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세상 만들기 시동을 걸다
그렇게 88년도가 지나고 1989년 1월 20일 조지 부시는 미합중국의 4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시혁의 기억에 의하면 부시는 재임 4년간 정말 미국을 위해 헌신했던 대통령이었다.
그가 재임 중 맞이하는 가장 큰일은 소련 연방의 해체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동유럽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진 것.
한마디로 냉전이 종식된 것이다. 대격변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세계 평화) 시대를 열었다. 순리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 패왕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국가가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고,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그 이면에는 미국 이익 우선주의, 진인하고 잔혹한 깡패짓도 서슴지 않는 야만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서.
“명심하게. 자네는 영원한 미국의 수호신임을.”
“감사합니다. 프레지던트. 그동안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우정이 살아 있는 한 저는 영원한 친구입니다.”
“응, 그래야지. 자네는 어디 가든 미합중국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 신분에 걸맞은 의전을 받을 수 있어.”
백악관 웨스트윙의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에서 부시와 시혁은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서로 좋은 동지였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를지라도 전쟁을 함께 치른 전우애는 깊고 뜨거웠다.
“자네는 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 특별해. 솔직히 자네가 없었다면 내가 이 방에 들어올 수 없었을 거야. 고맙네. 킴.”
“저도 프레지던트를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진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가?”
“저는 친구로 남길 원합니다. 친구끼리는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프레지던트.”
“…친구라. 그래. 자네는 그런 사람이지. 한 가지만 더 기억하게. 우리 부자는 언제든 자네를 위해서라면 총을 들고 같이 싸워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야.”
시혁은 조지 W. 부시와도 포옹을 나누고 백악관을 나섰다.
시혁은… 미국에 매여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 다만, 미국 대통령 정책 특별 보좌관이라는 직책은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땡큐지.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 쓸 무기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빌런이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내 맘대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30억 달러가 버진 아일랜드 K 미르 컴퍼니 계좌에 꽂혔다. K 글로벌 USA의 연말 수익 배당금과 손창의의 소프트파워 배당금을 합하면 자그마치 35억 달러. 지금 환율 700원으로 계산해도 2조 5천억 원에 가까운 엄청난 돈이다.
‘할아버지가 꼬불쳐 둔 비자금, 다 털어 냈구나.’
대단한 신뢰가 아닐 수 없다. 서로 간에 차용증이나 계약서 같은 거 쓰지도 않고 이런 돈을 던질 수 있는 현도그룹 정조영 회장, 그래서 거물인 거다.
자! 이제 홀가분하게 세상 만들기를 위한 여정을 시작해 볼까나.
* * *
“반갑습니다. 왕세자 저하.”
“아닙니다. 며칠 전 취임식 장면 감동적으로 지켜보았습니다.”
“네, 오늘 부시 대통령 특보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님에도 쾌히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할 다름입니다.”
“별말씀, 미합중국과 우리 사우디아라비아는 동맹 아니오? 특보께서는 부시 대통령과 예약없이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당연히 귀빈으로 맞아야지요. 무슨 일이든 괘념치 마시고 편하게 말하시지요.”
너 X나 쎈 거 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갖고 싶다. 원하는 거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해라… 이거네?
고맙지. 시혁이 부시를 도운 이유.
상당히 부정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짜면서까지 당선시킨 이유.
이거였으니까.
빌런이라고?
욕하려면 해라. 그렇다고 역사를 거스른 적 없다.
“원유를 조금 사고 싶습니다.”
“…의외군요. 특보께서 마음먹으면 미국 내의 비축유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 말이오.”
“지금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제가 원하는 시점에 인도 받는 조건으로 선물 거래를 요청 드리는 것입니다.”
“특보, 석유는 요물과 같아요. 우리에게는 축복의 선물이지만, 이를 사야 하는 다른 국가들에게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왕세자 저하.”
“언제 얼마나 필요 하시오?”
“내년, 1990년 10월과 11월 인도분, 그러니까 사우디 두 달 출하량 전부… 계약할 수 있는지요?”
“……!”
“잘못 들으신 거 아닙니다. 1990년 10월과 11월 두 달 출하량 전부의 선물 계약이라고 했습니다.”
“후우우! 설마 세븐시스터즈에 버금가는 정유사를 차릴 생각이시오?”
“설마요, 그럴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때 원유가 필요할 뿐입니다.”
“좋소, 가격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딜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셨습니까? 아직 놀라기는 이릅니다.
“오늘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15 달러를 오르내리고 있더군요. 요동치고 있는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계속하시오.”
“오펙(OPEC 석유 수출국 기구)이 아닌 나라들의 계속된 증산에 머리가 아프실 겁니다. 자국의 살림살이에 급급한 베네수엘라는 아예 대놓고 퍼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
“종내에는 오펙 회원국들도 증산에 동참하지 않을까요? 그럼 가격은 하향 곡선을 그릴 테고, 축복의 선물 가치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으으음.”
“더군다나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후유증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쓸데는 많은데 돈이 없으니 양껏 퍼내지 않을까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겁먹었습니다. 이제 희망 가격을 말해 보시오.”
역시 세계 석유 시장의 절대 지존,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답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배럴 당 18 달러… 어떻습니까?”
“…자신있습니까?”
“가격이 더 떨어져도 상관없이 지불하겠습니다. 저는 물량만 확보하면 됩니다.”
“도대체 이런 거래를 왜 하려고 합니까? 내가 모르는 미국의 극비 정보가 있는 건 아닌지…….”
응, 미국의 정보는 아니고, 미래 기억 창고 정보야. 미국도 아직 몰라. 그런 판에 당신에게 고백할 바보는 아니거든.
“아무리 미국이라도 자그마치 일 년 십 개월 후를 예측할 양자 컴퓨터는 없습니다. 저하.”
“예? 양자 컴퓨터?”
아! 한 번씩 실수를… 지금은 슈퍼 컴퓨터도 산더미만큼 큰 것을 쓰는 세상이다.
우리나라도 2000년 들어서서 겨우 타키온(Tachyon)을 도입했지 않은가.
“슈퍼 컴퓨터가 더 진화하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단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꿈 같은 일이죠.”
“그렇습니까? 그럼 배럴당 18달러, 하루 생산량이 최대 900만 배럴이니까 1억 6천 2백만 달러가 됩니다.”
“예, 왕세자 저하. 거기에 60일을 곱하면… 총 97억 2천만 달러네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응, 절대.
그때 당신은 이불킥을 하면서 나를 씹어 먹으려고 할걸?
“예, 저는 세상의 섭리를 믿습니다.”
“인샬라!
사실은 내 기억창고에서 꺼낸 미래 정보를 믿습니다요. 당신이 ‘신의 뜻대로!’를 외치면서 속으로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거든.
“특보, 관례대로 15%를 계약금으로 하고, 만약 인수를 거부하면 절대 계약금 반환은 없습니다. 설사 미국 대통령이 물려 달라고 해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왕세자 저하를 믿지만, 워낙 큰 거래라서 사우디 석유청 장관의 취소 불능 계약서를 받고 싶습니다. 인도를 거부하면 5배 배상을 하는 것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응, 분명히 안 주려고 할지도 몰라. 그러려면 너희는 72억 9천만 달러를 토해 내야 하거든… 절대 못 물러.
졸지에 불려온 석유청 장관도 이런 미친놈 봤나? 하는 표정으로 사인을 했다.
“특보, 인도처는 어디로 할까요?”
“여기 사우디요. 제가 지정하는 제 3자가 정해진 날짜에 인수할 겁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소. 이번 거래.”
“왕세자 저하, 인샬라입니다.”
돈이 송금된 것을 확인한 시혁은 지체없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나섰다. 공항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석유청 장관에게 왕세자가 은근히 물었다.
“장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저하, 저놈은 미쳤습니다. 10달러까지 떨어지는 것을 우리 사우디의 독자적인 감산으로 멱살을 잡아 끌어올린 결과 아등바등 잡고 있는 가격이 15달러입니다. 더 버티기 힘든 지경인데 잘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달간 감산하는 효과를 누리고, 15% 계약금도 벌었습니다.”
“그럴까?”
“예, 베네주엘라와 이라크는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두 나라 모두 돈이 말랐습니다. 바닥까지 긁어 퍼낼 겁니다. 아마 내년에는 12달러까지 추락할 지 모릅니다. 저하.”
“이상해. 마이다스 킴의 소문 못 들었나? 미합중국 대통령을 만든 킹메이커가 실상은 미친놈이었다고? 믿어져?”
“너무 똑똑해서 과신하는 거겠죠. 원래 도박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미친놈입니다.”
“꼭 악마와 계약하는 기분이 들어. 뭔가 다른 노림수는 없는지… 15억 달러 계약금이 미끼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정말 찝찝해.”
* * *
“마이다스 킴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들러서 왔다고 했지?”
“예, 국왕폐하.”
“거래를 했을까? 알아봐.”
“…그게, 직접 왕세자와 밀실에서 만났다는데 정보를 줄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그걸 물어 보래? 왕세자와 만날 때 배석을 했다거나 불려간 놈이 있을 거 아냐? 그놈이 누군지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잖아?”
“아! 알겠습니다. 폐하.”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중동의 괴짜 오만 국왕. 그도 왜 저런 거래 제안을 하는지 헷갈렸다.
무조건 이기는 조건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매일 악을 쓰는 감산 효과는 덤이고, 15%의 계약금도 날름 먹을 수 있는 일.
그런데 왜? 조지 부시를 당선시킨 세기의 지략가로 평가받는 놈이? 갑자기 미쳤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미친 짓이지. 이건 함정이다. 잘못 물었다가 입에 바늘이 꿰면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
계속 면담을 미룰 수 없기에 보기는 봐야지.
벌써 70세를 넘긴 국왕 입장에서 보자면 손자 중에서도 막내뻘. 자신의 손자나 아들과 비교하면 봉황이다. 실물이 너무 궁금해서 혓바늘이 돋을 지경이었다.
오만 국왕은 천성이 워낙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기행을 일삼는 장난기 가득한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석유 거래는 관심 밖이었다. 어서 빨리 세기의 천재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넘쳐 끓었다.
“어서 오시게. 특보.”
“영광입니다. 술탄.”
“총리에게 듣기는 했지만, 직접 듣고 싶어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제가 석유가 필요해서 왔습니다. 배려해 주신다면 조금 살까 합니다.”
“석유는… 총리와 상의해서 사인하시고.”
“예?”
“아랍어를 어디서 배웠나?”
“독학으로 익혔습니다만.”
“아무리 미합중국의 특보라 해도 거짓말은 용납 안 돼. 여기는 신성한 곳이야.”
“제가 왜 국왕폐하 면전에서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자네 발음에 스와힐리어만의 독특한 억양이 섞여 있어. 이건 의도적으로 배웠다는 증거… 나에게 환심을 사려고 말일세.”
환심을 사려고 스와힐리어 억양을 섞은 건 맞다. 오만 국왕의 선조는 탄자니아에서 넘어왔다는 것을 알고 왔으니까. 그런데, 납득시키기 쉽지 않네. 거짓말 아닌데.
이럴 때는 돌직구지.
“أعرف سر الملك. هل استطيع ان اقولها هنا؟”(나는 국왕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해도 괜찮습니까?)
“이 죽일 놈! CIA였더냐?”
“전하, 진정하십시오. 저는 방금 말한 발루치어(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어), 그리고 페르시아어, 인디어까지 다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네가… 어찌 내 꽁꽁 숨겨 둔 비밀을 알 수 있단 말이냐?”
“그야 CIA에게 들었으니까요.”
“어엉?”
“그렇다고 제가 CIA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아… 진짜 CIA는 알고 있었군 그래.”
“예, 조금 줄이십시오. 연로하신데 건강에 안 좋습니다.”
희한한 놈이다. 정말 아랍어에다 인접한 부족어를 다 할 줄 안다. 현지인처럼 능숙하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눈앞에서 증명을 하니 안 믿을 수 없잖은가.
“나에게 공주가 열 댓명 있는데 말이야. 하나 고를 텐가?”
“죄송하지만, 아직 결혼을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그래? 그럼 한 잔 어떤가? 들통난 비밀은 이미 가치를 상실했으니 야무지게 마셔 보세.”
가뜩이나 장난기 가득한 국왕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그는 이슬람의 숨겨진 애주가였다.
됐어!
오만 석유도 두 달 동안 내 꺼다.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만 석유만 깔고 앉으면… 덤빌 놈이 없다.
‘이제 세븐시스터즈의 목에 방울만 걸면 야무지게 한 입 베어먹을 수 있겠다.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