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K 타워와 박하송
자그마치 66층. 지하 3층까지 포함하면 69층으로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층 빌딩이 웅장한 모습으로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부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싣고 연신 차들이 들락거리고, 수많은 작업자가 개미처럼 붙어 마무리를 하고 있는 모습. 장관이다.
출입구를 관리하는 경비실에는 다섯 명의 요원이 출입하는 차와 자재, 사람들을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김보성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왼쪽 소매에 차고 있는 완장을 조심스레 휴지로 닦았다.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실로 새겨진 반장이라는 글자가 김보성은 너무 뿌듯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에 자신을 가지지 못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이 허송세월을 하다가 무작정 입대를 했었다, 그것도 극강의 훈련을 견뎌야 하는 해병대로 자원해서. 일종의 도피였던 셈이었다.
다행히 군대는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따지지 않았다. 타고난 근력과 힘에 집중력까지 더해지자 최고의 군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자신도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고 부사관으로 말뚝을 박았다.
그냥저냥 여기서 정년 때까지 근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외출 중에 으슥한 골목길에서 비명 소리를 듣고 지나칠 수 없었던 김보성은 사건에 휘말려 버렸다.
동네 깡패들에게 희롱당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가 버린 것이다. 세 놈을 잘근잘근 밟은 후에야 아차 싶었다. 희롱을 당하던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현장에는 다져진 고깃덩어리 세 놈과 자신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명예 제대를 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육군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고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채.
그렇게 경기도 이천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모아 놓은 돈도 없었다. 수중에는 달랑 만 원짜리 다섯 장.
아무리 싼 여인숙에 묵는다 해도 봄눈 녹듯 없어질 돈이다. 할 수 없이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일터를 찾아야 하는 신세지만… 누가?
다시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막노동 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공사장에 무작정 찾아갔었다.
마침 점심시간, 일꾼들은 함바식당으로 가 버리고 현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 공사장의 한 편에 쭈그리고 있는 이상한 어린 놈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오백 원 있어요?”
“…….”
“오백 원짜리 동전 있으면 하나 줄래요? 배가 고파서 그래요.”
세상에, 나보다 더 거지새끼가 있었다니, 서울 한복판에.
“배고파?”
“예, 짜장면이나 한 그릇 먹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생긴 건 말짱한 놈이 어쩌다 그렇게 됐냐?”
“흐흐흐, 살다 보니 밥 사 주는 사람도 없고.”
“…오백 원만 있으면 돼?”
“아뇨, 아저씨가 오백 원 주면, 또 다른 사람에게 백 원을 더 얻어야죠, 짜장면 먹으려면.”
“너도 참 딱하다, 아예 육백 원을 달라고 할 일이지.”
“아저씨, 제가 다년간 터득한 비법인데요. 처음부터 육백 원을 부르면 절대 안 줘요. 꺼내기 쉬운 금액인 오백 원을 먼저 얻고 나서, 다시 백 원을 구하는 것은 쉽거든요.”
“그래? 일리는 있는 말이다만, 왜 젊은 몸뚱이 놔두고 구걸하니? 여기 공사장에서 등짐만 날라도 밥값은 벌 텐데.”
“아이고, 제 몸 보세요. 이거 전부 두부살이거든요. 그리고 하체가 새 다리처럼 가늘어서 노가다도 안 시켜 줘요.”
김보성이 보기에도 그렇다. 상체는 고도 비만인데 하체는 쇠꼬챙이처럼 말랐다. 어찌 된 놈이… 쯧쯧쯧!
“알았다. 여기 천 원 줄 테니, 남는 건 또 저녁 때 보태서 밥 사 먹으렴.”
“오! 대박! 천 원 주는 사람 진짜 오랜만에 본다. 고맙습니다.”
“밥 굶지 말고,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게 배고픈 거다.”
“아저씨, 나한테 원래 오백 원이 있었거든요. 우리 같이 짜장면 먹지 않을래요? 제가 살게요.”
그렇게 천 원을 뜯긴 김보성은 누가 사는지 아리송한 짜장면을 먹었다. 오 분도 걸리지 않을 짜장면을 먹는 동안, 왜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주절거렸나 보다, 세상을 한탄하면서.
“아저씨, 그럼 쌈은 잘하겠네요?”
“쌈이라고 하긴 그렇다만,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서 피눈물 나도록 익힌 게 그런 거니까, 대여섯 명 찜 쪄 먹을 정도는 되지.”
“우와! 대단하다. 나는 쌈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더라. 그런데 그 정도 실력이 있는데, 왜 노가다를 해요?”
“임마, 나 같은 전과자에 배운 것 없는 사람이 할 게 달리 있냐? 노가다도 기술이 없으니 등짐이라도 날라야지. 당장 먹고 잘 곳을 찾으려면 도리가 없구나.”
“차라리 경비를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겠는데요?”
“아서라. 경비는 시설물을 지키는 게 본업이다. 전과자에게 누가 신원보증을 해 준다더냐? 도리어 도둑이라고 오해나 안 받으면 다행이지. 하하하.”
“그래요? 내가 해 주면 되겠네.”
“…네가 무슨 재주로? 너도 구걸로 먹고 사는 놈이.”
마침,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깜짝 놀랐다는 듯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 총괄님. 오늘도 짜장면이십니까? 물리지도 않나 봅니다.”
“아! 소장님, 점심이 늦었네요?”
“네, 꼭대기 층 마무리 공사가 제일 급하다고 하셔서 인테리어 업체와 미팅 마치고, 시간이 간당간당하기에 대충 때우려고 왔습니다.”
“잘됐네요. 여기 이분 있잖아요. 제가 아는 형님인데 정문 경비실에 일하도록 해 주실 수 있죠? 신원보증은 제가 할 테니까.”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오후부터 일하고 이력서랑 주민등록 등‧초본만 내일 제출하면 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형님, 이름이 어떻게 되요?”
“…….”
“저… 총괄님, 아는 형님이라면서 이름도 모르십니까?”
“소장님, 십 년을 알아도 데면데면한 관계가 있는 반면, 십 분을 만나도 형제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름이야 이제 알면 되는 것이죠.”
그렇게 천운으로 일하게 된 직장이다. 몇 번 숨어든 도둑을 피떡으로 만들었더니 어느새 반장 완장까지 차게 되었다. 군 시절보다 월급도 더 많이 받는다. 얼마 전까지 경비실 한 편에서 야전 침대를 깔아 놓고 생활하다가 착실히 저축한 월급을 털어 작은 월세로 옮겼다.
사람답게 살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오백 원만 달라던 거지새끼, 아니다. 알고 보니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올리는 회사의 총괄이었다.
그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것도 불가능한, 한마디로 이 현장의 최고위직 책임자였던 것이다.
김보성에게 박하송은 은인이었다. 스치는 작은 인연을 무시하지 않고 선뜻 나서서 취직에 신원보증까지 해 준 은인.
그를 위해서라면 끓는 기름을 안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김보성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김보성이 정문을 차고 앉은 이후로 만성적인 인부들의 잔 도둑질이 사라졌다. 비싼 구리나 철근을 적당히 토막 내서 팔아먹던 관행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현장에 입‧출고되는 모든 자재는 철저히 검사를 받았다. 마치 군부대 위병소처럼 들어올 때와 나갈 때는 정문 경비실의 삼엄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 뒤로 군을 제대하고 빈둥거리던 후배 몇 명을 더 영입해서 현장 경비를 보강한 뒤, 철옹성을 만들었다.
마침, 정문으로 그랜저 한 대가 접근하자, 모자를 고쳐 쓴 김보성은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현장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엥? 코쟁이다. 젠장… 영어는 진짜 젬병인데.
“고생하십니다. 박하송 총괄을 만나러 왔는데 연락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잘생긴 청년이 말을 한다. 한국 사람이다.
“네, 연락은 바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현장에는 작업과 관련된 차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저기 외부 주차장에 주차하시고 방문일지를 작성해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흔쾌히 대답을 한 청년이 먼저 내리고, 코쟁이 기사는 차를 주차한 후 성큼성큼 다가왔다.
김보성은 그 순간 온몸의 털이 올올이 서는 섬뜩한 느낌에 한 발 물러났다. 식은땀이 또르륵 흘러 목덜미를 적셨다.
살면서, 설사 군대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격한 긴장감.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X발, 어떻게 된 놈이냐? 피 냄새가 이토록 진하게 나는 놈이 왜 여기서 나와?’
김보성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곤봉을 움켜쥐었다. 그럼에도 상대방 코쟁이는 담담히 청년의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김보성은 전신이 뱀에게 칭칭 감긴 것처럼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하하하. 긴장 푸세요. 하송이가 좋은 분을 얻었네요.”
“누구십니까?”
“여기 주인인데요?”
“미안하지만 신분이 확인되기 전까지 여기서 꼼짝하지 마십시오.”
“그쪽 분 성함이… 아, 명찰에 있군요. 김보성 반장님. 제 수행원에게 뭔가 느낀 모양인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여기 주인이에요.”
“나는 그런 거 모릅니다. 총괄님에게 어떤 목적으로 오셨는지 확인되기 전에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흠, 이해가 된다. 맹수끼리는 서로 살기를 감지할 수 있는 법이다. 윌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를 이 사람이 감지한 것이다. 우직한 사내다, 충성스럽고.
어쩔 수 없이 시혁은 모토롤라 폴더폰을 꺼내 박하송에게 삐삐를 쳐야 했다.
이 새끼, 핸드폰을 살 것이지, 돈도 많은 새끼가.
하긴, 오로지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밖에 없는 전화기를 150만 원씩 주고 사기에는 아직 시대가 이르다. 2022년으로 환산하면 전화기 한 대에 1,300만 원 이상을 줘야 한다는 소리다. 모토롤라에서 희대의 베스트셀러 스타텍이 나오기 한참 전이다.
이윽고 박하송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저 새 다리, 육중한 상체를 지탱하느라 고생한다.
“어, 언, 언제 왔어?”
“거지새끼, 잘 있었어?”
“온다고 말이라도 하지. 현수막도 걸고, 사람들 일렬로 도열시키고, 또 뭐냐? 거 예쁜 행사 도우미 불러서 꽃다발도 목에 걸어 주고 할 거 아냐? 새끼야.”
말은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힘차게 끌어안는 두 친구. 한국대학교에서 유일하게 정을 준 친구다. 술독에 빠트려 억지로 노예 계약을 맺었던 동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증권사의 전설 백 할머니의 손자, 박하송.
“들어가자. 안 그래도 66층 팬트하우스 공사 거의 끝나간다.”
“하송아, 여기 경비 반장님에게 내 신분 확인 좀 부탁한다.”
“응? 아! 반장님, 이 썩을 놈이 빌딩 주인이에요, 회사 회장님이기도 하고.”
오해는 풀렸지만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김보성 반장, 그에 반해 윌슨은 여유자적하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수행원이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김 반장님, 비슷한 과 같은데요? 인사들 하시죠. 여기는 미스터 윌슨, 이쪽은 미스터 킴.”
그제서야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었다. 김보성은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이 코쟁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굳이 겨뤄 보지 않아도 나오는 견적, 적어도 두어 수는 윗길이다.
“서열이 정리된 것 같은데, 이제 들어가도 되죠? 김 반장님.”
“헉! 회장님, 제가 무례했습니다. 들어 가십시오.”
괜찮은 사내네, 깨끗이 인정할 줄도 안다. 남자다.
아직 보호 필름도 떼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탄 뒤 시혁이 물었다.
“야! 저런 인재를 어디서 스카웃 했어? 멋진데?”
“응, 오백 원으로.”
“이 새끼,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더 알면 다친다.”
“너, 지금도 오백 원 구걸하고 다닌다며?”
“누가 그래? 손 뗀지 오래 됐다.”
“이 새끼, 예지만 보면 손 내민다고 들었거든?”
“걔는 부자잖아.”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도착한 66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중앙 홀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시혁은 말문을 잃었다.
눈앞에 진짜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