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42화 (42/150)

42화 미국 가기 전에 끝내자

화려하게 불을 밝혔다가 비둘기 몇 마리를 구워 먹은 성화가 점화되면서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이 88올림픽은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긍정 효과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더불어 동방의 작은 개발 도상국의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지난 올림픽들이 피로 물들거나, 냉전 때문에 반쪽짜리로 개최된 것과 달리 온전히 세계 만방의 축제로 열렸다는 점 하나만 봐도 성공한 행사였었다.

[노태후, 정말 이럴 거야?]

“전들 어쩌겠습니까? 국민 여론이 그런데.”

[내가 유치한 올림픽이야. 그런데 개막식에 오지 말라는 게 말이 돼?]

“전도환 대통령 각하, 관중들이 각하에게 야유 하는 걸 외국인들이 보면, 이거 이거… 국제적 망신 아니겠습니까?”

[이익!]

“조금 참으세요. 다 각하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가뜩이나 말이 많은데, 혹시 군중들이 계란이라도 던지는 날에는 장작처럼 타오를지 몰라요.”

결국 올림픽을 유치한 전도환은 올림픽 개막식 때 노태후 대통령이 개회식을 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봐야 했다.

전도환과 통화를 끝낸 노태후는 므흣한 미소를 짓고 앞에 앉은 시혁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이 양반, 고집이 좀 세지. 하하하.”

“예, 그 고집 때문에 말년을 불운하게 보낼 것입니다.”

“그래?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물 흐르듯이 하시면 됩니다.”

“물태후라고 코메디언이 놀리는데도?”

“좋은 현상입니다. 비로소 각하께서 군인이 아니라 대중 정치인으로 인식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도 물통령, 물태후라는 말이 공공연히 내뱉는다는 거 온당치 않아. 에이…….”

“…그렇긴 하죠. 그런데 각하, 불은 재라도 남기는데 물은 한번 쓸어 버리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아십니까?”

“…….”

“올림픽이 끝나면 과거와 단절을 선언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과거와 단절하라?”

“네, 제가 감히 정치에 개입할 자격도 생각도 없지만, 대통령 각하와의 인연을 생각해 조언을 드리자면… 전도환 전 대통령의 비리, 친인척 비리를 철저히 파헤쳐서 엄단하는 조치가 따라야 합니다.”

“으음…….”

“그래야 각하가 삽니다. 상왕 노릇을 하려는 전도환 일파를 쳐내지 못하면, 각하의 미래가 암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전도환이는 내 죽마고우 아닌가? 그런 친구를 어떻게 공격한단 말이냐? 주변에서 나를 욕할 거야.”

이 음흉한 양반아. 당신 속마음은 이미 들켰어요. 내 입에서 명분을 찾으려고 하는 거, 다 압니다.

“각하, 일본말 꼬붕… 아시죠?”

“그래. 알지. 직속 부하를 말하는 거잖아.”

“아닙니다. 직속 부하는 따까리라고 합니다. 오히려 직속이 아니지만 언제든 부릴 수 있는 곁가지 졸개를 꼬붕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따까리도 못 되는 꼬붕에 불과하다.”

“지금은 아니죠. 그렇지만 그렇게 취급당할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허! 따까리에 못 되는 꼬붕이라?”

“특히 장사동 전 안기부장은 무조건 구속시키십시오. 그런 모사꾼이 더 암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정보를 쥐고 있으니까요.”

이 정도만 해도 알아들을 것이다. 노태후에게 시혁은 나이와 상관없이 정신적 멘토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시혁의 말을 흘려듣지 않을 것이다.

“알겠네. 어차피 한 번은 털고 가야 할 일. 그리하지… 참, 외국에 다녀오고 싶다고?”

“네. 미국을 거쳐 중국에도 다녀오려고 합니다.”

“미국은 이해하겠는데, 중공에는 왜?”

“얼마 전 부총리로 취임한 후진타오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음. 기억나. 올림픽 위원으로 왔던 떼놈?”

그 당시의 인식이 그랬다. 못살고, 헐벗고, 대가리만 많은 중공을 적이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되놈으로 부족했는지 떼놈이라 부르고, 짱깨, 짱꼴라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곧 이 되놈들이 돈과 자본주의에 눈을 뜨면서 세계를 바퀴벌레처럼 갉아먹게 되거든요.

“자네, 학교는 어쩌려고?”

“어제 사시 2차 시험 봤습니다.”

“호오… 이번에도 만점 수집가의 위용을 볼 수 있겠군. 기대하겠네.”

“2차 시험은 전부 주관식입니다. 만점이 나올 수 없는 구좁니다.”

“그래도 수석은 할 거 아닌가? 연수원은?”

“네, 연수원은 천천히 들어가도 문제없으니, 먼저 합격하면 당분간 휴학하고 미국과 중국을 다녀올까 합니다.”

“그래, 그 정도야… 출국 허가서, 외교부 장관에게 말을 해 놓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냉큼 끼어드는 예지. 제발, 좀 참아라.

“아빠, 나도 미국 따라가면 안 돼? 오빠 혼자 보내면 금발머리 기집애들이 달라붙을 거라고.”

“…너 올해 대학 시험 쳐야 하잖아?”

“아빠, 나 몰라? 시험 날 돌아와서 대충 봐도 한국대는 갈 수 있어. 보내 줘어!”

“예지, 너… 꼴등이라며?”

“……!”

* * *

“이번에도 독점 인터뷰 되겠지?”

“…자신 못 합니다.”

“자네한테 우리 신문사 사활이 걸렸어. 알지?”

“…….”

“전처럼 그 스님 있잖아? 다리 잡고 늘어져.”

“약발이 떨어져서…….”

“만약, 따오면 바로 청와대 출입으로 박아 준다. 오케이?”

아… 부담 백 배다. 사실 전의 특종은 스님이 불쌍하게 봐줬기 때문이었다. 너스레를 떨며 당신 사진을 찍는다고 했지만, 그것도 김시혁의 반발을 무마하는 액션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심히 불쌍했던 것이다. 국민신문은 태생적으로 기독교 계열 언론사다. 스님이 자신을 측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독점 인터뷰는 고사하고 사진 한 장 박지 못했을 게 뻔하다.

그 덕분에 사회부 뻗치기를 벗어나 당당히 구역을 배정받은 준캡의 위치까지 단숨에 뛰어올라 동기들의 시샘을 받는 처지가 된 조갑조 기자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도 가보자. 힘들겠지만.

“스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 부처님의 은덕이 가득하십시오.”

“저런저런, 저렇게 맹해서야 어떻게 출세 하누?”

“헤헤헤, 저도 걱정입니다. 성격이 원래 그래서요.”

“저기 봐. 저번에 자네가 독점을 따낸 후 아예 죽치는 기자들이 득시글거려.”

대충 봐도 올 만한 언론사는 다 온 것 같다.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반가이 맞이해 주는 스님 덕에 시원한 보리차를 단숨에 들이켠 조갑조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럴… 아직 발표도 안 났는데 벌써부터 난리들이네. 하긴, 합격이 문제가 아니지. 그건 당연한 것이고, 수석을 먹었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원래 2차 시험은 합격 여부만 알려 줄 뿐 등수 발표는 하지 않는다. 연수원에서 담당 교수로부터 전해 듣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전 국민적 관심사가 쏠려 있는 것을 의식한 듯 최고 점수를 받은 수석만 따로 발표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라 기자들이 저 난리를 치는 것이다.

전 같으면 쳐다볼 일도 없는 초라한 절과 보육원이건만, 지금은 마치 성지처럼 모여 있는 기자들… 참 궁상스럽다.

기자회견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식당에 들어가 앉지도 못한다. 공양주 할머니의 주걱에 다 쫓겨났다. 그저 작은 마당에 쪼그려 있다가 김시혁과 관련된 작은 꺼리라도 얻지 못하면 조인트가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떴다!”

정각 열 시, 방송 차량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기자들은 무조건 달렸다. 이변은 없었다.

요사채(승려가 기거하는 방) 앞에서 기자들은 쉬이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스님의 꼬장은 소문이 자자하다. 괜히 앞장섰다가 쫓겨나면 그나마 작은 꼭지도 따지 못한 채 데스크에게 조인트를 맡겨야 하니까.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는지 이윽고 문이 열렸다.

“방이 좁으니까 세 명만 들어와요. 거기 국민신문 조 기자는 먼저 들어오고.”

헉- 간택을 당하다니… 눈물이 핑도는 조갑조… 하늘이시여!

“방송 한 팀하고, 신문 한 팀 밖에 못 들어간다. 우리 자산일보가 신문 대표로 들어갈게.”

“조까! 왜 너희 맘대로 정하고 지랄이셔? 우리 동화가 먼저 왔거든?”

“자산이 그래도 일등이잖아? 당연한 거지.”

“신문에 일등, 이등이 어디있나? 다 똑같은 언론사끼리.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가자.”

삼십 군데가 넘는 신문사 기자들은 편을 갈라 가위바위보를 위한 숨을 골랐다. 여기서 이겨야 본선에 진출한다. 비장한 각오로 뭐를 낼 지 짱구 굴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야, 저기 신문애들은 그렇다 치고 방송은 우리 국영 KBC 1TV가 가는 게… 맞겠지?”

“네미… 뒷말 흐리지 말고 우리도 손 내밀어!”

여기도 네 개 방송사가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슬그머니 손을 뒤로 감췄다. 여기는 바로 결선이다. 한 번만 이기면 방에 들어갈 수 있다.

결국 방송사는 MBS가 이겼다고 희희낙락할 때, 신문사 기자들 쪽은 난리가 나 버렸다.

“야, 이 새끼야. 너는 이미 결정되었는데 네가 이기면 어떻게 하냐?”

“그건 스님과 개인 자격이고요. 지금은 신문사 대표로 참석한 것인데요?”

“그게 그거지. 반칙이다. 너는 빠지고 결선에 오른 나머지 세 개 신문사가 다시 가위바위보 하자.”

“제가 이겼는데요? 평소에도 눈치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어서… 헤헤.”

항상 반작용이 있는 법이다. 잽싸게 딜을 거는 중양일보 기자.

“나는 인정! 조 기자, 너한테 지명권 있다. 알지? 나중에 우리 팀 단독 걸리면 무조건 너하고 같이 공유한다. 오케바리?”

“야, 야, 야!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십만 원!”

“이 미친 또라이 새끼… 너는 기자로서의 긍지도 없냐?”

“이십 만!”

“그만 해! 명색이 일간지 기자라는 새끼가.”

“이십오 만!”

“콜! 중양일보 선배님. 당첨입니다.”

기자의 긍지를 강조하던 자산일보.

“…자산, 삼십 만!”

“낙찰됐는데요?”

* * *

“김시혁 군, 소감부터 한마디.”

“감사합니다.”

“…끝이야?”

“예.”

“좋아, 앞으로 계획은? 최초 타이틀을 변함없이 지켜 냈는데, 사법 연수원에 바로 들어갈 건가?”

“아뇨, 저는 당분간 휴학하고 세상을 둘러볼 계획입니다.”

“그… 지금, 자네는 대한민국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어. 그런데 휴학하고 쉰다?”

“기자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격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판검사든, 행정부 관료든, 또 외교관이든, 자네가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잖아?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최고 자격인 것이지.”

“판검사가 되고, 행정 관료나 외교관이 되면 성공한 것이라는 기자님 발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성공한 삶은 그런 외적 치장에 있지 않습니다. 기자님은 성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으신가요? 저기 촬영 기사님은 실패한 삶인가요? 우리 보육원에 매일 무료로 식사 공양을 챙기는 할머니는요?”

“…….”

“꼴찌 없는 일등도 있습니까? 꼴찌는 무조건 패배자로 살아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사회라는 바다에서 누가 성공한 삶을 살게 될지 섣부른 예단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냥 저는 남보다 시험을 조금 더 잘 봤을 뿐입니다.”

“…….”

“그래서 세상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공부는 하나의 조건일 뿐, 성공을 약속하는 절대적 열쇠가 아니거든요.”

짝짝짝-

밖에서 귀를 활짝 열고 듣고 있던 기자들 사이에서 터진 박수는 불광 자비사 전체로 퍼져 나갔다.

조갑조도 정신없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 멋지다! 나도 할 수 있다면 저렇게 살고 싶다. 김시혁은 이미… 자유인이구나.

다들 멍하니 시혁의 빛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그때.

“자, 자. 그럼 사진 찍을 시간이네. 시혁아, 이리 와라. 내가 이럴 줄 알고 머릴 면도날로 잘 밀었지. 껄껄껄.”

“…….”

“다들 알지? 내가 조금 앞에 나오도록 각도를 잘 잡아야 해. 안 그러면 다음에 국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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