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너네가 협박이 뭔지 알아?
무슨 걸그룹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학교 일진 명칭도 아닌데 왜 세븐시스터즈(Seven Sisters)라고 불릴까?
조금 우스꽝스런 이 이름이야말로 전 세계 석유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메이저 석유 회사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한때 미국 석유 매출의 총 90%를 차지하던 기업이 있었다. 록펠러가문의 ‘스탠더드 오일’
이 회사가 반독점 법으로 강제 해체된 이후 여기서 떨어져 나온 대형 정유사와 다른 몇 개와 손을 잡은 뒷구멍 연합체가 세븐시스터즈였다.
엑손, 소칼, 소코니. 걸프오일, 텍사코,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로열 더치 쉘.
그러나 80년대 이후 여러 번의 인수 합병을 거쳐 다시 정리가 되었다.
미국에는 엑슨모빌과 쉐브론, 그리고 코노코필립스 세 개사가.
거기에 영국의 BP, 로열 더치 쉘, 프랑스의 토탈에너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에니를 합해 신 세븐시스터즈로 불리고 있었다.
이 중 최고봉은 미국의 엑슨모빌과 영국의 로열 더치 쉘. 나머지 다섯 개의 매출을 합해도 이 두 회사에 미치지 못하는 초대형이었다.
로열 더치 쉘은 실제 네델란드 국영기업과 영국 민간기업의 합작회사로 본사는 네델란드, 영업은 영국에서 맡고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멋지더군요.”
“예, 특보님. 좋은 코스를 고르셨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봐야 하는 절경이죠.”
“특히 멀리서 보았을 때 정말 힐링이 되었습니다. 순백의 침식된 절벽이 경이로웠습니다.”
시혁은 로열 더치 쉘의 영국 법인장과 차를 나누며 세븐시스터즈 풍경을 칭찬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세븐시스터즈 지방 공원은 깎아지른 절벽 7개가 능선처럼 이어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공교롭게 메이저 석유회사 연합체와 이름이 똑같다.
“거래가 쉽지 않군요.”
“미안합니다. 특보님. 저희 석유업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변수입니다. 그만큼 석유라는 것이 전략 물자 취급을 받고 있고, 또 가격변동이 생기는 자체를 싫어합니다. 투기의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요? 사람이 먹는 식량도 무기가 되는 판에 석유는 안 된다?”
“하여튼 저희는 특보님의 거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흠… 너 같은 놈이 들어올 시장이 아니다. 꿈도 꾸지 마라. 이거네?
그럴 만하다. 작금의 정유업계는 겨우 안정세를 찾고 있는 중이다. 1차 오일쇼크를 통해 죽다 살아났었다.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가면 무조건 돈을 더 버니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추어적 발상이다. 전체적인 소비가 위축되면서 거래량 자체가 극감하면 심각한 경영난에 처하기 때문이다.
석유는 탐사부터 채굴, 회수까지의 과정.
파이프 라인이나 탱커에 의한 수송, 정제, 판매까지 이르는 과정.
이 과정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계획되어 있기 마련이다. 단 한 방울도 외부에서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과정이 타이트하다.
그런 판때기에 시혁같은 갑툭튀가 엄청난 물량을 사겠다고 나서 봐야 어서옵셔… 할 메이저 정유사는 없다고 봐야 한다.
“법인장님. 세븐시스터즈 계곡,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더군요. 오랜 세월 자연의 풍화작용에 의해 깎이고 깎여 오늘의 절경을 만들었습니다.”
“…….”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 깍이고 깍인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변한다는 말이죠.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아예 없어질 지도 모르고.”
“무슨 말씀이신지?”
“영원한 기업은 없는 법입니다. 세븐시스터즈 계곡처럼. 지금 로열 더치 쉘이 세즌시스터즈의 일원으로 세계 석유를 쥐고 흔들지만… 모르는 일입니다. 제2, 제3의 오일 쇼크 사태가 오지 말란 법 있습니까?”
“……!”
“모름지기 경영자란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투기를 하고 있고, 이길 확률이 극히 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투기인 거죠.”
“…….”
“내년 10월, 11월 가격 추이를 제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존재가 세븐시스터즈 아닙니까? 저는7개사 모두와 거래를 희망합니다. 상의해 보세요. 저는 당분간 런던에 머물겠습니다.”
폭탄은 던졌다. 이게 시한폭탄처럼 바로 터지는 것인지, 아니면 불발탄인지 판단은 너희가 해라.
원래 똑똑한 놈들이 사기를 더 잘 당하는 법이다. 내가 전문간데 누가 나를 속여? 이런 상식만 깨 버리면 누구보다 더 열성적으로 발이 빠지는 족속이 너희 아니더냐? 흐흐흐.
* * *
히드로 공항으로 연속해서 전용기들이 내려앉았다. 전용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일반 출국 수속 따위 무시하고 바로 전용 출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화려한 환영식만 없다 뿐이지 국빈급 예우를 받는 사람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세인트 제임스 궁전. 외빈을 맞는 곳인 버킹엄 궁전과 달리 한적하지만 실제 왕세자 부부와 왕족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헨리, 미친 투기꾼 한 명 때문에 이 난리를 쳐야 하나?”
“리처드, 그냥 미친놈이 아니거든.”
“미치는 것도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자네 나라 미합중국의 대통령 특별 보좌관쯤 되면 미쳐도 특별한 점이 있겠지.”
“제기랄. 뜨거운 감자야. 먹기도 어렵고, 버리기도 쉽지 않아.”
“설마… 나중에 대통령을 움직여서 우리 세븐시스터즈를 골탕먹이는 건 아니겠지?”
먼저 도착한 엑슨 모빌의 회장 헨리 제리코와 BP의 리처드 레드포드의 대화는 가시가 가득했다. 최근 BP가 영국 정부에게 대량의 주권을 넘긴 데 대해 헨리 제리코가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헨리 제리코는 원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민주당의 핵심이었다.
“나는 말이야, 처음에 저 냄새나는 이탈리안들이 세븐시스터즈에 포함되는 것도 반대했어.”
“에니(ENI)에 이탈리아 정부 지분이 30%나 되니까 심통이 난 건 아니고?”
“우리 세븐 시스터즈는 전통적으로 앵글로 색슨 계열이 모인 연합체였어. 그야말로 자유를 추구하는 민간 기업들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젠 BP도 정부에 지분을 넘기고… 꼴이 우습게 된 거 아닌가?”
“이봐 헨리, 석유는 전략 자산이야. 정부가 일정 지분을 갖겠다고 덤비는 데 어떻게 막나? 자네 마음 아니까 그만하게.”
세븐시스터즈의 뿌리를 강조하는 엑슨 모빌 헨리 회장에게 BP 리처드가 변명하듯 달랬다. 무슨 순혈주의가 필요하다고? 이익이 된다면 적과도 손을 잡는 세상인 것을.
이윽고 하나 둘 자리를 잡더니 모두 모였다.
긴급 회의를 요청한 로열 더치 쉘의 영국 법인장이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급히 연락을 드려 송구합니다. 어차피 정기 모임 날도 된 것 같으니 겸사겸사 이해 바랍니다.”
“장구한 얘기 필요없어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개망나니 건으로 모인 거 다 압니다. 어떻게 할 것인지만 결정합시다.”
날선 반응이 쉐브론 마샬 회장에게 터져 나왔다.
“솔직히 가장 예민한쪽이 우리 미국계 시스터즈올시다. 당장 정권을 잡은 대통령의 최고 복심으로 꼽히는 사람 청을 거절하기 쉽지 않단 말이죠. 허어… 이것 참.”
“그렇다고 룰을 깰 수 없습니다. 일부터 백까지 치밀한 사슬 구조가 있는 게 정유업, 그런데 느닷없이 돈으로 투기를 하겠다는 미친놈을 받아들이면 난장판이 됩니다. 전례를 만들면 안 되요.”
프랑스 토털 에너지 회장과 이탈리아의 에니 회장도 똑같이 격앙된 목소리로 시혁을 성토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미국 월가에는 석유 선물 시장이 매일 개장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실질 석유를 우리에게서 사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코노코필립스 마크 리버 회장까지 소리를 높였다.
한번 물꼬가 열리자 회의장 여기저기가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한결같이 안 된다는 말이다. 시장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중론이 대세였었다. 잘먹고 잘사는 현 상황을 깨기 싫은 것이다.
“직접 말을 들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
회의를 소집했던 영국 로열 더치 쉘 법인장의 말이 나오자 다들 뜨악하는 반응이 나왔다.
“당신, 미리 마이다스 킴과 말을 맞춘 것이오?”
“불가! 우리 모임에 외인을 참석시킨 전례가 없어요.”
격렬한 항의가 터져 나오자, 법인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봤습니다.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
“그럴 겁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또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래를 제안하는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요.”
“…….”
“사자를 보지 않고 화살을 쏠 수 없다. 아프리카 속담이죠. 우리는 세븐시스터즈, 그가 두렵나요?”
“제길… 법인장, 우리 세븐시스터즈가 민주당에게 올인했던 것을 잊은 거요? 그는 공화당 사람이란 말이요.”
“헨리 회장님, 그러니까 더 봐야 합니다. 최소한 적인지 동지인지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으니까.”
“킴이 먼저 요청한 것이오?”
법인장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문만 열면 그 사자가 들어옵니다. 각자 화살을 넉넉히 장전하시길 바랍니다.”
이들이 얼마만큼 큰 권세를 누리는지 알겠다. 영국처럼 왕가가 존경을 받는 왕족도 드물다. 그런데 왕세자를 비롯해서 왕족들이 기거하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 영빈관을 회의 장소로 쓰고 있다. 대단하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해서 이란, 아랍에미리트 같은 여러 산유국들이 독자적인 국영 석유회사를 설립하면서 옛날 같지는 않다해도, 여전히 전 세계 석유의 50%를 주무르는 세븐시스터즈였다.
대기실에는 각 회사의 수행원과 경호원이 득시글 거렸지만 시혁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수행원이라곤 윌슨 잭 다니엘 한 명뿐, 미합중국 대통령의 특보 행차치곤 단촐했다.
‘어차피 다 내 거, 석유를 깔고 앉아 쥐락펴락하는 당신들의 모든 걸 먹어 드리지.’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시혁은 당당하게 들어섰다.
회의실 안은 그냥 조용했다. 7명의 노인들이 눈빛을 부라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 명도 먼저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 우리는 너 싫어해.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는 고집불통 노인들을 향해 시혁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곤 비어 있는 자리 의자를 당겨 앉으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거래가 될지 안 될지 몰라도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인데 커피도 안 주십니까?”
“보통은 사는 사람이 왕이지만, 석유는 파는 쪽이 왕이라오.”
“그런가요? 물건만 가지고 있으면 왕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 같습니다.”
“그게 정답이오. 특보. 석유란 그런 거요.”
“그럼 저도 왕입니다. 7억 8천만 배럴을 가지고 있거든요.”
- 헉!
회의실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어린놈이 건방지게 블러핑을 한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뜨겁다. 저놈은 새로이 출범한 미합중국 대통령 특별 보좌관, 섣불리 거짓말할 위치가 아니다.
“믿기 어려운 말이구려. 그 정도 물량이면 능히 웬만한 강대국 일 년치 물량이거늘…….”
“예, 저는 지금도 석유가격이 너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물량을 일시에 풀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
“마이다스 킴, 지금 대통령 특보 자격으로 온 거요? 아니면 진짜 석유 바이어 자격으로 온 것이오?”
“그야 당연히 후자죠.”
“그런 사람이 가격을 폭락시키겠다는 발언을 하는 저의가 뭡니까?”
시혁은 같잖다는 듯 팔짱까지 끼고 로열 더치 쉘 법인장을 보며 툭 내 뱉었다.
“커피, 안 주십니까?”
“…….”
와아! X나 쎄다. 말은 바이어 자격이라고 하지만, 저놈의 뒤에는 미국 대통령이 독수리처럼 버티고 있다.
막상 커피가 놓여졌지만 시혁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기세 싸움이다.
“다들 아람코(사우디 국영 석유 공사)에 빨대 한 두 명은 있으실 터, 알아보시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설마… 아람코가 내년 물량 중에서 두 달치 거래를 중단한다고 발표한 이유가?”
“어? 아시네? 또 있는데…….”
“…….”
“오만에는 빨대가 없으시려나? 거기도 내년 10월과 11월 물량 거래가 불가능할 텐데?”
“……!”
“이제 제 협박이 좀 현실적으로 다가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