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66화 (66/150)

66화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란?

돌아왔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나름 얻은 게 많았다.

공항에는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정조영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뜨악! 그랜저다. 정말 간지나는 차.

각그랜저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네모나고 각이 졌지만 그야말로 부자의 상징이었던 차. 일본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합작을 했으나, 초기에는 그냥 일본 차였다.

미쓰비시는 일본에서 수요가 없는 대형차 개발에 자금을 들이붓는 걸 꺼렸던 참이고, 현도는 슬프지만 기술이 없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현도가 상당한 자금을 부담하고 90%는 미쓰비시의 기술로 개발된 차. 하지만 끈기하면 현도 아니던가. 조립 생산을 하면서 부품 하나하나를 역설계하더니, 결국 한국형 그랜저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이 모델부터였다.

시혁이 죽던 2022년 당시에도 희귀하지만 이 차를 운행하는 올드카 매니아가 있었다. 도로에 한번 등장하면 주위 모든 시선을 강탈하는 정말 멋진 차였다.

“옜다, 이놈아.”

“이거, 뭐예요?”

“귀국 기념 선물이다. 우리 현도자동차에서 처음 출시한 V6 3.0 모델 1호차니까, 잘 타고 다녀.”

“돈 없는데…….”

“빌어먹을 놈, 내 비자금을 몽땅 털어간 주제에 돈이 없다고?”

“다 썼죠. 그 돈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턱이 없잖아요.”

“끄응! 내가 재신을 만난 건지, 아니면 재앙을 만난 건지 아직 모르겠다. 하여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도 한국 음식들이 그리울 텐데.”

“소고기?”

“당연하지, 이놈아.”

“에이… 또 국밥?”

“허어, 할애비를 아예 수전노로 만드는 구나. 오늘은 등심으로 사 주마.”

티격태격하지만 둘 다 감개무량한 표정이다. 잠깐 다녀오겠다던 미국행이 거의 1년 반을 넘겼다.

넘겨받은 그랜저 키에서 정 회장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 키를 주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쥐고 있었는지 알겠다. 참 기묘한 인연이다.

“아… 불안하게 하필 여기 타 가지고 잔소리를 늘어놓으세요?”

“끼어들기 전에 먼저 깜빡이를 켜 줘야 되는 거야. 이놈이 양코배기 운전을 배워서 큰일이네. 안전거리 유지하고!”

“좀 가만히 계시면 안 될까요?”

“비켜 줘라. 뒤에 쓰레기 같은 차가 계속 빵빵거리잖냐?”

큭큭큭, 대오자동차의 로얄 살롱을 쓰레기라고 가차없이 깎아 내리는 저 옹심.

대오그룹의 김오중 회장에 대해 정조영 회장의 평은 과히 좋지 못했다.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장사를 한다고 신랄한 비난을 퍼붓곤 했었다. 그 대오자동차가 출시한 로얄 시리즈는 그랜저가 나오기 전까지는 최고급 승용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랜저가 나오자마자 완전히 개처발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오자동차는 그 뒤로 한 번도 현도자동차를 역전해 본 적이 없었다.

김오중 회장과 정조영 회장은 만나면 서로 부딪쳤다. 거기다 공격적인 경영을 추구한 대오그룹의 김오중 회장은 현도그룹의 기술 우선 정책을 비웃었다.

-기술은 필요하면 사 오는 거지. 거기에 막대한 개발비를 들이는 짓은 하수가 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 들은 정조영 회장이 임원 회의 중에 불같이 화를 내며 던진 말은 양 그룹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물며 작은 식당을 하는 아줌마도 자기만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자체적인 기술이 없는 사업은 장사치에 불과하다. 우린 무조건 R&D에 뼈를 갈아 넣어.

경쟁심이 활활 타오를 수밖에.

“천천히 먹어라, 꼭꼭 씹어야지.”

“할아버지도 드세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이놈아.”

“…….”

한눈에 봐도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 시쳇말로 폭싹 늙어 버렸다.

벌써 칠십 대 중반이지만, 건강에 대해서는 철저할 정도로 관리하는 양반 아니던가?

배도 부르지 않는 연기를 먹으려고 돈을 쓴다며 평생 담배도 피지 않은 분이다. 하지만 강원도 인제에서 600년 묵은 산삼이 나오자 단숨에 달려가 8천만 원(당시 은마 아파트 3채)을 주고 그 자리에서 다 씹어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왠지 축 처진 모양을 보자니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아쉬우세요?”

“…….”

“할아버지, 혼자만 생각한다면 도전하세요. 평생 소원이 대통령이라는데 한이 맺히지 않도록요.”

“네 말이 아리송하구나.”

“할아버지의 그 판단으로 인해서 현도그룹이 겪게 될 고충과 자제분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말리는 겁니다. 이젠 혼자가 아니시잖아요?”

“시혁아, 할애비가 대충 계산을 해 보니까 우리 현도그룹 임직원들과 계열사들 그리고 거기에 딸린 식구들만 계산해도 몇 백만이다. 또 나랑 친한 재벌들 몇 명만 끌어들이면… 그래도 안 될까?”

“그래서 더 안 됩니다. 정치를 왜 생물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정치는 생물이다?”

“예, 변화무쌍하기 때문이죠. 어디로 튈지 모르고, 너무 복잡하면서 인간의 욕망이 얽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이건 단순 계산으로 판가름 나는 판이 아니에요.”

“…….”

“오늘 힘이 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절대, 절대 안 됩니다. 할아버지 삶에 대통령과 정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할 수 없다. 포기시키려면 약간의 협박과 신기를 가장한 말뚝을 박아야 한다. 이 고집을 꺾지 못하면… 필패다. 현도그룹은 한없이 추락한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노후가 너무 힘들어진다.

“김양삼 총재와는 밥이라도 따로 하셨어요?”

“진짜 그 양반이 될까?”

“곧 정치권이 요동칠 겁니다. 두고 보세요. 노태후 대통령을 물태후라고 쉽게 말하지만, 아닙니다. 군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정치인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자질과 강단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 속고 있는 거예요.”

“대통령에게 무슨 말이라도 전해 들은 거냐?”

“이제 귀국했는데 그럴 틈이 어디 있어요?”

전해 들은 게 아니라, 전해야 할 모양입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가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래도 살짝 숟가락을 얹어야 할 필요는 있겠네요, 할아버지를 포기시키기 위해서라도.

“아 참! 이 음흉한 놈, 최근에 알았다.”

“또 뭔데요?”

“분당에 땅은 언제 쓸어 담았누?”

하이고, 정보가 늦으셨네요. 거긴 내 인삼 밭 된지 오래됐어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전에 올림픽 휘장 사업할 때, 성남시가 예산이 없어서 그냥 개도 안 물어갈 그린벨트로 대신 받은 겁니다. 그런데 분당 땅은 왜요?”

“네놈 뱃속에 얼마나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지 봐야 하는데… 에잉.”

“거기 그린벨트가 풀린데요?”

“이놈아, 모른 척하지 마. 한 달 전에 신도시 확정 발표가 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랴부랴 토지 주인을 찾았다만… 노른자위 그린벨트를 어떤 고약한 놈이 다 차고 앉아 버렸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신기하네. 나도 서현동과 정자동에 그린벨트가 아주 쪼오끔 있는데.”

“야! 이 똥물에 튀길 놈아. 그때 할애비도 끼워 줬어야지. 혼자 다 처먹냐?”

“그때는 정 회장님이셨는데요?”

“…그랬어? 그땐 할아버지가 아니었구나.”

난리가 나긴 했나 보다. 도대체 얼마나 올랐기에?

“오천 평만 내 놔라.”

“오 대 오!”

“뭘 할 건지 알고 바로 칼이 들어와?”

“삼성동처럼 49%로 가죠.”

“도둑놈!”

“당연하죠. 상업지역으로 고시될 게 뻔하고, 거기가 분당 중심가로 탈바꿈할 자린데.”

“도대체 어디에 얼마나 깔고 앉은 거냐?

“여기 있어요. 맘껏 보세요.”

노란색 봉투에는 빨간 매직으로 ‘열면 죽인다’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박하송이 태식에게 받아서 확인한 후 미국으로 보낸 토지 등기부 등본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전부… 네 땅이라고?”

“예, 정확히는 K 글로벌 코리아 주식회사 땅이죠.”

“네놈이 지분 100%를 가지고 있으면 네 땅인 거지.”

“하여튼, 지방에 있는 땅은 빼고, 경기도 일대만 따로 추린 겁니다.”

“네 몸주(身主)… 정말 대단한 재신이다. 이렇게 족집게로 찍어 주니 안 믿을 수 없구나.”

‘아, 아니거든요. 몸주가 어디있다고. 그저 다시 살고 있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요.’

“이제 일말의 의심도 안 하마. 무조건 네 말대로 해야겠다.”

“믿어 주셔서 다행입니다, 할아버지.”

“응, 앞으로 정치 쪽은 생각도 하지 않으마, 고맙다. 그런데 말이다.”

“……?”

“여기 땅 중에 판교 쪽 십만 평은 왜 받은 게냐?”

“음… 할아버지, 땅을 볼 때 어떤 부분을 먼저 보십니까?”

“묻는 말에 대꾸는 하지 않고 왠 질문질이야? 그야 앞으로 개발될 소지가 있는지, 주변 환경은 어떤지, 법적 제재가 있다면 풀릴 가능성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보는 게지.”

“아뇨, 그러면 늦어요. 땅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거죠.”

“그게 뭔 소리야?”

“우리나라도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이라는 곳으로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죠. 서울이 좁다고 느끼는 건 시간문제예요. 터질 듯한 사람들을 수용하려면 서울에 고층으로 건물을 올리던가, 주변에 새로운 신도시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강남이 그랬고요. 이젠 분당으로 사람이 움직인 겁니다, 가까우니까.”

“이해는 하겠다만, 판교는 분당과 달라. 너무 낙후된 곳이란 말이다.”

“첫째, 서울의 중심은 강남이다. 이건 이미 굳어졌어요. 둘째, 사람은 더 몰릴 것이다. 그 수요는 분당으로 감당이 안 된다. 셋째, 강남을 기점으로 일직선을 그어 보면…….”

“꿀꺽!”

“분당보다 판교가 훨씬 더 뜹니다. 시차는 조금 있겠지만요. 마지막으로 넷째, 낙후되었다는 말은 토지 가격이 싸다는 말과 통하거든요. 더 좋죠. 국가 입장에서는 보상액이 덜 나가도 되니까.”

정조영의 침 삼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얼마나 걸릴까? 여기 판교로 불이 번지려면?”

“장담하는데, 15년을 넘지 않을 겁니다.”

“2004년?”

정조영은 두 손을 탁자에 짚더니 시혁에게 머리를 디밀었다.

“나는 이 땅을 가지고 싶구나. 성희에게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었는데, 이걸 주면 딱이겠다. 팔래?”

“서현동 백화점은요?”

“그건 그대로 짓고.”

삼송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서현동에 현도백화점을 꼭 올리고 싶었다. 시혁이 선점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는 삼송플라자가 들어서는 곳이었으니까.

흠… 솔직히 돈은 문제가 아니다. 현도백화점의 지분 49%를 갖게 되겠지만 시혁에게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정조영 회장과 딜을 했던 것은 유흥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살면서 정조영만큼 정으로 다가와 준 기업인은 없었다. 지금은 정말 할아버지 같은 느낌까지 받는 사람 아닌가.

“판교가 개발되기 시작하면 아마 한 평당 수천만 원을 줘도 못 살 겁니다.”

“도둑놈아, 그렇다고 지금 수천만 원씩 주고 그 땅을 살 수는 없지 않냐?”

“에이… 씨. 그냥 그렇다고요. 십만 평 중에서 절반, 오만 평 그냥 드릴게요.”

“……!”

“싫으면 말고.”

“너처럼 계산 지독한 놈이 그냥… 준다고? 오만 평을?”

“예, 성희 씨에게 준다니 돈을 받기 그러네요. 제가 선물하는 것으로 하죠, 뭐.”

멍한 모양이다. 지금껏 시혁은 정조영 회장과 비즈니스를 할 때면 양보하는 경우가 없었다.

“네 말이 맞다면… 아니, 맞겠지, 너니까. 하여튼 수천억에서 수조 원이 될 수도 있는 땅을 그냥 준다고?”

“할아버지, 거래로 접근한다면 저는 한 평도 안 팔아요. 거기는 정말 핵폭탄이 터지는 곳이거든요. 하지만 선물을 돈 받고 줄 수 없잖아요. 이건 제 마음으로 알아주세요. 그동안 순대랑 떡볶이 얻어먹은 값으로 치고.”

“너… 혹시 성희에게 생각 있냐? 바로 신방 차려 주리?”

“씨, 안 줘. 취소!”

그런 거다. 돈의 가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시혁과 정조영은 이미 돈으로 가치를 먹일 단계를 훌쩍 넘었다.

시혁의 씩씩거리는 표정과 달리 정조영은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었다.

‘하아! 이놈을 어떻게든 엮어서 내 식구로 만들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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