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67화 (67/150)

67화 그리운 집으로

청와대로 그랜저가 도착하자 즉시 문이 열렸다. 평소대로 하자면 그랜저는 철저한 검색을 받고, 경호처 요원이 운전해서 지정된 주차구역까지 가도록 되어 있었지만, 웬일인지 너무 쉽게 개방된 것이다.

청와대 정문은 주로 장관급 이상이 출입할 때 열린다. 외국 귀빈이 아닌 이상 차관도 정문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없다, 절대.

“경호관님, 등록된 차가 아니지 말입니다.”

“임마, 잘 봐 둬라. 대통령 각하와 직계 가족들 그리고 저 차에 탄 사람 머리카락만 보여도 문 열어. 1초라도 지체하면 너는 바로 일선 파출소로 가는 거야. 알아?”

“…도대체 누구길래? 겁나지 말입니다.”

“시끄러, 시키는 대로 해. 총리나 장관들보다 훨씬 위에 있는 분이라는 것만 명심하고.”

“…너무 젊지 말입니다. 거의 제 나이 또래 정도지 말입니다.”

“응, 그럴걸? 그런데 말이다. 너나 나 같은 졸자들 정도는 입김만 불어도… 아니다, 그냥 째려만 봐도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가는 수가 있어. 그런 분이다, 저분이.”

청와대 외곽을 담당하는 101 경비단의 신참 경찰은 대통령의 숙소인 사저까지 바로 올라가는 차를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까라면 까야지. 그러나 정문을 담당한 경호관은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도대체 누구길래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청와대를 무사통과할 수 있는 것일까?

“꺄악! 오빠!”

“야, 야. 다쳐. 오빠 허리 나가겠다.”

미친 듯 뛰어와 펄쩍 안기는 긴 생머리의 소녀, 노예지다. 시혁은 부끄러웠다. 전처럼 어린애 취급하기엔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었다.

“어서 와, 시혁아. 더 멋있어진 것 같다. 눈이 호강하네.”

“아! 안녕하십니까? 영부인님.”

“어머, 너 왜 그러니? 전처럼 그냥 어머님이라고 불러 주면 안 될까?”

여전히 푼수데기 아줌마 그대로인 김옥순 여사. 외부에서 보는 것과 실제 모습이 너무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는 푸근한 행동은 시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제 귀국하고 바로 들르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께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괜찮아, 예지 아빠보다 우리가 더 보고 싶었단다. 들어가자. 오늘 음식 남기면 안 돼, 예지랑 내가 직접 만들었거든.”

솔직히 그건… 조금 그렇습니다. 노태후가 극찬했던 것에 비하면 미원과 다시다로 맛을 내는 게 사모님 주특기 아닙니까? 거기다 예지는 아예 라면 스프까지 들이붓는 거 다 알거든요.

“오호호! 오빠, 내가 요즘 요리 학원 다녀. 거기 선생님한테 특별 레슨 받았거든. 잘했지?”

음… 레슨은 발레나 음악 아니면 골프 같은 걸 배울 때 쓰는 말 같은데, 하여튼 배웠다 이거지? 배운다고 다 되면 세상에 달인이 넘쳐야 정상 아니겠니?

일단 먹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완전히 날개를 달았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그게 운으로 되는 일인가? 너 아니면 누구도 불가능했어.”

“…네.”

“덕분에 내가 빛이 났다. 부시 대통령과 수시로 통화하는 유일한 지도자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사실이기도 하고.”

“상남자라 화끈합니다. 우리 나라에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응, 정말 놀랐다. 그 약세를 뒤집고 진짜 당선되다니……. 네 말을 듣지 않고 두카키스에게 올인 했다면, 끔찍한 보복을 당했을 거다.”

“네. 믿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혁아, 과공은 비례라는 말이 있지 않더냐? 네가 대한민국을 살렸어. 밤 사이 그런 배팅을 했을 줄 몰랐다. 고맙구나.”

“…….”

“1억 달러면 엄청난 돈이다. 네가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모양이다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갚아야 할 빚이 아닌가 싶은데… 뚜렷한 방법이 없다.”

“아닙니다. 저도 그 배팅으로 부시라는 배경을 얻지 않았습니까? 각하와 대한민국을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제 나름대로의 계산도 있었습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허어, 이런 사람 봤나. 1억 달러면 한화로 700억이다. 자동차 수만 대를 수출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야. 마냥 던질 수 있는 돈이 아냐.”

“각하, 한 달에 오십만 원을 버는 직장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경우에 십만 원을 적금하려면 고민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억 원을 버는 사업가는 십만 원도 적금하지 않습니다. 그 돈을 굴리면 얼마나 더 큰 대가가 나온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지금 현재 가진 자산이 백억 달러가 넘습니다. 일억 달러를 배팅하면서 잠시 계산을 해 봤습니다. 이 돈을 던져서 앞으로 얼마나 벌 수 있을까?”

“…….”

“적어도 저는 몇 천억 달러를 미국에서 벌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겁니다. 순수하게 각하를 돕기 위해 던진 돈이 아닙니다. 그러니 편하게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무서운 놈이다. 막 만점을 받았을 때, 청와대로 불러 면담할 당시의 그 어린애가 어느새 이렇게 성장했다.

물론, 현도의 정조영 회장이나 삼송의 이건호 회장, 또 대오의 김오중 회장이 더 많은 재산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놈은 조직이나 기업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홀로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어떤 기업 총수들도 이런 압박감을 주는 존재는 없었다.

노태후는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혔다. 대통령이라는 신분은 이놈에게 아무런 힘을 발휘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벌써 이놈은 완성되었다.

식탁에 같이 있던 김옥순 여사와 예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백억 달러?

미국 대통령에게 일억 달러를 배팅했다고?

미국에서 수천억 달러를 더 벌어?

“그럼, 지금 오빠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란 말이야?”

“아냐, 예지야. 오빠는 현도나 삼송 같은 대그룹 회장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 할아버지들은 다 회사가 돈이 많은 거잖아? 오빠는 개인이고.”

“…꼭 따지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그래도 아직 멀었어.”

“씨! 아빠, 보라고. 전에 내가 일억 원 투자했으면 나도 오빠 덕분에 부자 됐을 거잖아? 아빠가 말려서 못했거든? 물어 내!”

얘기가 또 그리 튀냐? 좀 진정하면 안 되겠니? 더 커지기 전에 화제를 돌려야 한다. 이 떼쟁이가 설치기 시작하면 오늘 해야 할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난장판이 된다.

“너, 요리 레슨 받는 곳이 어딘데?”

“응? 맛있지? 저기 삼청동에 가면 유명한 중국집이 있어. 거기 주방장님한테 배우고 있지. 헤헤헤.”

“주방장님이 미원 많이 넣으라고 하든?”

“당연하지. 음식 맛은 미원을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던데? 그래도 이상하면 라면 스프 있잖아? 이게 직빵이라고 하셨어.”

“청와대에도 일급 요리사가 있을 텐데, 왜?”

“응, 청와대 주방 아저씨 요리는 맛이 너무 심심해. 거기 중국집이 짱이야.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다니깐.”

충분히 감 잡았다. 예지야, 손님을 부르는 맛의 비밀은 미원… 이었구나. 에고에고.

* * *

“예지 커피는 변함이 없네요.”

“설탕을 조금 줄여 달라고 사정했더니 더 타더라. 그냥 포기하고 마시다 보니 이젠 입이 맞춰져 버렸다.”

“커피 향은 안 나고 단내만 가득합니다.”

“참고 마셔라, 만약에 들으면 보복당한다.”

겨우 서재에 마주 앉은 시혁과 노태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예지 때문에 둘의 인연이 맺어질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면 이 설탕 범벅 커피도 맛있다.

“국내 정세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여소야대의 정국을 헤쳐 나가기 쉽지 않구나.”

“여대야소를 만들면 되죠.”

“……!”

“김양삼 총재와 김중필 총재를 끌어안으십시오. 그분들이라면 응할 겁니다.”

“김다중 총재는?”

“일단 제안은 하셔야겠지만, 그분 성향상 절대 응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당 합당이라… 절묘한 수이긴 하다만 잘될까?”

“야합이라고 비난이 거세겠지만,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북방 외교도 한결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시고요.”

“과연 소련이라는 강력한 연방이 무너질까?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나 혼자 설쳤다고 엄청난 후폭풍을 뒤집어쓸 텐데.”

“이 년 안에 끝납니다.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 역할을 끝냈습니다. 내부에서 무너집니다. 경제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나라는 아무리 땅덩어리가 커도 버티질 못합니다.”

“미국의 생각은 어떠냐?”

“가일층 밀어붙일 겁니다. 이미 동구권 상당수 국가들이 미국 쪽으로 붙었습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독일이 해 줄 것이고요.”

“설마… 동독과 서독이?”

“예, 필연적으로 독일이 하나로 합치게 될 것이고, 이게 기폭제가 되어서 소련 연방은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걱정 마시고 북방 외교에 집중하셔야 대한민국이 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흠… 네가 그렇다면 맞겠지. 알겠다. 항상 신세만 지는구나.”

“아닙니다. 비록 돈은 세계를 상대로 벌지만, 제 정체성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오오오! 그래.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다. 나는 네가 양키 시민권을 받을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가 태어나고, 제 아버지가 있는 곳인데요.”

“스님은 몇 번을 초청해도 다 거절하시더라. 섭섭하게스리.”

“하하하. 우리 아버지가 좀 그래요. 더 나이 드시면 그냥 바랑 하나 메고 떠나겠다는 분이거든요.”

“음. 이 시대의 진정한 고승이시다. 나중에 시간내서 한번 찾아뵙고 싶은 분이다.”

“그건…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 * *

귀국하고 아직 불광 자비사를 가 보지 못했다. 마음은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었지만, 너무 바빴다.

절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시혁은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주차장에 서 있는 낡은 봉고 트럭. 전에는 공 처사가 몰았지만, 보나마나 아버지가 직접 운전하고 다닐 저 트럭.

땡초 같으니… 돈도 여유 있게 드렸는데 차부터 새 걸로 좀 바꾸지.

산 중턱에 자리잡은 불광 자비사의 처마에 매달린 물고기 풍경(風磬)이 청아하게 댕댕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정진하라는 뜻과 목재로 지어진 산사에 화재가 없기를 바라는 뜻이 숨어 있는 물고기 풍경이 제일 먼저 시혁을 반겨 주었다.

시혁은 단숨에 요사채(승려의 방)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텅 빈 방.

변함없는 방 안 모습. 한쪽에 정갈하게 놓인 이불, 벽에 걸린 승려복 한 벌과 낡은 바랑, 방 한가운데 놓인 다리 부러진 개다리 소반.

괜히 화가 치솟았다. 저 궁상!

전에 없던 아이들 놀이터가 보육원 중간에 떡하니 있는 것을 보자니 더 화가 났다.

좀 바꾸지. 좀 사지. 고집만 가득한 땡초 같으니.

“아들! 왔냐? 들어가지 뭐 하고 있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마치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하는 말투. 바구니에 감자를 가득 들고 있다.

“나… 그냥 갈래!”

“이 자슥이, 왜 심통을 부리고 지랄이여? 어여 들어가, 애비 힘들다.”

“왜 방구석 꼬라지가 저 모양이냐고?”

그제서야 환하게 웃는다, 왜 시혁이 화를 내는지 알았다는 표정으로.

“사람은 변하면 죽는 거여, 나는 저게 편해.”

“아니… 하다못해 청테이프 칭칭 감은 개다리 소반이라도 새로 사든가?”

“허허허, 나 혼자 사는 방에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 대신 애들 놀이터랑 숙소랑 다 새로 해 줬으면 된 게지.”

“내가 와도 잘 방이 없잖아?”

“원 자식이 쓸데없는 심통을 부리고 난리네. 너는 애비랑 같이 자면 되잖여?”

시혁은 허리가 굽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작은 몸을 덥썩 안았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나 왔어. 나 왔다고.”

“그려그려. 내 새끼, 밥은 먹었고?”

“응, 밥 먹고 왔어. 청와대 들렀다 왔거든.”

“그래? 요즘 왜 그 과자는 안 보낸다니? 그 양반이 출세하더니 사람이 변했나벼, 몹쓸 사람일세.”

“……!”

“괜스레 오라 가라 하지 말고, 과자나 잊지 말고 챙겨 보낼 것이지… 원 참!”

빨리 조용히 알려 줘야겠다, 아버지 뒤끝 장난 아닌데. 아버지한테는 대통령을 만나는 것보다 단 과자가 더 중요한 걸 깜빡 잊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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