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중국에서의 초대
“음… 듣던 대로 영국 전통음식은, 별로야. 그래도 스코치 에그는 먹을 만하네. 많이 먹어요.”
“…….”
“배 안 고파요?”
“고픈데, 아직 손이 떨려서.”
“화장실 참느라 고생했어요.”
시혁은 계약을 마치고 윌슨과 산드라를 데리고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이었다.
“저… 솔직히 조금 지렸어요.”
“푸하하하하. 그러게 중간에 다녀오라니까.”
“제 생에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없었을 거예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온 몸에 한기가, 으으흐.”
“뭘… 그 정도 가지고.”
“세븐시스터즈 회장님들의 눈빛이 비로소 이해가 돼요.”
“산드라, 독심술도 배웠어요?”
“아뇨, 당신은 진짜 미쳤다는 말이거든요?”
이 변호사 아가씨, 꽤나 당돌하다.
덜덜 떨면서도 할 일을 빠짐없이 챙기는 모습에 시혁도 꽤 감탄했었다. 덕분에 몇 가지 함정이 내포된 문구를 고칠 수 있었다. 초임 변호사치고 괜찮은 솜씨였다.
“산드라, 이번 계약 선임 건으로 만 달러 받았죠?”
“네, 첫 수임이었는데… 좋았어요.”
“그럼 오늘 계약 내가 치른 계약이 얼마짜린지 기억해요?”
“당연하죠. 아마 죽을 때까지 숫자 하나 하나 잊지 못할걸요?”
“그래요. 계약금만 해도 78억 달러짜립니다. 근데, 이게 780억 달러가 된다 이거죠.”
“…2년 후에 세븐시스터즈가 계약을 이행해 버리면 손해 배상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요?”
“없는 석유를 어떻게 공급합니까?”
“그게 무슨 말… 이죠?”
“하하하하,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예 저랑 전속 계약 안 할래요?”
“안 해요.”
단칼에 거절하는 산드라.
“너무 단호한데?”
“당신과 같이 일하면 제 명대로 못 살게 분명해요. 저는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요.”
“산드라, 숨 쉬고 있다고 다 사는 건 줄 알아요?”
“…….”
시혁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쿡 찍었다.
“여기, 가슴…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는 게 아냐. 숨만 쉬는 거지.”
“……!”
“어떻게? 이게 훨씬 더 중요한 겁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느냐가…….”
산드라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무의식 중에 가슴을 짚었다.
왜 이럴까? 느닷없이 심장은 왜 이렇게 나댈까?
지금까지 왜 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어. 한 번도.
그런데, 이 사람은…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한다.
빵!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 사람 뒤에서 터져 나오는 후광에 눈을 뜰 수 없었다.
X나… 멋있다.
“또 하나 건졌군요. 보스.”
“응, 바보라서 쉽게 꼬셨네.”
“……나?”
“그래, 당신 산드라. 앞으로 잘 부탁해.”
두 사람의 대화와 상관없는 듯 스테이크에 코를 박고 있던 윌슨이 오히려 신기한 산드라.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입을 여는 것이네?
“지금까지 당신 벙어린 줄 알았어요.”
“반갑소. 산드라. 나는 완전히 우리 편이 아니라면 입을 열지 않소. 언제 죽일 지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을 이유가 없거든.”
“…그럼, 이제 저는 당신에게 죽지 않겠네요?”
“축하합니다. 폭탄이 작렬하는 보스의 품에 안긴 것을… 앞으로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혼자 가지 않도록 지켜 드리리다.”
씨익 웃는 윌슨의 험상궂은 표정이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것은… 진심이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산드라의 가슴도 진정되었다. 이게 함께한다는 것이구나.
“그런데, 킴!”
“예.”
“내년 10월 달에 유가가 폭락하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망하죠.”
“…그렇게 쉽게 말할 사안이 아니지 않나요?”
“산드라, 어쩌면 당신이 열심히 수임료 벌어서 나와 윌슨을 먹여 살려야 할지도 몰라. 하하하하.”
“나… 금방 약속한 거 물릴 수 없죠?”
“응, 윌슨이 당신을 죽일걸?”
“또 화장실 가고 싶어. 너무 쉽게 결정했나 봐.”
약간 맹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가씨를 하나 주웠다. 이렇게 한 명씩 내가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사실에 시혁은 든든했다.
* * *
[시혁아. 요즘 이상한 전화가 온다.]
“헛소리하면 바로 끊는다.”
[진짜라니까… 웬 놈의 부동산에서 이렇게 전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법인에 땅이 그렇게 많았나?]
맞다! 깜빡 잊고 살았다.
한국도 시작되었구나. 본격적으로 신도시를 만드는 그때가 닥친 거다.
“박하송, 태식이 아직 출국 안 했지?”
[일주일 후에 간다만… 왜?]
마침내 한국도 올림픽을 치른 후 전국민 해외여행 자유화를 선언했다. 누구든 자유롭게 외국을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식이도 MIT 입학 허가를 받아 놓고 출국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성적은 바닥을 기는 놈이 발명 경진대회와 과학 아카데미에서 몇 번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떡하니 합격하고 말았다.
“태식이한테 올림픽 휘장 관련 서류 중에 ‘열면 죽인다’라고 되어 있는 봉투 받아서 살펴봐.”
[죽기 싫은데?]
“진짜 굶어 죽게 해주리? 학교에 네 정체를 다 까발리면 오백 원 줄 놈 한 명도 없을걸?”
이 새끼, 지금도 변함없이 얘들에게 삥을 뜯는다는 소식을 예지에게 들었다. 예지는 가뿐하게 한국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해서 시혁과 박하송의 후배가 되었다.
이런 애를 전교 꼴등이라고 믿고 있었으니…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호돌이와 엠브럼 휘장 사업으로 종돈을 벌었지만, 정작 큰돈을 묵혀 둔 곳은 따로 있었으니.
재정이 바닥난 시 군으로부터 깃발 대금 대신 불하 받은 국유지들. 대부분 그린벨트(개발 제한 구역)였던 땅들이 용틀임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해 발표될 그곳.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신조어를 낳는 성남시의 그린벨트는 지붕을 뚫고, 구름도 뚫고, 하늘 꼭대기로 치솟는 기염을 발하지 않았던가.
성남시로부터 깃발 대금으로 받은 토지는 분당의 핵심 서현동에 5만 평, 그리고 정자동 5만 평, 마지막으로 판교가 10만 평이었다.
한번 정리차 들어가 볼까? 내 궁전이 어떻게 지어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던 차였는데…….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방향을 선회해야만 했다.
“마이다스 킴입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김시혁 군.]
“아! 안녕하십니까? 부총리님. 미처 영전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괜찮아. 지금 자네만큼 바쁜 인물이 어디 있다고… 활약하는 모습 TV로 잘 지켜보았네.]
후진타오, 올림픽 행사 때 한국을 방문한 당시 인연을 맺었던 사람.
십 년 후면 중국의 6번째 주석이 될 거물이었다. 그런 사람을 우편 배달부로 써먹었었다.
그러고보니 마운의 꿈을 꾼 적이 언제였던가? 거의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번도 없었다. 별일이 없다는 뜻이겠지만… 지금이 만날 기회 아닐까?
“부총리님,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꼭 신세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껄껄껄… 아닐세. 그 정도는 별거 아냐. 혹시… 정말 신세로 생각한다면 좀 와줄 수 있나?]
무슨 일이 있구나. 아직까지 한국인이 중공(중국 공산당)으로 불리는 중국에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시절이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의 특보 자격이라면 문제없지 않을까?
부시 대통령도 초대 중국 주재 연락 사무소장을 지낸 전력이 있었다. 그 다음 CIA 국장으로 점핑했고. 한마디로 중국통이라는 소리.
허락을 받아야겠다.
“프레지던트, 자주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나 뿔났네.]
“하하하. 프레지던트가 꼭 필요한 순간에는 옆에 있을 겁니다. 지금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누리세요. 허니문 시기 아닙니까?”
[그래, 무슨 일인가?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생겼나? 그렇다면 행복한 일이고.]
울컥할 뻔했다. 이런 신뢰라니…….
그러나, 부시를 대할 때마다 카인의 마음이 되는 시혁. 네거티브 전략으로 밀어 올린 대통령과 직접 진두지휘했던 자신의 원죄는 항상 가시처럼 심장에 박혀 있었다.
“제가 중국을 좀 다녀올까 합니다. 프레지던트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그러시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중국에 가면 장쩌민 차기 주석을 만나 안부도 전해 주게. 내가 연락을 취해 놓지.]
이건 또 뭥미? 부시가 장쩌민과 안면이 있었던가?
[내가 중국 사무소장 할 때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이었어. 곧 차기 주석으로 등극할 테니 잘됐네. 아마 반갑게 대해 줄 걸세.]
이것 봐라. 또 예기치 않았던 카드가 한 장 생겨 버렸다.
꼭 미리 안배한 것처럼 필요할 때마다 징검다리가 놓이곤 한다.
감사할 다름이지. 이런 건 낼름 집어 삼켜야 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되거든.
가보자! 이 초대는 거절할 수 없다. 그리고 그토록 미루고 미뤘던 내 친구 마운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 *
중국? 중공?
아직 대한민국은 중화민국(대만)과 수교 중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적성국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당연히 중공(중국 공산당)으로 불러온 역사가 존재했었고,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만간 소련연방이 붕괴하면서 미소 간 냉전이 끝나고, 세계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 원칙’은 수교의 절대 조건이었다.
결국 대만과 단교를 한 세계 거의 모든 국가는 ‘차이나’라는 국명 자체를 대륙의 중국에게 헌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도 맞고, 중공도 맞다.
돈을 벌기 위해.
대륙의 14억 시장을 위해.
대만을 버려야 했지만… 대만을 중공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 * *
베이징 수도공항이 소란스러웠다. 보나마나 또 어떤 외국 귀빈이 오는 것이다.
귀빈이나 공산당 특권층이 방문하는 날이면 으레 공항은 난리 법석을 떨었다.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는 높낮이가 없는 평등한 세상 아닌가?
응, 아니다. 더 철저히 차별화되고, 더 계층간 서열이 뚜렷한 것이 공산주의다.
이 특정 계급들은 비행기 트랩 바로 앞 활주로까지 차를 대기시킨다. 인민들과 섞이지 않는다. 각 기차역 플랫폼까지 차가 들어오는 나라다.
영국에서 도착한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자, 몇 대의 고급 자동차가 트랩 바로 아래 정차했다. 선두 차량의 조수석에서 내린 인민복 차림에 안경을 낀 남자가 트랩을 올라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이코노미석의 승객은 커튼 너머 일등석을 들여다볼 생각도 못 했다.
“안녕하십니까? 김시혁 특보 선생. 중앙 외사처 판공실(외무부 비서실) 주임 리커창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참, 당황스럽네. 도착하고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이 또 리커창이야?
“장쩌민 동지의 지시를 받고 나왔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 영어로 안 하셔도 됩니다. 푸퉁화(普通話 표준어)로 하시죠.”
“아! 화교(華僑)였습니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인입니다.”
“북경 표준어를 그토록 정확히 발음하는 외국인은 처음 봅니다. 놀랍습니다.”
“예, 신경 써서 공부한 덕분이죠. 아무튼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건 또 웬 떡이냐? 미래에 총리가 될 인물이 떡하고 출몰하다니.
시혁은 리커창을 따라 활주로에 세워진 차에 탑승했다. 윌슨은 다른 차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가는 내내 리커창은 주변에 펼쳐진 건물과 풍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느라 침을 튀겼다.
이런 잡다한 이야기 좀 안 하고 조용히 가면 안 될까… 리커창이 이렇게 떠버리인 줄 몰랐던 시혁은 피곤했다.
그러나 방금 지나친 무슨 동상을 가리키며 한참 설명을 하던 리커창은 밑으로 내려진 왼손바닥을 조심스럽게 펴 보여 주었다.
볼펜으로 눌러쓴 듯 선명한 글씨가 손바닥에 있었다.
- We're being bugged.(도청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다시 주머니에서 작은 핸드폰을 꺼내 옆에 내려놓는다. 입은 여전히 빌어먹을 동상 이야기를 주절거리면서.
시혁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핸드폰을 주먹에 말아 쥐고 있다가 안주머니로 감췄다.
함정일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리커창은 후진타오의 심복, 후대를 이으려고 했던 사람인 것은 익히 아는 사실.
‘이거 생각보다 더 심각한 뭔가 있다는 말이네.’
“김 특보 선생, 곧 중난하이(中南海 중국 청와대)에 도착합니다. 주석님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리 주임.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차나 한 잔 하시지요.”
“아닙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감히 귀빈과 맞상대할 신분이 아닙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네, 부인께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
압니다. 당신 부인의 성씨도 ‘후(胡)’라는 것을.
후진타오 이 양반, 상당히 어려운 입장인 모양이네.
‘제길… 월미도 디스코 팡팡도 아닌데 왜 이리 익사이팅하냐? 나도 좀 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