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결국 너였구나?
“고객님, 아니 저… 회장님. 너무 당황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이제 50분 남았습니다.”
일 년에 한 대만 팔아도 쾌재를 부르는 차다. 자그마치 45만 달러짜리, 부자 중의 부자, 슈퍼 리치, 그것도 나이 지긋한 대기업 회장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내는 세단의 끝판왕.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국 본사의 6개월 심사를 통과해야 판매 허가가 나오는 차였다. 직업, 나이, 보유 자산, 사회적 명망을 다 살핀 후에야 ‘당신은 이 차를 탈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낙점을 받는 명예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딜러가 너무 땀을 흘리니까 같이 뛰어온 지배인이 나섰다.
“아마 지금껏 고객님처럼 젊은 나이에, 그것도 외국인이 롤스로이스 실버스퍼를 구매하신 적이 없어서 실례를 했습니다. 차는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먼저 임시 번호판으로 운행을 하시고, 서류 절차를 밟도록 하면 어떠십니까?”
“차 값이 45만 달러죠? 완전한 번호판까지 달리면 10만 달러 더 드리죠. 이제 48분 남았습니다.”
“……!”
“참! 벤츠 300SEL도 같이 사겠습니다. 윌슨 잭 다니엘이라는 분이 오면 내주세요. 내가 출발하면 바로 올 겁니다.”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자국에서 생산된 캐딜락을 선호한다. 벤츠나 BMW보다 GM의 캐딜락을 타야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롤스로이스는 그 생각조차 부숴 버리는 구름 위의 존재였고 유일하게 지금 시점에 방탄 유리를 가진 차였다. 돈이 있다고 쉽게 탈 수 없는 차라는 명예는 덤이다.
시혁이 굳이 롤스로이스를 사는 이유는.
이제 숨지 않기로 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이미 적들에게 노출된 이상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그런 용도에 딱이다. 너무 엄청나서 엄두가 나지 않도록 기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이건 마치 할 테면 해봐, 내가 김시혁이다… 를 외치는 것과 같았다.
결국 제한시간 종료 5분 전에 시혁은 차 키를 넘겨 받았다.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상대가 생각한 이상을 질러 버리면 초인적인 방법이 나오기 마련이다.
시혁은 유유히 롤스로이스 실버스퍼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95번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후아! 역시 예상이 맞았네.”
“제이슨, 좀 쎄다. 롤스로이스라니. 제길, 우리 포드가 너무 초라하잖아?”
“닥쳐, 콜리. 어차피 총 맞으면 뒈지긴 마찬가지야.”
“그런데… 저 차, 방탄 아냐? 쏴 봐야 헛지랄이야.”
“……기회를 보자. 저놈도 화장실은 가겠지.”
시혁은 자신의 뒤를 밟는 차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 여유롭게 차를 몰았다. 초저녁의 고속도로는 아직 정체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탓에 속력을 낼 수도 없었다.
뉴욕에서 워싱턴DC까지 겨우 360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95번 고속도로의 정체는 악명이 높을 정도로 트래픽이 걸리는 곳이었다.
세 시간 걸려 굼벵이처럼 막히는 정체구간을 지나자 시혁의 차는 리치몬드 시의 경계에 있는 휴게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됐다. 여기서 해치운다.”
“제이슨, 무조건 강도로 위장을 해야 한다며?”
“휴게소 화장실에서 갈기는 거야. 너는 심장에 대고 두 발을 쏴. 내가 마무리로 대가리에 한 방 먹여 줄 테니… 그리고 지갑만 챙겨서 나오면 끝난단 말이다. 이 떠버리 콜리 새끼야.”
“사람들이 많을 텐데?”
“방법이 없어. 앞으로는 정체되는 곳도 없어. 워싱턴DC로 들어가 버리면 정말 쉽지 않아.”
“지갑은 분명히 나 준다고 한 거 분명하지? 롤스로이스를 탈 정도면 엄청 빵빵할 거야.”
“알았으니까, 내가 준 총이나 잘 챙겨. 총기 번호를 다 지운 이유는 현장에 던져 놓으라는 뜻이야. 명심해.”
- 떠버리 콜리, 네가 그 지갑 안의 돈 쓸 시간은 없을 거다. 흐흐흐.
할렘에서 살인 의뢰를 받은 제이슨은 아무래도 찝찝했다. 그냥 애송이 한 명을 죽이는데 오만 달러면 달려들 히트맨이 널렸었다. 물론 위장 술집 레이블 바의 중개인을 통해 오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과한 금액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의뢰인에게 사람을 붙여 확인한 결과 예상했던 대로… 엉뚱한 놈들이었다.
그래서 한 명 더 끌어들였다. 속칭 떠버리 콜리라는 놈을.
이놈은 의뢰금이 얼마인지 모른다. 오만 달러를 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생각없이 따라온 놈이다. 놈과는 같이 용병생활을 했던 전우였지만, 술에 빠져 손을 떠는 콜리를 안타깝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 이렇게라도 써먹고 버리면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에 잠긴 잠깐 사이 제이슨 생각대로 휴게실 본채 옆에 따로 지어진 화장실 가까운 곳으로 롤스로이스가 주차했다.
급히 제이슨도 롤스로이스 바로 옆에 차를 세웠다. 이제 정말 순식간에 해치우고 모습을 감춰야 한다.
시혁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제이슨과 콜리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열까지 센 다음 따라 들어갔다.
입구에서 좌측이 여자 화장실,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남자 화장실이다.
그러나 화장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변기는 텅 비어 있었다. 타깃은 일곱 칸으로 나누어진 변기 중 한군데에 앉아 있을 것이다.
무작정 칸마다 총을 난사할 수는 없다. 강도라면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 거기다 만약 여러 사람이 죽는다면 경찰도 심도 있게 수사할 것이 분명하다.
- 이봐, 제이슨. 어떻게 하지?
- 쉿!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조용히 하고 소변기에 붙어 오줌 누는 척해.
- 제기랄, 꼬이네.
- 제발, 조용히 하라고. 이 떠버리 새끼야.
어쩔 수 없는 상황, 제이슨과 콜리는 총을 쥔 그대로 소변기에 붙었지만 귀는 활짝 열어 두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지자 둘의 몸은 소변기에 한 발 더 붙어 섰다.
뚜벅 뚜벅 뚜벅 –
잔뜩 긴장한 두 사람은 뒤에 들어온 사람이 얼른 소변을 보고 나가기를 바랬다. 이 순간 타깃이 문을 열고 나온다면 둘 다 죽여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콰창-
옆에 서 있던 콜리의 몸이 소변기 사이 칸막이를 부수며 종이처럼 구겨져 튕겨 나갔다. 제이슨은 지체없이 몸을 돌렸다. 누구든 바로 방아쇠를 당길 심산이었다.
이 사내도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본능적인 행동. 수없이 단련되고 훈련되지 않으면 결코 발휘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퍽-
제이슨의 눈에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의 모습이 퍼뜩 보였다. 웃고 있어?
생각과 달리 제이슨은 베레타를 당기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그 순간에도 사내의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개X끼!
“끝났습니까?”
“예, 보스.”
화장실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 낸 시혁에게 유난히 긴 총신의 서플러스 권총을 들고 있는 윌슨이 짧게 대답했다.
시혁은 애초에 좌측의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있었고, 윌슨이놈들의 뒤를 노린 것이었다.
윌슨은 시혁이 롤스로이스를 몰고 떠나자 마자 전시장에 들어와 벤츠 키를 받아 들고 뒤를 밟았었다. 결국 히트맨은 앞 뒤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못하고 당한 셈이다.
“보스, 이놈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단련된 놈입니다.”
“…일단 차에 싣죠. 리치몬드 시 외곽에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있겠죠. 아침이 되려면 시간 많아요.”
* * *
“눈 떠. 연극 그만하고.”
“…….”
“우선 네 왼쪽 무릎에 한 방 쏴 주마. 그래도 눈을 감고 있으면 인정하지.”
“너… 누구냐? 동종업계 놈이냐?”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돼? 질문은 내가, 너는 대답하고… 오케이?”
바로 눈을 뜨는 제이슨을 향해 윌슨은 빙긋 웃어 주었다. 제이슨도 그제서야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거구가 이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옆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 타깃의 모습… 빌어먹을, 되레 함정에 빠졌구나.
고개를 돌려보니 손과 발이 케이블 타이로 묶인 떠버리 콜리가 뒹굴고 있었고, 주변은 울창한 나무로 가득하다. 두 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교차한 채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이름?”
“스미스.”
“소속은?”
“그딴 거 없어. 그냥 죽여.”
“그래?”
거구의 사내가 구두 코를 세워 사정없이 걷어 차자 기침을 콜록거리며 콜리도 정신을 차리는 모양이다. 콜리의 입에는 아직 청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찌익-
거구는 더 몸을 웅크리는 콜리에게 몸을 숙이더니 청테이프를 떼어 냈다.
“보아하니 네가 졸개 같은데, 옆에 놈 이름이 뭐야?”
“나, 나. 나는 아무것도 몰라.”
“흐흐흐, X신아. 너는 버리는 패야. 네 총에는 총알도 없었어.”
“……!”
“아마 보스를 쏘고 너도 죽였겠지. 그 총을 보스 손에 쥐어 주고 말이야. 경찰은 강도와 보스가 서로 총질하다가 다 죽은 것으로 결론을 낼 거고.”
“…이 개자식, 제이슨. 나를 더미로 삼았구나.”
“오! 제이슨? 멋진 이름인데?”
떠버리 콜리가 억눌린 이 사이로 이름을 부르자 제이슨은 한숨이 나왔다.
“입 닥쳐, X신아. 어차피 우릴 살려줄 놈이 아냐. 우리보다 더 피 냄새 자욱한 프로야. 곱게 죽자.”
웃고 있는데.
여전히 웃고 있는데.
한쪽 입술만 올라간 윌슨의 모습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나 혼자라면 전후사정 생각하지 않고 죽였겠지. 맞아… 너희들 오늘 운이 좋아. 보스가 계시는 자리다. 도살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
“의뢰인이 누군지 털어 놔, X신이 되더라도 일단 살아야지.”
“조까, 너도 같은 부류라는 걸 모를 바보로 보여? 말해도 죽고, 입 다물어도 죽을 바에야 그냥 가련다. 크크크큭.”
총구로 머리를 긁적이던 윌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콜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X신아, 그놈은 내가 고용한 거야. 네 말대로 쓰고 버리려고. 아무것도 몰라.”
그러나 의외의 답이 떠버리 콜리에게서 튀어나왔다.
“더러운 새끼, 전우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쳐?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레이블 바의 중개인이 내 사촌이란 거 잊었냐? 다 들었어, 개자식아.”
“……!”
“믿지 못하겠지만 살려 주시오. 그러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시혁이 피우던 담배를 비비며 나섰다.
“내가 약속하지. 그 대신 거짓말로 대충 무마하려고 수작을 부린다면… 곱게 죽이지 않을 거야.”
저 거구가 보스라고 불렀다. 귀티가 나는 젊은 동양인의 무표정한 얼굴. 믿고 싶다.
“저 개자식이 의뢰인에게 사람을 붙였습니다. 차량 한 대와 오토바이 두 대가 미행한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합니다. 그 일을 맡아 한 놈은 제 사촌이고요.”
“짧게, 핵심만.”
“예, 한국 업체 삼송전자 건물로 들어 갔습니다. 더 이상은 접근할 수 없어서 알아내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하아… 또 너희냐?’
이번엔 제이슨을 향해 쏘아붙였다.
“당신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테지. 당신도 살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 봐.”
“…한국 명 시혁 킴, 21세,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룸 1955호실, 강도로 위장해서 제거… 이게 내가 받은 의뢰의 전부요.”
“그건 다 아는 사실이고.”
“의뢰인은 자기를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믿기 힘들었지. 그래서 사람을 붙인 거고. 안타깝게 나도 떠버리가 말한 이상의 정보가 없소.”
“그럼, 당신은 살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네?”
“잠깐! 의뢰인에게서 여자 향수 냄새, 그러니까… 쟈스민 향이 진하게 났습니다. 그건 분명히 샤넬 넘버 5 였소.”
황당하다고 생각했는지 윌슨이 거칠게 되물었다.
“어떻게 확신하지?”
“제 애인도 그걸 쓰니까.”
“그런 막연한 거짓 정보를 믿으라고?”
“윌슨, 그만 하세요.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결국 너였구나. 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