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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43화 (43/150)

43화 미국으로 (1)

처음 나가는 외국이다. 지금껏 국내에서 리모컨을 눌렀다면 드디어 직접 움직일 시간이 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과장과 총장까지 나서서 시혁을 만류했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기록을 써 나간 시혁의 능력이 아까웠던 것이다. 아무리 한국대학교가 비교불가한 곳이지만, 앞으로 시혁 같은 존재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한 명 한 명 모두 수재 아닌 사람이 없는 한국대학교. 거기에서도 시혁은 군계일학이니까. 그러나 그들도 아직 시혁의 일부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현도그룹 정 회장은 공항까지 시혁을 태워 주었다.

“여기 명함, 급할 때 연락하거라. 우리 현도종합상사 미국 지사장이다.”

“감사합니다. 제가 없더라도 K타워 한번씩 챙겨봐 주세요.”

“그래, 우리 현도백화점도 첫 삽을 떴으니 중간중간 들러 같이 살펴보마.”

“…전에 말씀드렸던 거 잊지 마시고요. 회장님.”

“일없다. 이놈아, 내 고집대로 사는 게지.”

“절대 안 됩니다. 진짜 회장님이 그 판때기로 들어가는 순간 평생 이룩한 것들이 갈기갈기 찢어질 겁니다. 이건 진심으로 회장님을 걱정해 드리는 말씀이에요.”

“할아버지라고 불러 봐, 그럼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

“에이… 쑥스럽게 왜 그래요? 그냥 회장님이 입에 착 달라붙고 좋은데.”

“너, 내가 준 사진들 보기는 봤냐?”

“미쳤어요? 제, 제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 선을 봅니까?”

“자랑은 아니다만, 우리 토끼들이 다른 집 아이들하고 틀려. 현도 가문은 여자가 나서서 경영한답시고 설치는 꼴 못 본다. 오로지 현모양처를 목표로 교육시키거든. 요리도 잘해, 이놈아.”

“그건 오히려 약점입니다. 사업머리는 남녀를 구분해서 타고 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능력 있으면 시켜야죠. 나중에는 총리도, 대통령도 여자가 나오는 시절이 올 거예요.”

“엥? 쓸데없는 소리.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여자가 대통령을? 기가 찬다.”

영감님. 그렇게 되거든요. 그건 아집입니다.

“하여튼 네 말은 심사숙고 하마. 우리 현도 직원이 몇 명이냐? 그들과 가족이 주위 사람들 한 둘만 설득하면 바로 당선이 될 것도 같아서 쉽게 포기가 안 되는구나.”

“할아버지.”

“엉? 크하하하. 거 간만에 정말 귀가 즐겁구나. 그래. 시혁아.”

“다 몽상입니다.”

“…….”

“간신은 자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모시는 군주를 죽음으로 몰 뿐이에요. 귀에 달콤한 말을 지껄이는 사람이 있다면 일 순위로 쳐내세요.”

“귀에 달콤한 말을 하는 이가 간신이다?”

“예, 할아버지는 정치의 잔인함을 아직 모르세요. 그냥 돈 달라면 적당히, 예… 주시고요. 특히 김양삼과는 좋은 관계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 무식한 고집쟁이 김양삼이?”

“뒤끝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비껴갈 수 없는 분이에요. 절대 그 양반 심기를 거스르지 마세요.”

“……다음은 김양삼이라는 말이구나.”

“그것까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할아버지와 천적이 될 소지가 농후합니다. 맞붙지 마시고, 한발 양보하면 다 잘될 겁니다. 아셨죠?”

그래야 합니다. 그분과 척을 지고 대통령 출마를 하시면… 현도가 작살 납니다. 당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현도그룹이 추락한다고요. 다시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할아버지.

시혁은 유난히 피붙이 못지 않게 정을 주는 정조영 회장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이래 가장 걸출한 기업가이자 현자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현도라는 세계적인 기업군을 일군 것도 그렇지만, 풀뿌리를 캐 먹던 황무지 같은 환경을 딛고 진정한 흙수저 성공신화를 이룬 영웅이었다.

그런 이가 권력의 갑질에 질리고 질려 버린 것이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너희에게 바치는 돈으로 내가 정치세력을 만들고, 내가 대통령을 하겠다…….

이게 오산이었음을 지금은 모르고 있었다. 이 선택을 하는 순간 정치권에게 공동의 적으로 찍히고, 그 여파가 당신이 평생을 바쳐 일군 현도그룹에게 얼마나 큰 시련을 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시혁은 그런 정조영 회장이 안타까워 귀에 못이 박히게 경고를 날리곤 했었다.

“하여튼, 혹시라도 노파심에 드리는 말인데요. 만약, 할 수 없이 그런 결정을 해야 한다면… 결심을 하기 전에 꼭 저랑 상의해 주세요. 꼭입니다.”

“……알겠다. 내가 마지막에는 반드시 너에게 연락하마. 이것 받아라.”

“……!”

야! 이게 지금 나왔던가? 너무 생경스럽지만 반가웠다.

“솔직히 성능은 모토로라 벽돌같이 생긴 것이 더 좋다만… 그래도 외국에 나가니까 한국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샀다.”

“아… 삼송 SH- 1000이네요. 진짜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놈의 새끼, 진짜 박수무당 맞네. 아직 시중에 출시도 안 된 걸 네가 어찌 이름까지 아누?”

“……!”

“하여튼 내가 삼송 어린 회장 놈에게 직접 전화해서 달라고 한 거다. 미국 가면 거기에 맞게 개통을 해야 한다더라. 앞으로 재깍재깍 전화 받거라.”

그랬구나. 올림픽에 맞춰 국내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었지. 그리고 모토로라가 8000S(일명 벽돌 폰)를 출시하자 삼송도 더 기다릴 수 없어서 이 SH- 1000를 급히 내놓았었다.

당시 자동차 한 대 값으로 서민들은 쳐다볼 수 없는 부의 상징이었다.

무겁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없는 무게. 그래도 이게 어디냐?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잘 쓸게요.”

“오냐. 네가 좋아하니 나도 즐겁구나. 몸 조심하고 자주 연락하거라. 거기 1번에 내장된 것이 할애비 번호다.”

* * *

드디어 간다. 미국으로.

내가 꿈꾸던, 무한 자본을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로 미국만 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웰컴 드링크는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예, 그냥 오렌지주스 있으면 주시겠어요?”

올림픽을 전후해서 생긴 아시아나 항공의 일등석은 넓고 편안했다. 스튜어디스가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 주더니 잠시 후에는 기장이 다가와 일일이 인사를 건네왔다. 대한항공보다 후발주자로 출범한 아시아나 항공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온갖 서비스를 베풀었고, 덕분에 시혁은 뉴욕 케네디 공항까지 안락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시혁아!”

“삼촌, 왜 나오셨어요? 제가 알아서 갈 텐데.”

“삼촌이란 소리가 너무 행복하구나. 너를 미국 땅에서 보는 날이 오긴 오네.”

“나이가 들수록 감상적이 되시네. 에이… 뚝!”

공사홍에게 시혁은 자식이자, 조카이자, 세상에 스님 빼곤 유일한 가족.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호텔로 가겠니? 아니면 삼촌 숙소로 갈래?”

“당연히 삼촌과 같이 지낼 숙소죠. 겨우 하루 지났는데 벌써 얼근한 라면과 김치 생각이 간절합니다.”

“누구나 외국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더라. 오죽하겠냐. 가자.”

푸근하다. 이분이라면… 이익이나 돈 같은 것 때문에 가슴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평생, 죽는 그날까지 옆에서 토닥이며 갈 수 있을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박혔다. 공사홍 삼촌의 가슴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뉴욕의 첫 인상… 행복했다.

“메리웨더 대표에게는 너 온다는 말을 안 했다.”

“잘하셨어요. 서프라이즈를 한번 해보죠. 뭐.”

“흐흐흐, 그놈 화들짝 놀랄 얼굴이 선하다. 지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중이다.”

“삼촌, 그 사람도 프롭니다. 나는 그의 실적에 따라 정당한 페이를 지불하면 되는 거고요.”

“너는 손창의와 메리웨더를 다르게 생각하는구나.”

“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부류입니다. 꼭 비교하자면 신체 일부와 숟가락이라고 할까요?”

“응, 기억한다. 전에 말했던 숟가락론.”

“메리웨더는 앞으로 십 년간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잘할 겁니다. 그쪽 분야에서 그는 최고예요. 하지만… 심장의 맥박이 우리와 달라요. 그는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래, 알겠다. 그런데 그 휴대전화기 신기하구나. 삼송 로고가 박힌 전화기는 처음 본다.”

“네, 아직 미국 시장은커녕 국내에도 출시가 안 된 겁니다. 현도 정 회장님이 주셨어요.”

“음… 삼송전자가 목표 설정을 잘했어. 역시 삼송 이건호다.”

“그를 높게 보시네요?”

“시혁아, 네가 삼송에 가진 반감을 알지만,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은 달리 봐야 한다. 이건호 회장은 지금의 삼송을 혁신할 것이다. 그는 희대의 승부사다.”

아뇨, 삼촌. 저는 이건호를 제대로 알아보는 삼촌에게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물… 맞죠. 세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삼송이라는 이름을 반석에 올릴 사람이니까요.

“한번 만났습니다.”

“…이건호?”

“네. 사람을 보냈길래 오라고 했죠. 하하하. 그랬더니 아예 총장실을 빌렸더라고요. 기숙사 건물을 지어 주는 조건으로. 통은 큰 사람입니다.”

“어떻더냐?”

“사자의 기상, 뱀의 심장, 거기다 승부사 기질… 이렇게 느꼈습니다. 다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냉혈함도 같이 봤어요.”

“그래도 싸울 테냐?”

“당연하죠. 더 의욕이 끓습니다. 제가 면전에 대고 그랬거든요.”

“…….”

“회장님이 이룩할 삼송을 내가 꼭 갖겠다고.”

“헉! 너무 쎄게 나갔다. 아직 발톱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고 얘기했잖느냐?”

삼촌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충분히 힘을 비축해서 단번에 목을 물어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를 해왔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 참기 힘들었다. 사실 이건호 회장과는 직접적인 원한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마주한 채 대화를 해보니… 그 피는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이자룡은 아버지 이건호를 빼다 박은 것이다. 그 냉혹한 심성까지.

조금 어리숙하게 보일까… 가면을 쓰고 대해볼까…

아니었다. 이건호는 이미 이자룡 최고의 난적은 시혁이라는 걸 감지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바로 사과를 하겠다는 말로 간을 본 것이다.

자신의 시대가 끝나고 난 후 이자룡에게 닥칠 위험을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그도 아버지니까.

* * *

“알아봤나?”

“네, 회장님. 기사에 나온 대로 휴학계를 냈습니다. 그리곤 종적을 감췄습니다.”

“여기 안기부 파일에 의하면, 그놈은 적지 않은 자본을 가지고 있어. 기가 막히는군. 이렇게 운이 따르는 놈은 본 적이 없어.”

“저도 신기합니다. 어떻게 올림픽 휘장 사업으로 그런 떼돈을 벌 수 있었는지.”

“문제는 그 다음이야. 그 자본을 이용해 어떤 짓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노태후 대통령 막내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집 큰아들은 미국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던데. 또 딸은 미국에서 선강그룹 아들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중이고 말이야.”

“선강이야 직물 쪽 전문 아닙니까? 재계 순위도 한참 밑이고, 별문제 없을 겁니다.”

“바보 같은 소리, 대한민국에서 대통령과 사돈이 된다는 말 무슨 뜻인지 몰라? 모르긴 몰라도 이 정략 결혼의 대가가 재계를 한바탕 뒤집을 거야.”

“네, 따로 대비를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고… 우리와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잖아? 정작 문제는… 이놈이야. 김시혁.”

“저… 회장님, 아무리 신동이라도 아직 어린놈입니다. 너무 앞서서 걱정하는 건 아닐지요?”

“그렇게 생각하나? 이놈이 어느 날 노태후의 막내 사위로 등장해서 삼송을 향해 칼을 겨누면? 또 이놈이 대호그룹 김호중 회장처럼 미친 듯 성장을 한다면?”

“설마… 그리 되겠습니까?”

“이 실장, 자네는 그놈과 두 번이나 만나고도 아직 모르는군. 그놈은 맹수야. 언젠가 자룡이를 위협할 생사대적이 될 것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어.”

“…….”

“참! 현도 영감이 전화기를 두 대 달라고 해서 보낸 적이 있어. 기억하나?”

“예.”

“그때 자식 같은 놈이 미국에 가는데 선물로 주려고 필요하다 그랬지. 자식 같은 놈이라고 했어. 자식이 아니라.”

“가까운 지인을 주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아냐 아냐, 안기부 파일에 현도 영감이 한국대학교에 가서 이놈과 길거리 음식을 먹었다고 했거든… 몇 번이나.”

“……!”

“한번 알아봐. 미국 지사에 연락해서 최근에 입국한 한국인 중에 김시혁이라는 승객이 있었는지.”

“네, 만약 김시혁이라는 놈이 미국으로 출국했다면 무조건 반공교육 이수를 했을 겁니다. 외교부 쪽 삼송 장학생들을 통해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이건호의 눈빛이 깊게 가라 앉았다.

‘운까지 따르는 놈이다. 위험해. 너무 찝찝한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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