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자금성의 서쪽,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무원과 공산당 중앙 판공청 집무실이 모여 있는 장소가 별도로 있다.
옛적 황실의 정원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정치 일번지로, 한국 청와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름하여 중난하이(中南海)라고 불리는 중지 중의 중지. 일반인은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그런 곳으로 세 대의 승용차가 별도 검문도 없이 들어갔다. 이례적인 일이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반갑소. 천하의 인재를 만나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큼지막한 검정색 뿔테 안경에,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장쩌민.
뭐랄까? 카리스마 같은 거 일체 없다. 동네 슈퍼 평상에서 내기 장기를 두는 아저씨, 딱 그 정도의 평범한 모습.
여기에 속아 요단강 넘은 사람이 한둘이던가. 비록 지금은 웅크리고 있지만, 이미 다음 대 주석으로 내정된 사람이다. 14억 인구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쥔 거물.
상하이방이라는 가장 거대 연맹체를 만들어 다음 대, 또 그다음 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장본인이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장쩌민이다.
그런 사람이 동네 아저씨 같은 훈훈한 모습으로 시혁을 환대하고 있었다.
“저 같은 사람은 중국 대륙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김시혁 선생,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렇다고 다 똑같은 건 아니죠. 그중에 정말 특출 난, 소위 세기의 천재들이 한 번씩 나오곤 하죠.”
“…….”
“인민들이 편하게 살려면 그 천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그들이 바꾸니까요, 그들의 지도력이.”
결국 자신도 천재라는 말이네. 세상은, 특히 중국 14억 인구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장 서기님, 저는 미합중국 대통령 특보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단순한 관광객입니다.”
선을 그어야 한다. 여기 더 휘말릴 이유가 없다. 애초에 장쩌민은 시혁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우리 중국은 비로소 눈을 뜨고 세상에 발을 들이는 중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미국은 중요한 파트너, 그런 미국 대통령이 직접 전화로 신신당부한 사람이 관광객이라… 당황스럽소. 하하하하.”
왜 왔는데? 너 진짜 목적이 뭐야? 이렇게 물어보면 될 일을 비비 꼬는 저 특유의 말투.
소리장도(笑裏藏刀).
중국인들은 절대 직설적으로 묻지 않는다. 뒤에 칼을 감추고 있지만, 앞에서는 웃는다. 그리고 상대가 방심하고 등을 보이면 바로 그 칼을 꽂는다.
‘이거 오늘 하루가 꽤 길겠다.’
그렇다면… 나도 주저할 이유가 없지. 선한 자에게는 선하게 하겠지만 악한 자에게까지 시간을 버릴 이유가 없다.
“대립을 원하십니까?”
“아니오. 우리는 미국과 다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경쟁을 하려고 하십니까?”
“언감생심, 덩사오핑(등소평) 동지가 당부하신 말이 있어요. 앞으로 100년간 우리는 미국에 맞서지 않을 겁니다.”
“힘이 세져도요?”
“…….”
“잔에 물이 차면 흘러넘칩니다. 그 물은 그냥 버리실 겁니까? 아니면 주변을 적실 겁니까?”
“…….”
“누구든 힘이 없을 때는 웅크립니다. 괜히 싸워 봐야 당할 게 뻔하니까요. 하지만, 힘을 기른 다음에도 안 싸울 것이냐……. 커진 힘을 쓰고 싶죠. 아닌가요?”
비로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놓고 치받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
“닥치지 않은 미래를 예단하는 건 온당치 않아요. 아무도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아니겠소?”
“그렇게 갑니다. 필연이죠. 지금껏 지난 역사에서 중국은 세계 경제의 35%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200년간 죽의 장막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몰락했죠.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중국이 일정 수준까지 회복하는 건 여반장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바라는 바입니다, 특보.”
“14억 인구, 강력한 공산당 통제, 일사불란한 인민들의 단결력 그리고 개혁 개방이라는 여러 요소가 결합된 중국은 무섭게 성장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이 힘을 어떻게 쓸 것이냐…….”
“특보 개인의 의견입니까? 아니면 미합중국의 공식 입장입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장쩌민 역시 이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거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공식적인 직함으로 중국을 방문한 게 아닙니다. 그냥 편히 관광객 모드로 머물다가 돌아 갈 생각입니다.”
“특보,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국적은 한국, 직책은 미합중국의 대통령 특보, 내가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합니까?”
너 정체가 뭐냐? 장쩌민 입장에서는 X나 헷갈릴 만하다. 뜨거운 감자는 잘못 삼키면 입천장이 홀라당 까진다.
“국경이나 국적은 제게 의미 없습니다. 물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변하지 않겠지만, 저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을 지향합니다.”
“세계인이라… 묘한 사상을 가지고 있구려.”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수적인 틀에 갇혀 있으면 도태될 테니까요.”
“설마 특보께서 아나키스트(Anarchist)는 아니길 바랍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무정부주의자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저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처음의 이웃집 아저씨는 어느새 도망가고 없었다. 지금 장쩌민의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별 희한한 놈을 다 본다는 투였다.
“조선과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역사 이래로 이웃이었소. 좋은 형과 동생처럼 말이외다. 특보와 저의 관계도 그리 되길 바랍니다.”
“장 서기님, 우선 바로잡을 것이 있습니다.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입니다. 그리고 형과 동생의 관계도 아닙니다. 서로 동등한 자주 독립국이었죠. 역사 이래로 이웃이었다는 점만큼은 동의합니다.”
“…….”
어딜 은근슬쩍 기어올라?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친 역사, 부정하지 않아. 힘센 깡패에게 삥을 뜯긴 거 안다고.
그렇다고 깡패를 형이라고 하는 등신이 어디 있다고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셔? 그런 논리를 주장하려면 너희도 중국이라고 하지 마. 명이나 청이라고 하란 말이다.
그 명(明)도 청(淸)도 망한 지 하세월이다, 자식아!
시혁이나 장쩌민이나 얘기 속에 잘 벼린 칼을 주고받고 있었다. 자칫하면 심장을 찔리거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갈 수 있는 살벌한 말들이다.
먼저 발을 뺀 것은 장쩌민.
“하하하.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이거 귀한 손님을 모셔 놓고, 실례가 많았소. 부시 대통령에게 한 소리 듣겠습니다.”
“예, 제가 아직 어립니다. 올림픽까지 치른 나라 국민으로서 도량을 보이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
안 진다, 너희에게.
그리고 시작은 당신이 먼저 했어. 걸어온 싸움 피하지 않아. 다시 살면서 절대 밀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거든.
장쩌민의 얼굴은 이제 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한국과는 아직 미수교국, 거기다 이놈은 중국이 납작 엎드려야 할 미국의 실세다.
찢어 죽이고 싶지만, 도리가 없다.
‘우리 중국도 속히 재기해서 올림픽을 열 거다. 그때 꼭 참석해 다오, 이 어린 조선 놈아.’
* * *
베이징의 후통(胡同, 골목)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다 놀란다. 크고 화려한 고대광실 같은 집들, 이를 둘러싸고 있는 키를 훌쩍 넘는 담장과 담장. 그러나 실제 사람이 통행해야 할 골목은 어깨를 쭉 펴고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다.
이 넓은 땅을 가진 놈들이 골목은 왜 이렇게 비좁게 지었을까?
방어하기 수월하니까 그렇다.
중국의 수천 년 역사에서 전쟁이 아예 없었던 해가 얼마나 될까?
250년……. 이 기간 빼고는 매년 전쟁을 겪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일단 의심하고, 틈만 나면 배신하고, 속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전쟁 통에 사람을 믿어? 그러다 뒈지면 누가 책임질 건데? 언제 다시 볼 기약도 없는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어. 그냥 내 식구만 잘 살면 그만이야.
이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 생각이다.
영빈관에 숙소를 마련했다고 극구 만류했지만 시혁은 중난하이(中南海)를 나섰다.
가뜩이나 기름진 요리로 더부룩한 속에 솜털까지 지켜볼 영빈관에서 묵고 싶은 마음, 일도 없었던 것이다.
또 실제 중국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시혁은 베이징 반점(호텔)에 윌슨과 같이 짐을 풀었다. 외국인들은 의무적으로 베이징 호텔과 지정된 몇 개의 오성급 호텔에서만 묵어야 했었다. 감시하기 편하니까 그런 것이다.
이윽고 새벽이 가까운 3시 무렵.
똑똑똑-
벨이 있는데도 굳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왔구나!’
“김시혁 선생?”
“그렇습니다.”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같이…….”
“기다렸습니다.”
“……!”
“앞장 서시죠.”
“…….”
“놀랄 것 없어요, 갑시다.”
“…….”
“여기 직원들은?”
“아… 예, 모두 우리 공청단 소속입니다.”
“다행이군요.”
시혁은 아직 옷도 벗지 않고 있었다. 윌슨도 조용히 재킷을 집어 들고 따라 나섰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는 곳이지만, 최소한 보스를 먼저 죽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눈빛이 결연했다.
그러나.
“윌슨, 여기 있어요.”
“보스! 안 됩니다. 여긴… 적지나 다름없는 위험한 곳입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괜찮습니다.”
문 앞에서 시혁을 기다리던 요원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과연… 부총리가 은밀히 초빙할 만한 인물이다. 아무런 언질이 없었건만 기다렸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더군다나 수행원을 물리치고 혼자 가겠다? 호랑이 간이라도 씹어 먹었단 말인가?
아니다. 시혁은 믿는 것이다, 부총리가 아니라 친구를.
* * *
“고생했네. 혼자 왔다고?”
“예, 긴히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생각돼서요.”
“역시, 내 눈이 잘못되지는 않았어. 자네야말로 살면서 처음 보는 가장 신비로운 인물일세.”
“부총리님, 겨울밤이 길지만 아침은 금방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래, 시간이 얼마 없어. 아마 자네가 출국할 때까지 다시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위험합니까?”
“음… 심각하네.”
“덩사오핑 주석께서 부총리님을 차차기 주석으로 지명하셨습니다. 그래도요?”
“권력의 속성은 그렇지. 결코 2인자를 용납하려고 하지 않아. 힘의 분산을 좋아할 지도자는 없으니까.”
그렇구나. 감이 잡힌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두 가지 원칙을 천명하면서 깨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첫째, 현재의 주석이 차차기 주석을 미리 지명한다. 이는 과도한 권력 다툼을 예방하고, 10년으로 정한 현 주석의 임기를 지키기 위함이다.
둘째, 상무위원은 홀수로 임명, 모두 한 표씩만 행사하며 이는 주석 혼자 국가 중대사를 독단으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결국 공산당 1인 독재의 폐해를 최소화하려는 안전장치를 마련한 셈이었다. 일종의 집단지도체제.
덕분에 이제 곧 중국이라는 나라 국가주석으로 등극할 장쩌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 다음으로 정권을 물려 받을 후진타오가 눈엣가시로 보일 것은 뻔한 일.
만약, 후진타오를 미리 제거해 버린다면?
자기 사람에게 정권을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상왕으로 건재한 권력을 누리면서.
지금 몇 마디만 들어 봐도 충분히 이해된다. 10년 후 권력을 물려 받기 전에, 당장 목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네…….
“부총리님,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래, 지혜를 빌려주시게. 하루하루 불안해서 미칠 지경일세.”
“병원에 입원하십시오, 즉시.”
“훗! 그래 봐야 얼마 버티지 못해. 몇 년씩 누워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러다간 아예 밀려나서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게야.”
맞다. 명색이 차차기 대권을 약속받은 지도자다. 그런 사람이 비굴한 삶을 살려고 할까? 차라리 죽기를 택할 것이다.
시혁은 한동안 후진타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비록 중국이라는 혐오감 짙은 나라의 주석이 될 사람이지만… 다른 주석들과 다르게 온건 노선을 걸었다. 독재자이되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노태후와 비슷한 스타일, 역사의 평가도 비슷했었다.
그렇다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딱 석 달만 병을 핑계로 쉬십시오. 그럼 해결됩니다.”
“석 달? 그 안에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나?”
“예, 훗날 두고두고 중국하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비극이 벌어질 겁니다. 그 혼란기는 씻을 수 없는 충격파를 남기죠. 그 덕분에 부총리님에 대한 압박은 씻은 듯이 없어질 거고요.”
“…어떻게, 자네가 범상치 않은 것은 익히 알고 있네만, 미래를 어떻게 내다볼 수 있단 말인가?”
“소나기는 뛰어도 걸어도 속옷까지 다 젖게 만듭니다. 무조건 피하십시오. 지금 권력 말기인 덩사오핑과 장쩌민은 석 달 후에 똥오줌도 가릴 수 없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부총리님에 대한 견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맙니다.”
“석 달만 입원하면… 진짜 압박이 풀릴까?”
“밑져 봐야 본전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