만한데 막상 뚜껑을 열면 매번 낙방이구나.”

“…….”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 떨어지면 끝이다, 하면서도 또 매년 도전하는 내 모습, 이 담배와 똑같아. 중독이 된 거지. 나에게 담배와 고시는 끊기 힘든 마약인 셈이다.”

“선배, 몇 학번이십니까?”

“네가 87학번이지? 나는 거기에 10년을 더해도 손가락이 남는다. 흐흐흐.”

이게 문제였다. 고시 낭인 대열에 합류한 사람 중에 성공한 케이스가 몇이나 될까?

사실 개천용의 전설은… 허황된 이야기였다. 성공한 몇 사람의 이야기가 부풀려져서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 준 것에 불과하다.

고시는 블랙홀과 같은 곳이다. 떨어질수록 그 경험치가 축척되는 시험이 아닌 것이다. 그 험난한 시기를 아무 돈벌이도 못하고 오직 책과 씨름하려면 집안의 도움 없이…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다.

역대 고시 합격생의 통계를 봐도 그렇다. 94%가 중산층 이상의 뒷받침이 되는 부류가 차지한다.

개천용의 등용문은 진짜 특이한 몇몇 천재에 한정된 그야말로 전설이었던 것이다.

이 선배는 이도 저도 아닌 집안을 거덜 낸 사람일 확률이… 순도 99% 황금이라는데 한 표를 보탠다. 안타깝지만 어떤 충고도 먹힐 시기가 넘어 버렸다. 그걸 본인도 알지만 블랙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법고시가 인생을 바꾸는 열쇠가 된 순기능도 없지 않았다.

다른 자격 따위 필요없다. 고졸이든, 전문대졸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출발점이 같다.

그 누구든 동일한 위치에서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똑같은 기회를 주는 것… 이게 가장 큰 순기능이 아닐까?

“선배, 남은 시험 잘 보세요. 청자 담배처럼 끈기 있고 구수하게 합격하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

* * *

이변은 없었다.

또 전 언론사가 한국대학교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국대학교는 고시 1차 합격 정도로는 플래카드를 붙이지도 않는다. 너무 많아서 이름을 다 명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법대 게시판에 매직으로 직직 휘갈겨 붙이는 게 전부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한 번 더 초유의 사태가 터진 것이다. 미친놈이 미친 짓 해 버린 꼴이다.

“그만들 돌아가세요. 오늘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강의실 사진이라도 찍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리고 담당 교수님 인터뷰라도.”

“기자님들, 여기는 학교입니다. 연예기획사가 아녜요.”

“조교님, 왜 이러십니까? 지금 연예기획사 문제가 아니잖아요. 벌써 두 번째 역사를 쓴 겁니다.”

“겨우 1차 시험 합격을 두고 호들갑 떨지 마시고 나중에 학생의 의향을 물어서 따로 자리를 마련할 테니 제발 돌아가 주세요. 수업 진행이 안 되잖아요?”

“제기랄… 겨우 1차라뇨? 또 만점을 받았는데. 그 극악한 고시 붙는 것만도 힘든 판에 만점이라고요. 항간에서는 김시혁 학생의 별명을 만점 수집가라고 부르는 거 모르세요?”

“…만점 수집가요?”

“예, 학력고사 최초 만점, 사법고시 최초 만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최연소 합격자 타이틀까지 거머쥐었습니다.”

그날 새벽 댓바람부터 시혁은 간만에 불광 자비사에서 스님 허벅지를 베고 누워 과자를 먹고 있었다.

“아버지. 이번 달 과자 안 왔어?”

“이놈아, 그 양반 내일 모래 대통령 취임식이다. 정신이 있겠냐? 너는 오라고 안 하디?”

“관심없어. 몇 번 사람이 왔는데 안 간다 했어.”

“참… 별종은 별종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땡땡이까지 치면서 죄 없는 애비 허벅지 고문이냐?”

“오늘 학교 가면 시달릴 게 뻔해. 안 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오늘이 뭔 날이기에?”

“아, 씨. 그런 게 있어. 아쉽네. 다 먹어 가잖아.”

“너는 과자밖에 안 보이냐? 애비 다리 떠는 거 안 보여?”

“참, 아버지.”

“돈 없다.”

“백 배로 불려 줘도?”

“…얼마 주랴? 저번에 네가 가져온 돈 거의 그대로 있다. 보육원 개축하는데 한 천만 원 썼을 게다.”

“헤헤헤, 돈 필요 없어.”

“죽을래? 백 배 불려 준다며?”

“땡초 같으니… 돈독 올랐어?”

이래서 여기가 좋다. 언제 와도 집처럼 편안한 쉼터. 맑은 공기와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느끼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하지만, 시혁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기자들의 개코를 무시한 것이다.

* * *

조갑조는 국민신문에 천신만고 끝에 입사했었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고시와 다르지만 언론사에 입사하려면 진짜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계열 신생 신문사라서 약간 느슨했던 국민신문에 겨우 턱걸이로 입사한 뒤 이 년째 뻗치기를 하는 중이었다. 새벽부터 담당 구역의 경찰서와 파출소까지 순례를 하고 매시간 캡에게 보고 해야 하는 고달픈 신세… 언제나 자기 이름 박은 기사를 멋지게 장식할 수 있을지, 처량하다.

어라? 푸념 중에 눈치를 보니 새벽부터 데스크가 웅성거렸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모여 연신 탄성을 내뱉는 것을 보고 슬쩍 끼어들어 귀동냥을 했다.

만점 수집가? 최연소 고시 합격? 단독 인터뷰를 따내면 특종? 무조건 승진?

귀가 번쩍 열렸다.

보나마나 학교로 가 봤자 짬밥에 밀려서 뒤통수 보기도 힘들 게 뻔하다.

김시혁에 대한 자료는 어느 정도 다 공개되어 있었다. 천애고아, 보육원 출신, 고교 3년간 내리 전교 일등, 학력고사 최초의 만점 획득, 한국대 법대 수석 입학…….

다들 하이에나처럼 학교로 몰려가겠지. 김시혁을 취재했던 어느 선배의 말에 의하면 반골 기질이 역력했다고 한다. 한 성깔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 인물이 오늘 학교를 갈까? 누구보다 자기 점수를 예상할 수 있는 판에 번거로움을 자초할까?

아니, 나같으면 그냥 짱박힐 것이다. 어디로?

조갑조는 신입들도 쓰지 않는 낡은 구형 카메라를 슬며시 쥐고 일어났다. 그리곤 없는 형편에 택시를 잡아타고 말했다.

“기사 아저씨, 연신내 불광 자비사… 따블!”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텐데?”

“사십 분, 따따블!”

“벨트 하쇼, 죽기 싫으면.”

그렇게 도착한 불광 자비사 앞에서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조갑조는 달렸다. 여기에 내 뻗치기 인생의 끝을 낼 귀인이 틀림없이 있을 것을 직감했다.

마침 아침을 준비하는 공양주 할머니가 된장을 뜨려는지 장독대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 김시혁 학생 여기 있죠?”

“아이고 깜짝이야. 아침 댓바람부터 뭔 짓이래?”

“약소하지만 이거… 약과나 사 드시고, 지금 있죠?”

“쯧쯧! 돈 생각했다면 절간에 공양주 하겠나? 됐고, 그리 땀을 흘리는 모습이 처연해서 알려 줌세. 저기 대웅보전 옆에 작은 방 보이지? 거기 주지스님 방에 있을 거야.”

잡았다!

희열감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올랐다.

이제 조용히 접근해서 갑작스럽게 녹음기를 들이 대면… 흐흐흐. 내 처량한 인생, 탄탄대로다.

하는 짓으로 봐서 인터뷰를 거절할 확률 백 퍼센트, 기습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혁아! 여그 쓰잘데기 없는 기자가 찾아왔다.”

공양주 할머니의 고함이 산사의 아침을 깨워 버렸다.

새 됐다. 장독대의 참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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