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뜻밖의 조우
두 번째 보물 창고도 쓸어 담았다. 점점 더 배가 불러 이젠 터질 것 같다.
그런데, 이걸로 부족하다. 돈도 아직 많이 남았다.
전에 손창의에게 당부한 말이 있었다.
- 투자는 30% 미만일때 해야 합니다. 80% 완성된 후에 들어가면 쭉정이밖에 못 먹어요. 여왕벌이 똬리를 트는 것만 확인되면 일벌의 존재유무와 관계없이 투자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그래야 꿀을 빨 수 있습니다.
지금 시혁의 행동 양상은 맞는 것일 수도 있고, 그와 반대되는 상황일 수도 있었다. 시혁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시혁이 지금 주워담은 기업은 막 출범한 컬컴과, 심각한 경영 위기에 빠진 엔바디아. 두 곳은 성격이 완전 다르다.
컬컴은 아직 아무런 기술적 자립이 안 된 그야말로 기초 단계에서 먹었다. 손창의에게 했던 30%가 아니라 10%에서 들어간 셈이다.
다음으로 엔바디아는 기술적 완성을 한 최종 단계에서 먹었다. 80%가 아니라 90%에 들어간 셈이다.
왜?
시혁이 먼저 가로채지 않았다면… 천사의 탈을 쓴 그 사람이 투자를 하게 된다. 그래서 급히 JP모건과 엘리엇의 채권을 매입한 뒤 경영 정상화를 위한 자금까지 수혈해 준 것이다.
아직 역사의 평가가 끝나지 않은 그 사람보다 한발 더 빨리.
언젠가 만나겠지. 미안하지만 몇 개는 내가 먹을게요. 나한테 꼭 필요한 기업이고 기술이거든요. 한시도 잊지 않고 있는 대적, 삼송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이고 발톱과 발목과 허벅지까지 삼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가만있자. 다음이 어디더라. 이번에는 찾기 쉽지 않나 보네.’
시혁은 삼송의 애증어린 휴대폰 SH- 1000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미스터 윌슨.”
[예, 마이더스 킴.]
“시간이 많이 걸리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몇 가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시 계신 곳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네, 여기 워싱턴, 너무 좋군요. 시간이 남아서 국회의사당과 백악관 관광 중입니다. 언제든 오세요.”
무슨 일이지?
시혁이 고용한 사립 탐정 윌슨(진짜 이름인지 알 수 없다)은 지금껏 상당히 탁월한 능력을 보여 줬었다.
단순히 사람 이름 하나 가지고 특정인을 추적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윌슨은 그 사람이 어디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와 관련된 주변의 세세한 상황을 파악한 뒤 꽤 디테일한 파일을 보내왔다.
이번 엔바디아 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윌슨의 심층 조사가 없었다면 JP모건과 엘리엇을 먼저 공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신중한 사람이 직접 보겠다?
뭔가 다른 일이 있다는 의미다. 전화로 그런 일을 시시콜콜히 주고받을 수 없지. 기다리자. 윌슨이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저녁 늦어야 한다.
윌슨이 있는 뉴욕에서 이곳 워싱턴DC로 오려면 차를 이용하거나 비행기를 타는 방법이 있지만, 아마 비행기를 탈 것이다. 겨우 360킬로미터에 불과한 95번 고속도로의 정체는 악명이 높다. 결국 공항으로 이동, 보딩, 비행, 다시 도착해 호텔까지 오려면 저녁이 될 것이다.
시혁은 천천히 백악관 담장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온 길이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유유자적한 관광객 모드였다.
세계 유일 초거대 국가 미국의 수도치고는 한산한 곳이 워싱턴 DC다. 인구도 겨우 70만 언저리. 그러나 도심권을 다 합하면 600만 명의 유동인구를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세계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연방 대법원과 주요 관청이 있고, 170개국 이상의 대사관과 국제 기구가 다 몰려 있는 국제 정치와 외교의 최전선이 워싱턴 DC.
조금 밋밋한 도시로 보이는 이유는 낮은 스카이라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 건너 알링턴이 고층 건물로 빽빽한데 반해 워싱턴은 고층 건물이 없다. 국회를 존중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워싱턴 기념탑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고도 제한을 걸어 둔 탓이다.
시혁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스미소니언 박물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코너 변에 작은 핫도그를 파는 차량이 눈에 띄었기에 별생각 없이 하나 사서 근처 벤치에 앉았다.
솔직히 예술은 꽝이다. 어떤 책이든 한 번 보면 사진을 찍듯 기억할 수 있지만, 예술은 영감의 분야다.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선지 박물관에서 방랑자처럼 보이는 것도 우스워 핫도그만 먹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시혁의 곁으로 누군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힐끔 보곤 관심을 접은 채 핫도그를 입에 넣었다. 맛있네. 역시 본토에서 먹는 핫도그는 별다를 게 없어도 맛있다.
“맛있나?”
갑자기 훅 들어오는 소리. 옆에 앉은 노인의 심심파적 관심에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네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시혁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어 버렸다.
“응? 나를 아네?”
“…….”
“그 핫도그 말일세. 내가 워싱턴에 오면 일부러 찾아와 먹는 맛집이야. 비록 작은 차에서 대충 만들지만 맛있어. 오래됐거든.”
“안녕하십니까?”
“응, 어서 먹게. 마저 먹고 나면 잠시 얘기 좀 했으면 싶은데… 괜찮지?”
“그러시죠. 노인장도 마저 드세요. 맛있네요.”
“그냥 이름 부르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글쎄요. 오늘 처음 뵙습니다만…….”
“이름은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눈동자는 못 속이는 법이거든.”
솔직히 많이 놀랐다.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당신과 마주치는 시점은 먼 훗날로 생각했는데.
“이번에 짭짤하게 장사를 했던데, 아직 밑천이 남았나?”
“예, 이 핫도그, 맛있기는 한데 양이 너무 적네요. 배가 안 찹니다.”
“허허허, 더 먹겠다?”
“어쩌겠습니까? 배가 안 차는데.”
“항상 과식하면 배탈이 나는 법이야. 적당히 먹었을 때, 그러니까 절반쯤 배가 찼을 때 멈춰야 소화도 잘되거든.”
“에이… 저는 젊잖습니까? 돌도 씹어 먹을 나인데요.”
“…….”
두 사람은 한동안 핫도그를 먹는데 집중했다. 간은 충분히 봤다. 하고 싶은 말도 함축적으로 다 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상대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궁금했지. 내가 찍은 회사를 누가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채갔더라니까. 이거 참. 잠을 잘 수 없었어. 거의 일 년 이상 공을 들였는데 말일세.”
“핫도그 맛있네요. 소화 걱정 없으니 하나 더 먹겠습니다. 노인장도 드시겠습니까?”
“허허허. 패기무쌍일세. 젊음이 좋기는 좋아. 내가 그런 젊음을 살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다 줄 텐데… 아쉽네.”
“우리나라 말 중에 미망(迷妄)이라는 게 있습니다. 뭐라 해석을 해야 할까요… 길게 풀자면,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다. 이런 뜻인데요.”
“내가 치매라도 왔다는 말인가?”
“최소한 위험 신호를 인지하지 못하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오마하의 현자, 워런 바핏 회장님.”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는군. 반갑네. 마이다스 킴.”
드디어 만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자로 불리는 워런 바핏을.
‘당신은 진정 현자입니까? 아니면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까?’
* * *
“여기 어떤가?”
“좋습니다. 티라미수 케잌 달달하네요.”
“응, 당 떨어졌을 때 최고지.”
“바핏 회장님, 저를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허허허, 우리 둘 다 가장 자신있는 게 뭔가? 돈이면 유령도 부릴 수 있지.”
감추지 않는다. 아직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시혁은 시작하는 입장이고, 워런 바핏은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래… 다음 목표는 어딘가?”
“글쎄요. 내 카드를 보여 줄 만큼 우리가 친밀한 관계였던가요?”
“킴, 자네는 물건을 고르는 기막힌 눈을 가졌어. 하지만 말이야.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어둡군.”
“그런가요?”
“조세 회피처 버진 아일랜드에 설립한 K 미르 컴퍼니의 주인, 미국 입성 첫 작품으로 엔바디아를 선택한 것은 절묘한 수였네. 이건 진짜 놀랐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으면 감히 못 할 배팅이거든.”
“감사합니다.”
“월가 놈들은 절대 이런 식의 인수합병을 못 해.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면 자리가 없어져 버리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지.”
“그래서 더 화가 난다?”
“그렇네. 월가 놈들에게 뺏겼다면 걱정하지 않아. 적당히 눈 돌아갈 돈을 얹어주면 바로 팔게 되어 있거든… 그런데 자네는 손아귀에 움켜쥔 보석을 절대 내놓지 않을 거 아닌가? 그래서 화가 난다는 거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욕이야, 그거.”
“영광입니다.”
“허허허, 진짜 포기해야 겠구먼. 도통 흔들리지 않아. 대단해.”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든다. 어지간히 아까웠나 보다.
“이제 제가 회장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
“예, 회장님은 저평가된 회사나 주식을 장기 보유하는 투자자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내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니까.”
“또 IT 업체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이것도 맞습니까?”
“음… 그건 케바케일세. 인터넷 세상이 너무 빨리 도래하고 있거든. 다만, 내가 부정적인 IT 기업들 대다수는 매출도 없고 허상만 쫒는 놈들이지.”
“그런데 엔바디아는 왜 욕심을 내십니까? 매출도 없고, 아직 허상만 쫒는 기업 아닌가요?”
“……!”
“이미 거래가 끝난 마당에 깨끗이 포기하지 못하고 저의 뒷조사까지 하면서 찾아와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놈… 서서히 얼굴에 냉기를 띄우고 시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지껏 유지하고 있던 온화한 할아버지의 껍질이 단숨에 벗겨졌다. 철가면 뒤에 숨은 워런 바핏의 본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거친 쇠긁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카콜라도, 맥도날드도 따라갈 수 없는 보물을 네놈이 가로챘기 때문이다. 나는 엔바디아의 숨통을 일 년간 끊임없이 조였다. 엔바디아의 건물도 내가 샀지. 그렇게 공을 들인 물건을 난데없이, 네놈이, 가로챘어. 그건 도둑질… 이라 생각한다.”
바로 봤구나. 엔바디아가 얼마나 무섭게 성장하고 수만 배의 수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동물적으로 감지한 것이었다.
“당신은 위대한 투자자입니다. 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투자자가 훌륭한 사람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당신의 행위는 시쳇말로 양아치나 다름없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투자자의 덕목일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악마예요.”
“말을 가리는 게 좋을 거야. 애송이.”
“아뇨, 당신을 만나기 전에 늘 궁금했어요. 이제 의문이 해소되었습니다. 당신과 나는 비슷한 길을 가지만… 우리는 동지가 아닙니다. 워런 바핏 회장.”
“허허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그런데 다들 지금 뭐 하는지 아나?”
“굳이 알아야 합니까?”
“나도 궁금해. 그들이 뭐하고 사는지. 하나같이 패가망신했거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혁은 웨이터를 불러 계산서를 요청했다. 그리고 계산서 위에 자기가 먹은 커피와 티라미수 케이크값을 정확히 올려놓았다.
동전의 짤랑거리는 소리가 이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 위에 100달러 지폐 한 장을 더 놓으며.
“이건 팁입니다. 나머지는 회장님이 계산하시죠. 타임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러셨더군요. 100달러 팁을 거침없이 주는 멍청이는 돈을 벌 자격이 없다고.”
“…….”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습니다. 회장님. 이 멍청이가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봐 주십시오.”
“오늘 잘못 왔군.”
“네, 차라리 구름 속에 그냥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저도 안타깝습니다. 이 순간부터 회장님은 저의 적입니다.”
“건강하시게.”
“예, 회장님도 행운을 빕니다.”
시혁은 미련없이 레스토랑을 나왔다.
미망(迷妄)에 빠진 자다. 돈으로 황금산을 쌓겠지만, 당신은 현자가 아니다.
‘워런 바핏… 당신은 악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