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56화 (56/150)

56화 백악관의 검은 머리 실세

1988년, 흔히 쌍팔년도라고 부르던 역동의 한 해.

제6공화국 헌법이 시작되었고, 한국의 정치제도가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씨앗을 태동한 시기였었다.

전도환 전 대통령은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조직을 만들어 의장으로 상왕 노릇을 하려고 했지만, 노태후의 5공 색깔 지우기에 허덕거렸다.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으로 권세를 누리던 형을 비롯해 5공 비리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구속을 면치 못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문회가 열렸으며 이는 생중계되었다.

재벌총수, 언론인, 징치가들이 증인석에 앉아 의원들의 질타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심복 중의 심복 장사동이 구속되자 결국 전도환은 모든 직에서 사임하고 골목 성명을 발표한 뒤 자진해서 백담사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무소불위의 힘을 떨치던 대통령.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의 주역.

국민을 지키라고 쥐어 준 총으로 국민을 사살한 살인마.

무려 8년간 집권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전도환이 부인과 함께 눈 덮인 백담사 경내를 구부정하게 거니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권력무상이라…….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시혁은 백악관에서 TV를 통해 이를 지켜보았다.

부시 대통령 당선자의 인수위원회에 유일하게 참여한 외국인으로 차기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에 내정된 사람.

대통령 부자와 격의 없이 햄버거를 먹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실세.

부시의 핸드폰 2번에 저장된 전화번호 소유자.

이게 시혁에게 붙은 수식어고, 실제 그러했다. 부시는 여전히 시혁을 놓아주지 않았다. 차기 정부를 인수받는 인수위원회 정책 고문이라는 직책은 무겁고 뜨거웠다.

특별한 부처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 전반을 아우르는 직책. 실로 역사상 유래가 없는 자리를 맡은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폐기되었다.

“이건 조금 더 깊이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이러면 바로 보류.

“대단히 중요합니다. 좀 더 인원을 투입해서 조직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부서는 바로 차기 정부의 핵심 부서가 되는 판이다.

겨우 21살의 어린 동양인이 백악관을 쥐고 흔드는 이상한 형국에 누구도 이견을 말할 수 없었다. 그의 결정은 곧바로 부시 당선자의 결재가 났으니까.

또한 시혁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즉시 증명이 되곤 했다. 업무의 효율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쯤 되면 거의 비서실장 이상인 셈이다.

정권이 가장 힘이 쎌 때가 언제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당선자가 다음 정권을 인수하는 인수위원회 시기이다.

비록 아직 레이건 대통령이 있지만, 저무는 석양은 떠오르는 태양과 비교할 수 없거든.

그런 인수위원회 핵심 중의 핵심으로 시혁이 부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 고문님.”

“네. 미스 멀린.”

“며칠 전부터 면담 요청을 넣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를요? 인수위 각 부서 팀장이 있잖습니까?”

“그게, 고문님 개인 면담 건입니다.”

“…누굽니까?”

“한국의 현도 그룹에서 오셨답니다. 체어맨 정이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시혁은 벌떡 일어나 뛰었다.

할아버지가 왔구나. 만사 제쳐 두고 만나야지. 막 꿈을 펼치기 시작하던 당시 가장 먼저 정으로, 사업적 이익이 아니라 사람 냄새 풀풀 풍기며 다가와 준 정조영 회장이라면…….

“할아버지!”

“아이고, 허리야. 이 빌어먹을 놈아.”

“죄송합니다. 이제 겨우 전달받았어요.”

“그래그래. 욕본다. 큰일하는 너에게 미안해서 나도 기다린 거다. 괜찮아.”

근데, 대기실에 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대뜸 폴짝 뛰어오르는 잉어 같은 아이.

“오빠! 미워.”

“으, 응. 예지 왔구나. 시험은 잘 봤어?”

“그까이꺼… 식은 죽 먹기쥐이. 만점은 못 받아도 오빠 후배 되는 건 문제없어.”

계속 방방 뛰는 노예지 뒤로 멀뚱하게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정성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지의 발랄한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또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처음 보지만 너무 유명한 얼굴들이니까.

이 정도 대군이면 여기서 잠시 만날 수 없는 노릇이다.

“할아버지, 숙소 어디 잡으셨어요?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업무를 여기까지 하겠다는 시혁의 말에 여비서 멀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문님, 잠시 뒤에 당선자와 미팅이 있습니다만…….”

“아! 맞다.”

그리고 바로 대기실의 전화 스피커 폰을 눌렀다.

“프레지던트, 킴입니다.”

[응, 조금 있으면 볼 텐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네. 죄송하지만 한국에서 할아버지 일행이 오셨습니다. 미팅은 내일로 미루면 어떨까요?”

[그러게. 자네 개인적인 안정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지. 좋은 시간 보내게. 꼭 SS 요원들 경호를 받도록 하고.]

우와! 듣는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천하의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미팅을 미루면서 자기들을 만나겠다는 시혁도 놀랍고, 이를 쾌히 허락하면서 오히려 경호를 걱정하는 조지 부시… 놀랍다. 서로 간의 신뢰가 얼마나 굳건하길래.

“안녕하십니까? 노태후 대통령 각하의 큰 아드님과 따님이시죠? 그리고 선강그룹 아드님이시고요?”

“네. 저희를 다 알고 있을 줄 몰랐습니다. 반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노재훈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노수영입니다.”

“반갑습니다. 최태운입니다.”

“또 뵈어요. 시혁 씨.”

희한한 조합이다. 현도그룹 정조영 회장과 손녀 정성희는 그렇다 치지만, 노태후의 가족이 같이 올 줄 미처 생각 못 했었다. 곧 사위가 될 선강그룹 아들도.

“할아버지, 어떻게 이런 자리를”

“그렇게 됐다. 미국 간다니 대통령 각하께서 각별히 부탁을 하시더구나. 나도 네가 보고 싶었던 참이고. 매정한 놈아.”

“하하하. 오늘은 순대 안 사오셨어요?”

“옛끼! 뉴욕이나 LA라면 한인 타운에서 살 수 있겠지만 워싱턴에서 무슨 순대? 나중에 저녁이나 네가 좋은 곳으로 안내해라.”

“씨…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요?”

“빌어먹을 놈, 여기 미국에서는 네가 나보다 훨씬 돈 많다는 거 알고 있거든?”

“할아버지. 나 건축주라는 거 잊었어요? 내가 꼬장 부리면 삼성동 현장이 바로 서는데 말이죠.”

“끄응… 알았다. 그냥 여기서 룸서비스 시켜 먹자. 보는 눈들이 많아서 나가기도 힘들구나.”

현도는 현재 시점으로 대한민국 최고 그룹이다. 삼송과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으나 아직 현도가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곳의 왕 회장이 이토록 편하게 대한다. 하루 이틀 된 사이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오빠, 나 안 보고 싶었어?”

“속병은 다 나았다.”

“죽을래?”

“…안 변했구나.”

“그러엄! 나는 일편단심 민들레잖아.”

“쪼그만 꼬맹이가 할 말은 아니지.”

“오호호호, 내년이면 법적으로 애를 낳을 수 있는 나이거든?”

막가파, 아무도 예지를 제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큰 오빠와 언니, 그리고 미래의 형부가 같이 있음에도 예지는 거침이 없었다.

“험, 험. 예지 양, 자리가 자리인 만큼 조금 자중하시게.”

“회장님, 왜요? 나는 오빠랑 수많은 밤을 같이 보낸 사이인데요?”

미친…….

이건 빨리, 잽싸게 수습해야 한다. 저 입도 틀어막고.

“얌마! 너 대입 시험 때문에 밤새면서 공부한 거잖아?”

“그게 그거지. 뭐? 어쩌라고?”

가만 보니 천방지축 예지의 행동은 계산된 것이었다. 정조영 회장이 데리고 온 정성희가 시혁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의 촉은 순도 백 퍼센트를 자랑한다.

“예지 양, 어른들 계신데 행동거지를 좀 바르게 하면 어떨까?”

“글쵸? 나이 먹은 사람들 틈에서 시혁 오빠랑 저만 어리니까 그렇긴 해요.”

정성희의 말에 대뜸 받아 치는 예지.

나이 많아서 좋겠다는 투다. 시혁보다 세 살 많은 정성희를 향한 어퍼컷.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찌릿찌릿한 광경이 음식의 등장으로 겨우 진정되었다.

“나는 여기 앉을래.”

“시혁 씨, 이것 드세요. 전에 약속했던 울프강 스테이크는 아니지만 맛있어요.”

예지가 시혁의 왼쪽에 앉자, 냉큼 오른쪽으로 옮기는 정성희… 둘 다 만만치 않다. 이젠 눈치 같은 거 상관없다는 투다.

문제는 시혁의 행동.

그런 예지를 말리지도 않았고, 슬쩍 끼어드는 정성희를 피하지도 않는다.

이를 지켜보는 예지의 오빠와 언니는 혀를 찼다. 더불어 정조영 회장도 입맛을 다시기는 마찬가지.

저놈은 둘 다 관심이 없구나. 에구.

“참, 할아버지. 이라크는 좀 어때요?”

“네 말대로 워낙 보수적으로 공사를 받다 보니 반토막 났다. 또 내후년 전반기부터는 아예 공사를 받지 않았다.”

“잘하셨습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눈먼 돈을 다 놓친다며 건설 쪽 임원들 불만이 하늘을 찔러.”

“죽는 것보다 낫습니다.”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 맞냐?”

“지금 무슨 말씀을 드려도 믿지 못하겠지만, 90년 하반기부터는 온통 화약 냄새만 날 거예요.”

“전쟁!”

“예, 지금 달다고 마구 물을 퍼마시는 건설업체들은 단숨에 목이 졸릴 거고요. 어쩌면 몇 개의 건실한 회사들이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나?

지금 이런 말을 했다면 크게 놀랍지 않다. 맡은 자리가 보통은 아니니까 고급 정보를 취득할 길이 있겠지.

하지만, 이 말을 한국에서부터 들었던 정조영 회장은 피가 끓었다. 박수무당 뺨따귀 때리는 능력은 익히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다니…….

“시혁아, 지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세계사가 뒤집힐 일, 미국 정부도 알고 있냐?”

“아뇨, 전혀.”

“끄응.”

“저는 되도록이면 역사의 큰 줄기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틀어서 좋을 게 없거든요.”

“이놈아, 그래도 네가 지금 들리는 소문으로는 백악관의 실세라고 하는데, 부시에게는 말을 해줘야 하지 않느냐?”

“할아버지, 저는 한국인입니다. 시민권도 거절했어요. 지금 부시 당선인과는 서로 돕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왜 제가 알려야 합니까?”

“끄으응.”

“그것보다 제가 취할 것이 있습니다. 마침 할아버지가 오셨으니 잘됐네요.’

“돈 냄새?”

“예, 여기서 크게 먹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 전쟁만큼 큰 이권이 생기는 곳도 없긴 하지. 얼마나 주랴?”

“할아버지의 전 재산이 필요합니다.”

“……!”

우와! 우화! 이건 좀… 그렇다. 아무리 시혁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해도 정조영 회장은 기가 막혔다.

그냥 직진 정도가 아니라 올인을 하자고?

그때, 말 한마디 없이 듣고만 있던 선강그룹의 장남 최태운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김시혁 고문, 나도 좀 낄 수 있을까?”

“죄송하지만, 안 될 겁니다.”

“……?”

안 된다가 아니라 안 될 거라고?

“아마, 선강 그룹은 정신이 없을걸요? 두 분이 결혼을 하시면… 한국은 정치와 경제의 야합이 당연시되는 곳이니 어쩔 수 없죠.”

“무슨 말이신지?”

“한국의 부친께 물어보십시오. 선강그룹은 국내에서 쓸 돈이 더 급할 테니까.”

“……!”

“벌써 차세대 이동통신 시장에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해외로 보낼 돈이 있을까요?”

“어, 어. 어떻게 나도 모르는 일을… 말도 안 돼!”

당신 아버지가 벌써 백할머니에게 두 번이나 찾아갔었습니다. 그 혈손 박하송과 저는 동업자 관계고요.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뭐길래? 더 이상 끼어들지 말도록 입을 막는 것으로 족해.

“몇 프로나 줄래?”

“8 대 2가 적당합니다.”

“음… 네 몫이 너무 적지 않니?”

“제가 8인데요?”

“이… 썩어 문드러질 놈아. 세상에 투자자가 작게 먹는 게 어딨어?”

“할아버지, 제가 돈을 가져올 곳이 없어서 말했다고 생각하세요? 현도가 변치 않는 국내 일등 자리를 지키라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그럼요. 삼송에게도 한 방 먹이면서… 나이스 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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