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늑대 목에 방울 달기
“마이다스 킴,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이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경청하겠소.”
“커피 식었네요.”
“…….”
끝장난다. 한순간에 주도권이 시혁에게 넘어왔다. 7명의 세븐시스터즈 회장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또 새로운 커피가 왔지만 입도 대지 않는다.
“그래요, 알다시피 저는 투기를 하려고 합니다. 겜블은 원래 복불복이죠. 0.1%를 바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월가에도 석유 선물 거래소가 있는데 꼭 우리와 거래를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에이… 제가 워낙 단순한 사람이라서 숫자로만 이뤄지는 거래를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물건을 가진 사람과 직접 해야 간이 쫄깃쫄깃하죠. 하하하하.”
진짜 미친놈 맞네.
미친놈이라 더 무섭다.
7억 8천만 배럴이 한꺼번에 시장에 풀린다면?
시장 가격보다 확 낮춘 가격으로 풀어버린다면?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살을 갉아먹는 짓을 왜 하나? 그리고 잠시 타격을 받겠지만, 시장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저놈은 미친놈이다. 또 언제 다시 지금 같이 사우디와 오만의 몇 달 물량을 독점할 소지가 농후하다.
왜 사우디와 오만 같은 석유 부국이 이런 거래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훨씬 쉬운 법이다.
그렇게 몇 번 똥질을 하기 시작하면, 세븐시스터즈의 시장 지배력은… 추락한다.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이다스 킴은 어떤 거래를 원합니까?”
“음… 귀사들이 가지고 있는 물량을 조금씩 팔아 주면 됩니다.”
“조금씩이라는 게 한 바가지는 아닐 테고, 원하는 물량이 얼마요?”
“회사당 3억 배럴!”
‘이 개같은 놈,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오는 법이다.
그냥 입을 떡 벌리고 침까지 흘리는 세븐시스터즈 회장들.
로열 더치 쉘의 법인장이 총대를 메고 조건을 물어 왔다.
“노, 노. 농담이 과하오. 3차 대전을 치러도 남을 양 아닙니까?”
“잊었습니까? 저는 배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겜블의 승자란… 카드를 까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가격은?”
“당연히 현재 시세 15달러로.”
“인도 시기는?”
“예상들 하실 텐데요. 내년 10월입니다.”
“…그 막대한 자금은 있습니까?”
사실 돈이 턱도 없이 부족하다. 현도에서 받은 비자금은 30억 달러. 여기에 메리웨더와 손창의에게 배당 받은 돈 5억 달러 중에서 엔바디아 추가 지원액을 빼고, 또 삼성동 건설비도 빼면 3억 달러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가용자금은 33억 달러.
여기서 사우디에 계약금으로 14억 5천만 달러를 지급했고, 오만에도 6억 4천만 달러를 지급했다.
지금 시혁의 계좌에는 달랑 12억 달러가 남았다.
세븐시스터즈 7개 사와 3억 배럴씩 거래를 하려면 총 315억 달러(약 22조 원)가 있어야 하고.
15% 계약금만 해도 47억 달러가 있어야 한다. 수중에는 12억 달러밖에 없다. 35억 달러가 부족하다.
“여기 12억 달러가 있습니다.”
“미친!”
차마 놈까지는 못하고.
“거기에 K 글로벌 USA 지분 100%면 대충 남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습니까?”
“…메리웨더가 대표로 있는 그 펀드 회사? 월가의 신성으로 불패를 자랑한다는 K 글로벌 USA의 지분? 그것도 100%?”
“또 있군요. 한국의 현도 그룹은 다 아실 겁니다. 19개 계열사 모두의 지급보증서도 보태죠.”
“…….”
“넘치고 남지만, 또 하나를 더 내겠습니다. 일본 소프트파워 지분 51%, 어때요?”
7명 노인의 턱은 교정을 받아야 닫힐 정도로 또 벌어 졌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완전히 생또라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당황하셨어요? 살면서 이런 미친놈 처음 보셨나봐?
“휴우! 일단 인정합니다. 당신은 미쳤어요.”
“하하하. 배팅이란 게 그런 거죠. 다 먹던가, 아님 다 죽던가… 그게 겜블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
“내일까지 더 머물겠습니다. 가기 전에 계약서를 들고 가길 바랍니다.”
이젠 질린 얼굴로 굳어버린 회의실은 얼음처럼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식은 커피를 비로소 한 모금 마시고 시혁은 회의실을 나섰다.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 * *
“목적이 뭘까?”
“미친놈 속을 어떻게 알아?”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나? 미국 정부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한다든가?”
“이봐, 한두 달이라야 그런 계획도 세우지. 내년 10월이면 거의 1년 반 후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다들 내년 유가를 어떻게 예상하시오?”
“오르지는 않아. 절대.”
“동의, 베네수엘라와 이라크가 미친 듯이 퍼내고 있어. 아무리 사우디를 비롯한 오펙이 감산을 한다고 해도 감당이 안 돼.”
“결국 오펙 회원국들도 증산에 동참할 가능성 90% 이상이라는 보고서를 찢어 버린 게 며칠 전일세.”
“몇 군데 검토 용역을 맡겨 봤는데 모두 비관적이야. 12달러? 잘하면 13달러까지 방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야.”
중구난방,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을 정도로 시혁이 떠난 회의실은 다시 웅성거렸다.
그 와중에 헨리 제리코 엑슨 모빌 회장이 손을 들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명실공히 업계 1위는 엑슨 모빌, 헨리 회장의 생각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마이다스 킴은 사우디와 오만산 내년 10월과 11월 물량을 독점했어요. 모두 중동이요.”
“…….”
“중동에 무슨 변수가 있을까? 그걸 1년 반이나 앞서서 예측할 수 있을까? 또 정확히 10월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어떠시오?”
“…….”
“이미 이란은 오펙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리고 증산을 시작했어요. 모두 알다시피 이라크와 베네수엘라는 마구잡이로 퍼내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고요.”
“헨리 회장님은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코노코 필립스의 마크 리버 회장의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헨리는 시거에 불을 붙였다. 지금껏 시혁의 기세에 짓 눌려 참았던지 내뿜는 연기가 회의실을 뒤 덮었다.
“후우! 이 사안은 다수결로 결정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나는 빠지겠소.”
“저도 그렇습니다. 너무 찝찝합니다.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에요. 헨리 회장님이 빠지면 나도 그만두겠습니다.”
헨리의 뒤를 따라 BP 회장 리처드 레드포드가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시가를 빙글빙글 돌리며 연신 연기를 뱉어 내던 헨리의 말에 모두 담배를 꺼내 들어야 했다.
“내 말을 오해하셨군요. 미친놈이 돈을 바치겠다는 데 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오. BP처럼 빠지는 회사 몫까지 내가 전량 인수하지요.”
“……!”
“그렇소, 나는 석유상이오. 본질을 잊으면 안 됩니다. 석유상에게 공돈을 들고 와 배팅을 하겠다는 바보가 있는데, 왜? 왜? 피한단 말입니까?”
“…….”
“나도 가끔 카지노를 갑니다. 룰렛이나 블랙잭을 좋아해요. 하지만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도박은 그런 거예요. 이번에는 내가 카지노가 되는 건데… 뭐가 무서워서? 찝찝하다면 다 내가 인수하지요.”
침묵이 깨지고 회의실은 달아올랐다. 앞에 빠지겠노라 선언했던 BP 리처드 회장조차 바로 태세 전환을 하고 열을 올렸다.
지금은 사냥의 계절, 화살은 날아갔다.
요점은 어떻게 하면 저 미친놈에게 더 단단한 올가미를 메느냐… 이것만 남았을 뿐.
“취소불능 조항을 디테일하게 넣어야 합니다.”
“손해 배상액을 높입시다.”
“메리웨더와 현도그룹 지분에 대해서 공증을 받도록 합시다.”
“일본 소프트파워도 빼면 안 되지.”
“그렇소, 이번 기회에 아예 뿌리째 캐냅시다.”
- 다시 부르시오. 그 미친놈!
* * *
“커피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향이 좋군요.”
“아까도 똑같은 커피였습니다. 특보.”
“커피를 주식으로 마시는 사람이 있답니까? 기호품은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맛도 달라지는 법이죠.”
여전히 한치도 눌리지 않는 저 배짱. 놀랍다.
“자! 구체적인 계약 조건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해볼까요?”
“……우리는 아직 어떤 결정을 했다고 말한 적이 없소만.”
“거절이라면 굳이 나를 다시 부를까? 신경전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여러 회장님들!”
“…….”
“여러분은 맛있는 고기를 나눠 드실 준비가 된 것이고, 나는 기적이 일어나길 하늘에 기도하는 것이고… 아닌가요?”
항상 한 발 앞서 말을 해 버리는 시혁에게 또 압도되고 말았다.
저 근자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순간 헨리 제리코는 등줄기가 짜릿하는 위험신호를 느꼈다. 이 감각 덕분에 위기를 벗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릴까? 쪽팔리지만 그냥 빠질까?
너무 멀리 와버렸다. 아까는 자신이 주도해서 이 거래를 하자고 부추긴 입장 아니었던가. 다들 입만 헤 벌리고 있는데… 빠지긴 늦었다.
그렇다면 더 강하게!
여기서 약세를 보이면 안 된다. 상대방이 블러핑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이상 더 밀어붙여야 이긴다.
“마이다스 킴 특보, 이번 거래를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당신이 제시한 담보능력도 인정합니다. 충분해요. 그래서 다시 제안을 할까 하는데… 어떻소?”
“오! 흥미롭군요. 역제안이라… 들어 봅시다.”
“3억 배럴을4억 배럴로 늘립시다. 어차피 당신은 배팅을 하는 입장, 제대로 승부를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소만.”
걸렸다. 이 능구렁이들.
나중에 그 입을 뭉게고, 스스로 사인한 손목을 자르고 싶어 질 거다.
“그럽시다.”
“…생각도 안 하고 단숨에 결정을?”
“겜블이라면서요? 도박사는 물러서지 않아요. 한국 속담에 기호지세라는 말이 있죠.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 떨어지면 죽는 판인데 뭘 망설인단 말이오?”
“…….”
“그 레이즈(raise) 받고 한번 더 배팅을 하고 싶은데 자신있습니까?”
“거기서 더 배팅을?”
“당근, 1억 배럴 더 올립시다. 각 사별로 5억 배럴!”
X발! 이게 아닌데… 어떻게 된 놈이 한 치도 물러서질 않나.
“쫄리면 카드 덮고 뒈지시던가.”
여섯 명의 회장은 일제히 헨리 제리코를 바라보았다. 받던가 뒈지던가 당신이 결정하라는 무언의 압박.
이게 진퇴양난인 거다.
받자니 만의 하나라도 잘못되면 회사의 존망이 걸려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나면 완전 X신이 되고 만다.
‘X됐다.’
똥씹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헨리를 향해 시혁이 또 칼을 던졌다.
“그리고 저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할 수 없으니, 세븐시스터즈 여러분도 위약 시 배상금을 열 배로 올려야죠. 그게 그나마 공평한 룰 같습니다.”
5억 배럴씩 7개사를 곱하면, 35억 배럴이다. 총 금액으로 따지면 525억 달러(약 36조 원)고, 15% 계약금만 해도 78억 달러에 달한다.
그 열 배를 배상하는 상황이…….
올리는 없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리 없지만.
혹시, 만의 하나라도 닥친다면 780억 달러(약 54조 원)를 물어 줘야 한다고?
“쫄리면 카드 덮어요. 레이즈는 거기서 불러 놓고, 왜 이렇게 새가슴이 되실까?”
저, 저. 저 새끼… 마지막까지 심장을 긁어 대는 저 말투.
“좋소! 사인합시다. 나중에 우리 원망일랑 하지 마시오.”
“콜!”
산드라는 손이 떨려 서류를 제대로 넘기지도 못했다.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겨우겨우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지만, 여전히 돈이 없었다. 그래서 아는 지인의 가게 한 귀퉁이를 빌려 변호사 간판만 걸었다.
옷 가게 한 구석을 파티션으로 막고 책상 하나만 달랑 놓은 변호사 개업… 한숨이 나왔지만 어떻게든 국선 변호사라도 배당을 받으려면 사무실이 있어야 했었다.
그런데, 불쑥 찾아온 동양인 의뢰인.
작은 계약을 할 예정인데 자신을 대리해 줄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재수! 첫 개시다.
그렇게 따라나선 자리가…….
어머나! 여기였어? 왕족들이 산다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
거기다 모인 사람들 면면이… 화장실이 자꾸 가고 싶지만 분위기가 자리를 뜰 형편도 아니었다. 밖에는 수십 명의 경호원들이 살벌하게 지키고 있거든. 그 사이를 헤치고 화장실을 갈바에는 참는 게 옳다.
자꾸 진땀이 삐질삐질 애교머리를 타고 내렸다.
상대방 일곱 명은 왕립 전속 변호사들. 이젠 손바닥이 땀에 젖어 서류가 미끈거렸다.
미치겠네. 소변은 참을수록 더 마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