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루퍼트 마독의 등장
“이게 꿈은 아니겠지?”
“송구합니다, 프레지던트.”
“아냐아냐.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 된 거지. 자네가 다른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나도 동의하지 않았나?”
“한국 대통령도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응. 괜찮은 친구야. 통화는 자주 하고 있어.”
지금 한미 관계는 역대 어떤 정권보다 좋다. 양국 대통령을 잇는 시혁으로 인해 공감대가 깊은 것이다.
“얼마 전에 SOFA(주한미군 지위협정) 개정에 대해 협조를 부탁하더군. 국방 장관에게 지시했어. 아마 곧 실무단이 방문해서 논의를 시작할 거야.”
“감사합니다.”
“뭘… 그정도 가지고, 팬타곤과 네오콘(공화당 중심 신보수주의자)들이 시끄럽게 떠들겠지만, 내가 알아서 정리함세.”
또 가슴을 달군다. 부시는 그런 사내였다. 한 번 입은 은혜에 대해 결코 잊지 않는 상남자.
“저는 하나를 드렸는데, 프레지던트는 열 개를 주려고 하십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봐! 킴, 남자는 말이야. 서로 간에 무게를 달면 안 돼. 자네가 나를 도왔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았듯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여건에서 최대한 돕는 거… 이건 기본이지. 그러면 된 거야.”
“…….”
“사실은 내가 진한 감동을 먹는 중이야. 비싼 비행기를 타고 바로 와 줬잖아? 누가 그리할 수 있을까? 자네가 내 친구라서 행복하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 조금 남아 있던 얇은 벽마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기 전에 말했던 동서독의 통일에 대해서 TFT를 급히 만들라고 지시했어. 국무부에서는 도통 믿질 않아. CIA도 그럴 가능성이 제로라고 거품을 물고. 그래서 내기를 하자고 했지. 껄껄껄.”
“하하하. 어떤 내기를 하셨습니까?”
“올해 10월 달에 동독에서 급변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면,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서 골프를 치기로 했지. 그러나 내 말이 맞을 때는… 국무부 장관하고 CIA 국장은 육 개월간 반팔만 입고 다니기로 했어.”
“윽! 너무 지독한 조건입니다. 감기에 몸살 걸릴 텐데요?”
“당해 봐야 뜨거운 맛을 느끼겠지.”
“흐흐흐, 레이즈를 거십시오. 소련 연방 붕괴 건도 급작스럽게 이뤄질 겁니다.”
“했어.”
“……!”
“그것조차 맞으면 반바지도 입어야 할 거야.”
10월의 워싱턴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때다. 영하는 아니지만, 5도 내외로 춥다. 억지로 참기 쉽지 않은 날씨다.
정작 문제는 소련 연방이 해체되는 시기다. 91년 12월, 영하로 뚝 떨어진다. 이때부터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육 개월간 근무하려면 콧물을 달고 살아야 할 거다.
두 장관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급하게 와 준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루퍼트 마독이 기다리고 있어. 잠시 보겠나?”
“네. 프레지던트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시혁도 궁금했다. 왜 언론계의 거물이 자신을 보려고 하는지. 그냥 거물이면 말을 안 한다. 호주와 영국을 거쳐 미국의 거의 모든 언론을 한 손에 주무르는 실로 언론계의 황제다.
부시 대통령이 인터폰으로 지시하자 바로 들어서는 한 사람. 노인이라기엔 정정하다. 사진으로 익히 봐 왔던 인물이다.
“오! 안녕하시오, 마이다스 킴.”
“반갑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오, 내가 오히려 영광이지. 떠오르는 샛별을 보게 되어서 말이오.”
말은… 좋은 말인데, 왠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말투. 이상하다.
“내가 조그만 한국으로 갈 수도 없고, 부시를 조를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 바랍니다.”
어쭈? 갈수록 태산일세.
한국을 무시해? 또 대통령 이름을 부를 정도 관계니까 알아서 기어라, 이건가?
“호주 언론계를 장악하고, 영국까지 평정하셨는데 이제 미국을 호령하시는 군요. 저 같은 존재는 먼지 아니겠습니까? 부르면 와야죠.”
“험, 험. 그런 뜻은 아니었소.”
“제가 아직 전용기가 없어서 비싼 항공료를 지불했습니다. 다음에는 회장님께서 전용기를 보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
놀라셨어요? 제가 조금 많이 까칠해요.
“자, 자, 나는 잠시 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편하게 말씀들 나누세요. 오늘 오벌 오피스는 두 분의 전용 공간입니다. 껄껄껄.”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보고 자리를 비키는 부시.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흥미로웠다.
이윽고 시혁과 마독만 미합중국 대통령의 집무실에 남았다. 놀라운 일이다. 두 사람 모두 부시에게 그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증빙이었다.
“당돌하군, 소문대로 거침이 없어.”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저를 왜 호출했습니까?”
“…….”
“한국에서는 흔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즉 상대에 따라 저도 이빨을 드러낼지 마음을 보일지 결정한다는 뜻이죠. 겨우 인사말에서 회장님의 발톱이 보이는데… 저에게 뭘 기대하셨습니까?”
“고약한 상황이야.”
“아직 덜레스 공항에는 제가 타고 온 항공기가 있습니다.”
빨리 말해. 안 하면 돌아갈 거다! 이런 반응, 전혀 예상 못했지?
“킴, 왜 CMM을 먹은 거요?”
“문제가 뭐죠?”
“내가 최근에 팍스 뉴스라는 방송사를 만든 걸 모르오?”
“놀고 있네.”
“뭐?”
“호주의 모든 방송사를 장악했지. 다음으로 영국도… 그 여세를 몰아 미국에 상륙했고, 비슷하게 사세를 확장했어. 금방 포식자가 되니까 세상이 다 당신 것으로 보였을지 몰라. 하지만… 당신이 간과한 것이 있어.”
“이런이런, 애송이가 세상을 모르고… 계속해 보게.”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들이 만든 사회야. 좋은 말로 하면 다양성이고, 나쁜 표현으로 잡탕밥. 그건 여론 몰이를 해야 하는 메스컴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을 거야.”
“…….”
“뉴욕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대형 언론사 인수에 성공하면서 잔뜩 부풀었겠지. 그런데 웬걸? 호주나 영국처럼 일사불란하게 안 움직여? 큭큭큭, 미국이거든.”
“…….”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어, 당신은. 지금도 거물이라고 추앙을 받지만, 호주나 영국처럼 다 먹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방송사가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발견한 것이… 그래, 내가 인수한 CMM을 찾았어. 맞지?”
“끄응, 부인하지 않겠네.”
“그런데, 내가 홀랑 먹어 버렸어. 그토록 공들인 것을…….”
“킴, 지금까지 호주에서도, 영국에서도 그리고 여기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난 내 세상을 흔드는 어떤 자도 용서한 적이 없어.”
“훗! 어쩌나? 당신이 전부라고 믿는 언론, 미국에서는 절대 독점이 불가능한 것을.”
“10배를 주마. 내놓아라.”
“싫은데?”
“아직 어려서 진짜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는 건 이해하마. 방송이라는 세상, 너 같은 애송이가 들어올 판이 아니다.”
마치 데자뷔 같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전에 당신처럼 탐욕적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어. 그래, 똑같네.”
“혼잣말은 나중에 하고 어찌할 테냐?”
“그때도 나는 이렇게 말했지.”
“…….”
“당신은 위대한 언론인입니다. 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언론인이 훌륭한 사람과 동일시되는 것에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당신의 행위는 양아치와 다름없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언론인의 덕목일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악마입니다.”
“말 가려서 해라. 쓴맛 보기 전에… 애송아.”
“어쩜 그 말까지 똑같나? 우리는 동지가 아닌 게 확실하네, 루퍼트 마독 회장.”
X발! 참 기구하네. 워런 바핏에 이어 루퍼트 마독까지 가세했다. 난 왜 이런 센 놈만 적으로 나오냐? 좀 말랑말랑한 놈들로 주면 안 돼?
부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것이다. 아무리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도 언론과 척을 지면 편치 않을 건 뻔하다.
거기다 노골적으로 공화당의 손을 들어 준 루퍼트 마독은 부시의 절대적 지지자였다.
시혁도 이 싸움에 부시를 끌어들일 생각, 애초부터 없었다.
“마독 회장, 당신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정정당당히 싸워 준다. CMM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발전하고 커질 거야.”
“애송이, 겨우 그따위 방송사 하나 가졌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세상은 너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냐. 반드시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거다. 그리고 너는 미국인이 아니잖나?”
“원 태생은 유태계 호주인, 다음은 영국인, 지금은 미국인. 다양한 국적 쇼핑을 했던 당신보다 떳떳한 걸? 다음은 어느 나라 국적을 가질 생각이지? 그거 알아? 철새보다 텃새가 더 오래 살거든. 하하하.”
“텃새가 철새보다 더 오래 산다?”
“응, 철새는 말이지. 매번 둥지를 옮기느라 바빠. 그만큼 머리털이 빠지지. 신경 쓸 게 너무 많거든. 왜 그렇게 사나? 힘 안 들어?”
“……!”
“좋은 말로 하면, 시류에 부응하는 것이지만… 나쁜 말로 하면 기회주의자, 또는 배신자로 보이지 않을까? 당신은 비열한 변절자에 불과해, 마독 회장!”
강을 건너 버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한국에는 삼송이라는 거대한 적.
세계의 중심 미국에서는 경제계의 최고 거물 워런 바핏과 언론계의 제왕 루퍼트 마독.
모두 시혁의 적이다.
* * *
“미국이 용인할까요?”
“이란은 미국의 주적과 마찬가지, 그런 이란을 견제하는 곳이 우리야. 미국은 절대 움직이지 않아.”
“각하,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좀 더 면밀히 미국의 입장을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소리! 대대로 우리 역사의 일부였고, 지금도 같은 민족이 살고 있는 명백한 우리 땅이다.”
“각하, 위험합니다.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조국이 털릴 수 있습니다.”
“이봐, 총리. 8년간 이란과 전쟁을 했어. 덕분에 군사력은 세계 4위가 되었지만, 경제가 바닥이야. 아무리 석유를 퍼 올려도 한계가 있어.”
“그래도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 그거야 만들면 되는 것이지. 우리가 빌린 돈이 얼마야?”
“차관 140억 달러입니다.”
“그거 못 주겠다고 통보해.”
“예? 일방적으로 디폴트를 선언하라는 말입니까?
“그래, 거기다 100억 달러, 더 빌려 달라고 해 봐.”
“말도 안 됩니다. 기존의 빚도 안 갚는 판에 더 달라고 하면 응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니까 하라는 거야. 당연히 반발하겠지. 그러면 우리는 밀고 들어가자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총리의 대화는 살벌한 내용이었다.
이라크는 사면초가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란을 먼저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 8년씩 걸릴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겨우겨우 허울 좋은 승리로 전쟁을 끝냈지만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과도하게 양성한 병력이 100만 대군에, 공화국 수비대도 15만이다. 군에 몰빵한 셈이다. 반면에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유일한 돌파구로 여겼던 루마일라 유전의 산유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쿠웨이트 접경지대에 위치한 루마일라 유전은 이라크의 젖줄과 같은 곳.
저 양아치 같은 쿠웨이트가 루마일라 유전에 연결된 자기들 땅에서 마구 퍼내는 바람에 갈수록 채산량이 감소하는 것이다.
저 작은 땅에 웬 유전은 그리 많은지… 저걸 먹기만 하면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많은 석유를 퍼낼 수 있다. 단숨에 아랍 최고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움직임.
저 깡패 같은 놈들이 용인할까? 침략국이 어떻고 하면서 이란처럼 국제 제재를 하거나, 최악의 순간에 한판 뜨자고 나서면 진짜 골치 아파진다.
“총리, 우리도 이제 미국과 해볼 만하지 않을까? 미국이 말로만 떠들지 별거 없었잖아? 베트남 같은 나라에도 꼬리 말고 도망쳤잖아, 안 그래?”
“각하, 그때의 미국과 지금 미국은 다릅니다. 여전히 무서운 나라고, 세계 최강국이라는 사실을 아시잖습니까? 좀 더 면밀히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어떻게? 간을 볼 방법이 없어. 그렇다고 대놓고 쿠웨이트를 칠 테니 조용히 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각하, 혹시 마이다스 킴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응, 워낙 이슈가 되었던 인물이니까.”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접촉을 해 볼까요? 그라면 미국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정확히 진단할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접점이 있나?”
“우리 석유의 절반을 사 주는 곳을 통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엑슨 모빌?”
“예, 이상하게 헨리 제리코 회장이 몇 번 마이다스 킴의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다면서 아랍국들의 동향을 살피려는 기색이 역력했었죠. 그를 통하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얼마를 안겨 주든 의향을 떠 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이라크 대통령 궁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