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쇼핑 바구니 채우기
“불가능합니다.”
“응, 가능해.”
“정부에서 승인하지 않을 거란 말이오.”
“응, 정부 승인 상관없어.”
“…….”
“당신이 장악하고 있는 연금 관리 공단의 주식, 그것만 넘겨주면 돼.”
“……!”
“놀랐지? 공단의 보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 몽땅 당신에게 있잖아? 당신 사인만 있으면 30%는 당장이라도 넘어와. 물론, 공단 이사장의 동의서는 필요하지. 당신 친동생인데 설득되지 않겠어?”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응, 당신은 최소 10년 이내에 대만 땅을 못 밟아. 아까 그 오 소장이라는 인간을 믿나? 지금쯤 윌슨에게 열 살적 동생 눈깔사탕 뺏어 먹은 것까지 다 토해 냈을걸?”
“어차피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TSMD, 이토록 탐을 내는 이유가 뭡니까?”
“내 맘속까지 들여다볼 생각하지 마.”
“한국의 삼송전자로 착각한 건 아닌지 정말 궁금합니다.”
알아, 한국의 삼송전자가 얼마나 훌륭한 회사인지.
미래에는 이 회사 덕분에 국뽕에 취하고, 자존감도 높아지고,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잘 알지.
그런데 그 위대한 삼송전자보다 당신 회사가 더 잘나가게 되거든. 솔직히 대만을 거의 먹여 살리는 회사가, 바로 당신이 세운 TSMD야. 아마 지금 당신으로서는 상상 못 할걸?
“이봐, 창 박사. 나는 당신의 목표와 지향점을 잘 알아. TSMD는 온리 파운드리, 절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신념도 잘 알지.”
“그렇소, 삼송처럼 반도체를 처음부터 설계하고 생산하겠다는 원대한 꿈 따위 없는, 일개 하청 회사를 왜 노리는 겁니까?”
“오케이, 그리 생각하면 잘됐네. 그냥 넘겨. 내가 공짜로 단물을 빨자는 게 아냐. 현재 휴지조각에 불과한 TSMD 주식 가격, 제대로 지급한다니까?”
“…….”
“협박이 아냐, 나는 당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맞다고 생각해. 언젠가 그런 세상이 오겠지. 그래서 미리 선점하는 투자자로 보면 돼. 복잡하게 짱구 굴리지 마.”
“…알겠소. 연금 관리 공단의 주식 30%만 넘겨주면 됩니까?”
“아니, 당신이 공로주로 받은 10%도 넘겨. 그건 두 배로 쳐 주지.”
끝내준다. 마지막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는 시혁. 아니까 그렇다. 겨우 하청 업체라고 하지만, 이 회사가 미래에 얼마나 엄청난 공룡으로 성장하는지 안다.
TSMD를 등에 업은 콩알만 한 섬나라 대만이 한국 증시를 추월하게 되고, 그때는 한 주 사기 어렵게 된다는 것도.
무조건 먹어야지, 아직 세상이 모를 때, 공룡 알이 부화하지 않았을 때.
내 지론이 그래. 30% 이전에 들어간다. 80%일 때 들어가 봐야 꿀을 못 빨거든. 그런데 너희는 아직 10%도 안 됐단 말이지. 흐흐흐흐.
“좋으십니까?”
“보여?”
“예, 지금껏 보스가 여러 사업군을 인수하는 걸 봤는데, 이번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웃는 건 처음 봅니다.”
“응, 좋아. 나중에는 6천억 달러를 훌쩍 넘기는 기업을 먹었는데, 말해서 뭐 하나. 또 원수로 생각하는 회사와 경쟁각을 세우는 곳이라 의미가 남달랐어.”
“보스! 원수가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쥐도 새도 모르게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습니다.”
“윌슨, 복수란 말이야. 쉽게 죽여 주는 게 아냐. 상대방이 가장 아끼는 것을 다 뺏는 것, 그 고통스러운 와중에 한 점씩 살을 발라내야 진짜 복수 아닐까?”
“으윽, 저 같은 사람이 들어도 소름 끼칩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고, 쥐새끼는 어떻게 했나?”
“자필로 모든 진술서를 받았습니다. 제가 한국 말을 몰라서 산드라에게 보냈고, 산드라가 한국의 지인 변호사를 통해 완벽하게 체크까지 마쳤습니다.”
“그게 다야?”
“아닙니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사직서를 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만약 어긴다면 이 진술서는 삼송전자 사장실로 날린다는 것을 알겁니다.”
“그래.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는 삼송전자가 망가지면 안 되지. 잘했어, 윌슨.”
도덕을 들먹이면 지금 시혁이 하고 있는 어떤 행위들은 저열한 짓일 수 있다. 상대방의 약점을 악용해 자신의 지배권을 늘리는 것은 명백히 비열한 행위가 맞다.
그러나, 누가 시혁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을까?
시혁이 당했던 한 맺힌 사연을 알고서도 돌을 던질 사람… 있을까?
시혁의 방법은 저열했지만, 과정은 최소한의 격식을 지켰다. 강제로 뺏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당시의 가격을 상회하는 대가만큼은 반드시 지급했다.
그러면서도 삼송의 특급 기밀이 새는 것도 막아 주었다. 삼송 자체를 미워하는 게 아니니까. 위대한 기업의 몰락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이게 시혁의 정의였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겠다. 도덕적 잣대 때문에 망설이지 않겠다. 내가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먹어 주마.’
* * *
“러셀, 한국에는 웬일인가? 올림픽도 예전에 끝났는데?”
“정, 사람을 한 명 찾고 있어. 도와줄 수 있나?”
“누구길래? 혹시 이번에 새로 옮긴 방송국의 오더인가?”
“응, 세세한 사정은 다 말할 수 없지만 꼭 인터뷰를 따고 싶어.”
“이름만 읊어 봐, 대한민국에서 기자가 나서서 못 찾을 사람 없지.”
“마이다스 킴, 아나?”
“한국 이름은?”
“시혁 킴.”
“……!”
순간 파랗게 질린 자산일보의 편집국장 정명진. 러셀 홀스타인은 즉시 이를 간파했다.
“익히 아는 사람이지? 미국에서는 워낙 유명해.”
“난… 몰라.”
“제길, 꼬리 말지 마. 당신 얼굴이 다 말하고 있어.”
“그래도 말 못 해.”
“이봐! 정, 당신 미국 특파원으로 왔을 때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어. 그런데 이렇게 배신 때려?”
“러셀, 우린 좋은 친구야.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부류가 있어. 그 첫 번째가 대통령의 가족들, 두 번째는 최측근, 세 번째 역시 대통령의 주위 사람일세.”
“시혁 킴이 거기 세 가지 중 하나란 말이네?”
“노, 노, 노, 세 가지 전부에 해당되니까 더 문제지. 대통령의 막내 딸이 김시혁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김시혁이 노태후 대통령의 당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묵시적인 팩트, 어떤 권력 기관도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인물이라는 사실… 이게 러셀 자네가 찾는 사람의 정체야.”
“그래서 포기하라고? 나는 기자야.”
“중국이나 소련에서는 공산당이 최고지? 미국에서는 언론이 최고고… 한국에서는 말이야. 대통령이 최고 정점이야. 나는 빼줘.”
러셀 홀스타인은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주고 자리를 떠났다. 병신!
미국에서 접근하려고 무진장 노력했지만 만날 수 없었던 사람. 어쩌면 한국보다 더 심했는지 모른다. 분명히 실체는 있었다.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든 최고의 지략가, 대통령 인수위에서 최고 정책 결정권자로 불리던 복심… 그가 거부하면 정책은 폐기되었고, 그가 오케이 하면 정책은 주요 과제가 되는 게 사실이었다. 또 당시 그가 결정한 정책이 지금 미국 사회를 살찌우고 있다는 믿기 힘든 아이러니.
겨우 21살의 어린 외국인이 미국 정책을 한 손에 쥐락펴락한다는 소문은 기자들을 흥분시키기 충분한 이슈였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와 공식 인터뷰를 따내지 못했던, 흑막 속의 인물이었다. 러셀은 그의 흔적을 쫓다가 한국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더 신비롭게 몸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버렸다. 찾으려고 온갖 라인을 가동하다가 여기까지 왔건만, 또 막히고 말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제 어디를 쑤셔야 꼬리를 잡을 수 있을까?
자산일보의 로비에서 러셀은 멍하니 서 있었다.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의 허탈한 모습이었다.
“CMM의 러셀 홀스타인?”
“…누구요?”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명함.”
잠시 명함을 살피던 러셀은 풀썩 웃었다.
“대사관이라고 쓰고 CIA라고 읽어야 하나?”
“뭐… 맘대로 생각하십시오.”
“어쭈! 대놓고 나오시네. 숨길 마음이 전혀 없다?”
“러셀 기자, 지금 바로 출국하신다면 편안한 일등석을 제공하죠.”
“못 간다면?”
“글쎄… 내 입으로 뭐라 말하기는 그렇군요.”
“협박?”
“천만에, 경고하는 거죠. 국익에 도움 안 되는 기자님의 행동… 위험해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마이다스 킴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 아닌가? CIA가 나서서 기자를 협박할 정도란 말이야?”
“한마디만 하죠. 당신은 알래스카 불곰의 발톱을 깎으려 덤비는 거요. 머리 위에 있는 이빨을 보지 못한 채 말이오.”
“하하하. 나는 기자야. 그런 위험을 즐기는 게 내 직업이라고.”
“위험하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죽여 봐! 나는 매시간 애틀랜타 본사에 위치를 보고한다. 그게 우리 CMM의 모토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는 방송사란 말이야.”
워낙 대차게 들이받으니 난감한 CIA 요원. 공갈 협박이 먹히지 않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비공개 기사화)를 받아들이겠소?”
“……!”
“녹음, 안 되오, 메모도 안 되고. 그리고 기사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각서로 써 주면 내가 마이다스 킴과의 비공식 인터뷰를 주선해 주겠소.”
“빙고! 당연히 콜이지. 당신에게 그 정도 권한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 지부장이고, 마이다스 킴의 경호 책임자가 내 전우였소.”
* * *
“힘든 하루였겠소.”
“네, 무척이나요.”
“CMM?”
“이제 9년 된 방송국이에요. 세계 최초로 24시간 뉴스만 방송하는 곳이죠.”
그래, 잘 알아. 당신들의 성공에 자극받아 ‘알 자지라’나 한국의 YTN 같은 뉴스 채널이 생기니까.
근데, 아직 시청률은 바닥을 찍고 있는 병아리 방송사란 말이네?
“나를 왜 취재의 대상으로 삼은 거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당신은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거물이에요. 그리고 제 개인적인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의 현 주석도 당신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들었어요. 당신은 판도라의 상자란 말입니다.”
“용감하군요, 살벌하게 겁을 줬다고 하던데…….”
“비록 규모도 작은 신생 방송국이고, 24시간 뉴스만 트니까 성공하겠냐는 비아냥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는 진짜 기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죽음과 공포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 멋있습니다. 그럼 오프 더 레코드 조건으로 인터뷰를 해 볼까요?”
시혁은 러셀 홀스타인과 인터뷰를 하는 내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론이라… 이게 얼마나 양날의 칼인지 지겹도록 겪어 보았다. 그 또한 이자룡의 개인 비리를 덮으려고 무수히 많은 기레기에게 봉투를 돌렸었고, 허리를 접었으니까.
믿거나 말거나 써 제끼는 놈의 논리는 한결 같았다. ‘…로 추정된다.’, ‘…일 것으로 보인다.’, ‘…라는 의심이 든다.’, ‘…라고 생각할 소지가 농후하다.’.
그리고 뻥튀기를 하는 놈, 논문처럼 남의 기사를 짜깁기 하는 놈, 아예 소설을 쓰는 놈도 상대해 봤었다.
정부 기관이나 국회의원보다 더 악랄하고 비열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놈들… 이게 시혁이 기억하는 기레기였었다.
바퀴벌레보다 더 지긋지긋한 놈들.
차라리.
먹어 버릴까?
처음부터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내가 차지해 버릴까? 제 아무리 기자 정신이 투철해도 내가 사주라면 칼끝이 꺾이기 마련이다. 여론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기도 수월하다.
도덕? 저널리즘? 개나 줘라.
더 이상 가식의 탈을 쓰지 않기로 했다. 망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빌런이 된 이상, 뭐가 두려워서?
“러셀, 이번에는 내가 좀 물어봐도 됩니까?”
“네, 킴. 물론입니다.”
“당신 한국으로 올 때 이코노미석을 타고 왔죠?”
“네. 그래요.”
“숙소가 어딥니까?”
“…취재비가 빠듯해서 동대문의 작은 모텔에 묵고 있죠.”
“현재 경영 상태는 어떤가요? 수익 구조가 있나요? 광고는 많이 들어옵니까?”
“저… 마이다스 킴, 왜 우리 회사의 내부 사정에 관심을 보이는 거죠? 비록 우리가 작은 방송사지만 뇌물에 홀랑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겠죠. 현장 저널리즘, 심층 시사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곳, 못 믿겠지만 나는 CMM을 잘 압니다. 당연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원래 현장 전문이 아니었죠? CIA 파일을 봤어요. NBC의 임원 출신이더군요.”
“이 X발, 내 뒷조사 정도는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기자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는 용서 못 해.”
강골이다. 그래서 NBC에서도 사장과 대판 싸우고 쫓겨난 사람이다. 임원이었지만 항상 데스크의 취재 의견을 존중하는 골수까지 기자 정신으로 똘똘 뭉친 꼴통.
“워! 워!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봐요. 나한테는 돈이 있죠. 지금 어려운 CMM의 경영난을 해소할 충분한 돈, 내가 투자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결국 돈으로 저널리즘을 사겠다는 저열한 발상 아닌가? 거물로 생각한 마이다스 킴이 이 정도의 속물일 줄은 몰랐소.”
잔뜩 갈기를 세운 늑대처럼 러셀은 악을 썼다. 하지만 시혁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러셀을 응시하고 있었다.
“러셀, 나는 저널리즘을 돈으로 살 생각 없습니다. 단지 CMM의 미래를 위해 투자할 뿐이에요.”
“그걸 믿으라고?”
“또 하나, 결정적으로 나는… CMM이 일류 방송국으로 점프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
“그것도 단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