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보물 창고 채우기 (1)
“빠르네요?”
“응, 바로 입금됐다.”
“하하하. 그 사람… 참.”
“정신이 번쩍 들었을 거야. 네가 이렇게 전격 등장할 줄 생각 못 했을 테니까.”
“놔두세요. 서로 간에 룰만 잘 지킨다면 나쁘지 않습니다. 사냥 잘하는 사냥개를 삶을 이유가 없죠.”
“그렇지.”
“그동안 배당 수익이 1억 8천만 달러네요.”
“그래, 순수한 배당 수익이지. 정말 짧은 시간에 큰 자금을 만들었다. 시혁아, 이 돈을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만든 거냐?”
“삼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정도 자금에 만족하지 않아요. 이건 그야말로 기침입니다.”
“기침?”
“예, 재채기를 한다고 사람이 날아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폭풍은 나무를 뿌리째 뽑고, 건물도 날려 버립니다. 세상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돈을 갖겠다?”
“예, 이 더러운 세상은 그냥 바뀌지 않더라고요. 누군가 혁명을 하거나, 개혁을 하지 않는 한 제자리 걸음입니다.”
“가시밭길을 골라서 가겠다는 말로 들린다. 삼촌된 입장에서는 말리고 싶다만, 나도 남자… 한번 해보자.”
둘의 손이 뜨겁게 겹쳐 졌다.
“메리웨더는 쉽사리 배신하지 못할 겁니다. 뿌리를 부정하는 순간 자신도 같이 무너지는 것을 아니까요. 하지만 호시탐탐 그물을 찢으려고 시도하겠죠.”
“소인배다.”
“복리의 함정 아세요?”
“…….”
“예를 들어 매월 100만 원씩 금리 5%짜리로 10년간 적금을 든다고 쳐요. 원금이 1억 2천만 원에 이자는 3,000만 원 정도 됩니다.”
“그런데?”
“하지만, 복리로 10년 간 납입하면 이자가 500만 원 더 붙습니다.”
“흠, 그리 큰 차이를 못 느끼겠다.”
“그렇죠. 그런데 20년 간 납입하면 원금 2억 4천만 원에 이자가 1억 7천만 원으로 늘어납니다.”
“……!”
“원금과 이자가 합쳐져서 새로운 이자를 발생시키고, 또 그 이자도 합쳐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겁니다.”
“…….”
겨우 개념을 잡은 눈치다.
“더군다나 메리웨더는 레버리지를 30배까지 끌어올려 배팅을 하면서 평균 수익률이 연간 40%에 육박하는 가공할 실적을 낼 겁니다. 당분간 쭈욱.”
“…….”
“그리되면 K 글로벌 USA가 십 년 후에 얼마를 벌게 될까요?”
“…무섭구나. 3년이면 거의 10배, 다시 3년이면 30배, 그리고 10년 후면 백 배가 훌쩍 넘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네, 그게 복리가 가진 무서운 함정이죠. 우리 원금 7억 달러는 700억 달러가 됩니다.”
“10년 후 그 돈을 한꺼번에 빼 버리면 회사가 휘청거리지 않을까?”
“어차피 메리웨더는 마지막에 무너집니다. 외부적인 영향으로 인해서… 그 전에 우린 빠집니다.”
“그래서 순수 회사의 배당수익만 달라고 한 것이구나. 원금과 이자는 계속 복리로 굴리도록 두고… 이제 알겠다.”
“예, 삼성동의 K타워 공사비도 결제해야 하고, 우리도 손가락만 빨 수는 없잖습니까?”
“일본 부동산을 팔 때 마지막에 후려치면서 30%를 더 받은 돈이 남아 있다만.”
“아! 그 돈도 있었죠? 150억 엔(약 1억 2천만 달러)이나 되네요. 배당 수익과 합해서 딱 3억 달러라… 그럼 이 돈으로 잔인한 사냥꾼이 되어 볼까요?”
* * *
MIT(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는 공돌이들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세계 최고의 공대다. 전 세계 공학도들의 최종 목표이자 메카로 불리는 성지.
그냥 웬 할아버지가 허름한 점퍼를 입고 교정을 지나고 있으면 백 퍼센트 노벨상을 수상한 교수거나, 은빛으로 반짝이는 타원형의 돔 건물을 아름답다고 하던 사람이 원자로라는 것을 알고 뒤집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괴짜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원자로 돔 위에 경찰차를 올려놓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학교 측은 별반 문제 삼지 않는다. 그냥 치운다.
그러면 다음에는 소방차를 올리고, 또 학교는 치운다.
겨우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하버드에 침입, 설립자 동상에 광대 분장을 시킨다던가 콘돔을 씌우는 일이 예사였다.
그런 괴짜들이 판치는 MIT.
어윈 제콥스는 오늘도 강의가 끝나기 전에 먼저 책을 챙겼다. 다른 이들과 말을 섞기 싫었기 때문이다.
어윈 제콥스에게는 치명적인 병이 있었다. 그렇다고 죽거나 다른 이에게 전염을 시키는 병은 아니었다.
결벽증.
무엇이든 제 자리에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티끌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극강의 결벽증, 너무 도가 지나친 것이 문제였다.
우연히 다른 사람과 스쳐도 그 옷을 즉시 빨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악수라도 하고 나면, 하루 종일 손을 씻고 또 씻는다. 손가죽이 벗겨질 만큼 박박.
그런 어윈 제콥스의 결벽증은 이미 학교내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접근하는 이도 없건만 점차 동떨어진 아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먼저 나선 것이다. 이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불편할까 봐 알아서 선택한 자기 방어인 셈이다.
그러나, 어윈에게도 친구가 있었으니…….
유유상종이라고 똑같은 놈들이 모인 것이다.
결벽 삼총사라고 불리는 어윈과, 스테판, 폰티악. 이들은 절대 서로 악수를 하지 않는다. 신체 접촉 자체를 금기시하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룰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창고를 빌려 연구실을 만들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세 개의 개인 화장실 개축. 유별난 놈들이다.
이 세 명의 결벽증 괴짜들은 교정 한곳에서 만나 각기 자전거를 타고 창고로 향했다. 한 명은 좌측 인도, 또 한 명은 우측 인도, 마지막 한 명은 중앙 분리대로.
완전 우주인 같은 괴상한 놈들.
예상대로 창고에 마련한 연구실은 먼지 한 톨 없다. 외부에서 볼 때 창고지만 내부는 어느 집 주방보다 더 깨끗하고 정갈했다.
창고 입구에는 컬컴(QUALCOMM)이라 새긴 도자기 명판이 작게 붙어 있었다. 그 밑의 경고문도 함께.
- 누구든 삼 단계 소독을 하지 않은 자는 들어오지 마시오. 죽일지도 모름.
찌릉 찌릉-
“야, 스테판! 나가 봐.”
“싫다. 이번에는 어윈 네 차례야.”
“야, 폰티악 네가 나가.”
“싫다. 네 차례야. 어윈 제콥스.”
“내가 사장이다. 명심해.”
“조까!”
“전에 준 사표 아직 유효하다. 짤라 주라.”
늘상 이런 식이었다.
MIT의 결벽증 삼총사가 모여 만든 컬컴이라는 회사의 일상적인 풍경이기도 했었다.
찌릉 찌릉-
예정에 없던 초인종 소리. 어윈 제콥스는 이런 방문이 정말 싫었다. 겨우 수업을 마치고 자기들만의 연구에 몰두하는 소중한 시간인데…….
“누구쇼?”
“천사!”
이런 젠장할… 도대체 누구냐?
빼꼼 창고 문을 열고 내다본 제콥스의 눈과 동양인의 눈이 마주쳤다.
일단 큰 키에 호감가는 얼굴. 씨익 웃더니 피자를 들어 보이는 동양인.
“소독은?”
“했지. 세 번.”
“지랄! 지금껏 세 번을 한 사람은 없었어.”
“한 번은 물로, 두 번째는 입구에 있는 알코올로, 세 번째는 내 손수건으로 닦았는데 맞는 거 아닌가?”
“음… 피자가 아니라면 거절했을 텐데, 일단 통과!”
손님이 왔는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저 각기 책상에서 자기 몫의 피자를 먹기 바빴다. 손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서. 참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시혁은 그 피자를 다 먹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여기였어. 보물 창고가.
이름 하나와 MIT 학생이라는 단서에 의지해 찾아온 길. 덕분에 사립 탐정에게 2,000달러를 줘야 했지만 아깝지 않았다. 백 배, 천 배를 준들.
이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미래에 얼마만큼 엄청난 반향을 불러올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도 모를 것이다. 일 년에 순수 로열티로만 수백억 달러를 받게 된다는 것도.
그런데, 이 새끼들… 다 처먹고 또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는다. 시혁은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진짜 피자 세 판을 사오지 않았으면 들여보내지도 않았을 인간들이다.
멀뚱멀뚱 기다리던 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얘, 뭐냐? 왜 여기서 처 자고 있는 거야?”
“신기한 놈이네. 우리보다 깔끔한데? 수염도 없어.”
“정장 봐. 아르마니 같은데? 구두는 벨루티, X나 돈 많은 자식이다.”
말들이 많아지자 제콥스가 시혁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들고 있던 볼펜으로.
“아이고, 잘 잤다. 다들 안녕?”
“…….”
“이제 피자 값을 받아 볼까? 다 먹었네?”
“…우리가 시킨 거 아닌데?”
“왜 먹어? 너희 것도 아닌데.”
“…….”
“세상에 꽁짜가 어딨냐?”
“X발… 원하는 게 뭔데?”
그제서야 제콥스가 시혁을 향해 거칠게 내 뱉었다.
“그쪽이 어윈 제콥스? 그리고 스테판과 폰티악… 맞아? 내 피자값 치를 사람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얼만데?”
“오백만 불!”
“개소리 하지 말고 본심을 털어 놔. 여기 온 이유가 뭐야?”
“빨리도 물어본다. 나는 마이다스 킴이야. 아까 말한 대로 천사.”
“너… 미쳤구나.”
“아니, 엔젤 투자자… 지금은 없는 용어겠다만 벤처 투자자라고 할까? 오백만 달러짜리란 말이다. 그 피자.”
소파에도 흰 천을 씌워 두었다. 책상도, 의자도, 모든 것이 흰색 일색이다.
시혁이 하얀 테이블에 내려놓은 수표를 보고 세 명은 얼이 빠져 있었다. BOA(Bank of America) 맨해턴 지점 직인이 선명하고 이상한 기호(한글)로 적힌 사인도 있지만, 진짜인지 의심하는 눈초리다.
“이거 진짜?”
“잔고는 있고?”
“나는 만 달러 수표까지는 본 적이 있는데, 이건 꼭 애들이 가지고 노는 가짜 같아.”
그러겠지. 지금 오백만 달러면 정말 어마무시한 돈이다. 이들이 빌린 창고 일 년 임대료가 1,200달러다. 아마 본채를 통째로 산다 해도 오만 달러면 떡을 치고 남을 것이다. 그런데 500만 달러? 이런 집 백 채는 살 돈이다.
“적어?”
“…이거 뭡니까?”
말투가 공손하게 바뀌었다. 너무 놀란 탓이다.
“컬컴을 넘겨. 딱 51%만 내가 가지고 싶어. 대신 나는 경영권에 간섭하지 안 한다. 내 지분에 대해서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명문화해도 좋아.”
“우리 회사? 아직 아무것도 결과물이 없는데?”
“너희들 차세대 디지털 무선 통신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그 기술이 갖고 싶은 거야.”
“CDMA(코드분할 다중 접속)는 이론만 정립된 거야. 언제 개발이 완료될지, 언제 이 기술을 이용한 세상이 올지 아무도 장담 못 해…….”
“이봐! 어윈 제콥스, 스테판, 폰티악. 나는 이 돈으로 기술만 사는 것이 아냐. 너희들을 통째로 먹는 거지. 자신을 가져. 너희는 천재야.”
“우리가 통째로 팔리는 노예 계약?”
“응. 너희들은 내 노예가 되는 거지. 하하하.”
통쾌하게 웃는 시혁과 수표를 연신 바라보는 세 사람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었다. 돈이 없어서 못 사는 부품들, 장비들, 특히 관련 분야의 기술자들… 맘대로 해 볼 수 있는 돈이다.
“이 돈으로 좋은 건물을 얻고, 차도 좋은 것으로 사도 돼?”
“X신아! 투자금으로 그런 짓 하면 바로 쇠고랑 차게 되는 거 몰라?”
폰티악의 옹알거림에 제콥스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아냐, 제콥스. 너희들 마음대로 써도 돼. 나는 일체 상관하지 않을 거니까. 그걸로 콜걸을 사든, 부모님께 좋은 픽업 트럭을 사 주든, 매일 밤 파티를 즐기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
“……!”
“너희는 천상 공돌이야. 곧 시들시들해질걸? 결국 세 번씩 소독하고, 다시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게 될 거야. 흐흐흐흐.”
“좋긴 한데 왜 이렇게 으스스하지?”
“나도, 킴. 네 잘생긴 얼굴이 악마 같다.”
“나는 할래. 거절하기엔 너무, 너무 큰돈이야.”
시혁은 조용히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너희 셋은 내 노예다. 반가워. 지옥으로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제콥스와 스테판, 폰티악은 엉겁결에 손을 맞잡았다. 일순간 결벽증에서 탈출했다.
‘보물 창고 하나는 접수했다. 배불러 터질 것 같다.’
시혁은 벅차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웃고 있었다.
왕건이 노예들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