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4개 층을 임대해서 쓰고 있던 K 글로벌 USA는 근처 다이론 폴 빌딩을 통째로 매입하고 이사를 해 버렸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 면적은 작지만 총 24층에 이르는 대형 빌딩을 사 버리는 자금력에 월가는 또 한 번 긴장했다.
커진 규모에 맞춰 대대적인 인력 충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엄청난 수의 펀드 매니저들이 들썩거렸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펀드 매니저라는 존재. 월가에서도 이들은 항상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실상 펀드 매니저는 고달픈 직업이다.
위장병과 만성 두통은 기본, 세계 각지의 환율, 채권, 자연재해, 정치와 사회의 변화까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고, 가장 놀라운 것은 이들이 백 퍼센트 비정규직, 즉 모조리 계약직이라는 사실이다.
정해진 계약 기간 내에 정해진 실적을 내는 펀드 매니저는 생존, 조금이라도 커트라인 밑으로 떨어지면 재계약을 거부당한다. 바로 백수가 되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파리 목숨이었던 것이다.
한 번씩 특출난 성과를 내는 펀드 매니저의 전설이 회자되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상위 1%에 불과했다. 나머지 99%는 인센티브는커녕 정해진 연봉도 수령하지 못하고 페널티에 걸려 컥컥거리는 인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파격적인 뉴스가 터진 것이다.
-야, K 글로벌 USA 이야기 들었어?
-나도 고민 중.
-연봉은 무조건 보장한다잖아. 그리고 업무도 지금처럼 스트레스가 심한 게 아니래.
-그걸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들어서 고민하는 거야.
-병신아, 메리웨더 대표가 공언했다잖아. 그리고 이해돼.
-뭐가?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리스크 제로를 추구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매니저들의 독단적인 판단이 필요가 없어. 매뉴얼대로 따라 하면 되니까.
-흠. 그렇긴 하다.
-기계적으로 채권 양방 배팅만 처리해 주면 따박따박 고액 연봉을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이잖아. 개꿀이지.
-일장일단이 있는 건데… 대박을 칠 기회도 거의 없거든.
-인간아, 미쳐도 곱게 미쳐. 저 날고 기는 천재가 득시글거리는 판때기에서 대박? 나는 제발 실적 압박 덜 받고 연봉만 페널티로 까먹지 않아도 하나님 하겠다.
-갈까?
-당근이지. 벌써 웬만한 놈들은 다 이력서 날리고 있을 거야. 늦으면 탑승하기도 힘들어. 가자!
대략 이런 분위기였다. 세계적인 글로벌 투자은행과 펀드사는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메리웨더를 따라 하다가는 가랑이 찢어질 수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역시 난놈입니다.”
“이 년 만에 사세가 열 배 이상 성장했다. 대단해.”
“삼촌,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잘 챙기면 땡이죠. 더 설치도록 가만 두세요.”
“달도 차면 기운다. 풍선이 커질 때는 아무도 그게 터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저렇게 숨도 고르지 않고 무작정 질주를 하다가 한 번 넘어지면… 상처가 너무 클거야. 감당하기 힘든 사태가 올 지도 몰라.”
현자다운 분석.
하지만 삼촌 걱정 마세요. 배에 구멍이 나기 전에 우린 내릴 겁니다. 그것도 구명보트를 타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항구에서 말입니다. 손수건을 흔들며 배를 보내 줄 겁니다. 어차피 가라앉을 테니까.
그때가 비로소 숟가락을 놓는 시점인 것이죠.
“덕분에 우리는 아주 좋은 사무실을 얻은 셈이 됐네요.”
“응, 워낙 잘 지은 빌딩이고, 상징성도 크고, 사통팔달하는 위치에 있고. 다 좋지.”
“삼촌, 한 층은 산드라의 법무 팀이 다 쓰게 하세요. 지금은 변호사 몇 명뿐이지만, 결국 비좁게 될 겁니다.”
“그러마.”
“또 한 층은 윌슨의 경호 팀이 다 쓰면 되고 그리고 한 층은 투자 관리 팀으로 채우고… 82층은 삼촌과 제가 쓰면 되겠네요.”
“너무 휑하지 않겠니?”
“지금은요. 하지만 금방입니다. 올해를 기점으로 꽉 채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이 빌딩은 제가 사게 될 거예요.”
“…엠파이어 스테이트를 산다고?”
“예, 좋잖아요? 뉴욕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여기가 딱이죠. 세상을 내 맘대로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로는.”
공사홍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K 글로벌 USA가 나간 79층부터 82층이 공실로 나오자 K 미르 컴퍼니가 그 자리를 차고 들어왔다. 그동안 조용히 외곽의 작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공사홍은 졸지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들어와 버렸다.
배짱은 정말 끝장이다. 공사홍은 시혁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똥오줌 받아 가며 키웠던 아이가 어느새 저만큼 성장해 버렸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저건 백 퍼센트 적자라고 했던 올림픽 휘장 사업을 성공한 이후, 공사홍은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정했던 것이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행할 뿐이다.
시혁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 * *
“총리, 이렇게 은밀하게 무슨 일이오?”
“걱정 마시오. 당신들의 유전은 안전하게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거야 현장에서 매일 보고를 받고 있으니 걱정 없소만 미국으로 잠행을 하다니, 위험한 행동입니다. CIA를 너무 경시하지 마시오.”
“한 수 처지지만 우리 공화국 정보부도 만만치 않소이다.”
“알겠습니다. 용건은?”
“전에 아랍의 정세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 같던데, 따로 짚이는 이유가 있소이까?”
“흠… 아랍은 전 세계 석유 생산의 중심, 항상 주시할 수밖에요.”
“아닌데…….”
“쉽게 갑시다. 퀴즈를 푸는 건 내 나이엔 곤욕이요. 참 용건이 뭐요?”
“그때, 마이다스 킴의 이야기를 몇 번 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습니까?”
“글쎄요… 석유업자는 돈만 가져오면 누구든 거래합니다만.”
“그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
이게 웬 날벼락? 갑자기 마이다스 킴을… 왜?
“안 됩니다. 킴은 현 정부 최고의 키 맨이고, 섣불리 접근하기 쉽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부시에게 된통 당합니다.”
“맞군요. 오벌 오피스(Oval office)를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더니.”
“차라리 공식 방문을 하겠다면 국무장관은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이다스 킴은 안 됩니다.”
“왜 그리 학을 떼시오? 겨우 22살의 젊은 청년에게.”
“…그는 미친놈이에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입니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오.”
엑슨 모빌의 회장 헨리 제리코는 머리를 흔들었다. 비록 큰돈을 먹게 해 줄 또라이지만, 또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절로 관자놀이로 손이 올라갔다.
“헨리 회장, 요즘 생산량이 조금씩 줄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져가는 양도 그만큼 적어졌지요.”
“쿠웨이트에서도 같은 유전에 빨대를 꼽고 뽑아 대니 어쩔 수 없지요. 북부 스와일리 사막지대의 새로운 유정에서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시추공 박았다고 다 석유가 나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설사 발견이 된다 해도 생산하려면 또 몇 년이 걸릴 텐데.”
이 아랍 놈이 왜 이럴까? 스와일리 유전지대는 이놈이 근거지로 삼는 수니파의 고향이다. 항상 빨리빨리를 외치던 놈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저의가 뭘까?
“마이다스 킴을 만나게 해 주면, 루마일라 유전 채산량의 50%를 드리지요.”
“오, 오, 오십 퍼센트?”
“로열 더치 쉘에게는 다른 지역 물량을 조금 더 주면 됩니다. 한마디로 엑슨 모빌이 공화국 정부 분을 제외한 루마일라 유전을 독점할 기회입니다.”
“왜 마이다스 킴에게 이리 공을 들이는 것이오? 차라리 국무장관을 만나는 게 로비에는 더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총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국무장관은 임명직, 너 같으면 부시가 그런 사람에게 본심을 털어 놓겠냐?
“헨리 회장, 알다시피 지금 공화국이 많이 어려워요. 미국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그런데 국무장관 따위 만나 봐야 대통령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꼭 마이다스 킴에게 로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혹시 이라크에 무슨 급변 사태라도 나는 겁니까?”
“무슨 엉뚱한 소리! 공화국은 대통령이 완전 장악하고 있어요. 100만 대군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움직입니다. 누가 급변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단 겁니까?”
“…내부야 굳건하지만, 외부가 불안하니까 묻는 겁니다. 예컨대, 이란과 다시 한판 뜬다든지.”
“어허! 8년 전쟁을 치른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은 여력이 없습니다. 오직 파탄 난 민생부터 챙겨야 합니다. 민란이 일어날 지경이예요.”
“…….”
“다른 생각하지 말고, 조속히 마이다스 킴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를 통해 부시에게 로비를 제대로 하려고 합니다. 서로 좋은 일 아니오? 엑슨 모빌은 루마일라 유전을 다 먹고.”
쎄하다. 가슴으로 비수가 들어오는 기분.
지금껏 이런 기분을 몇 번 느낀 적이 있었다. 헨리 제리코 회장은 이 동물적인 위험 신호를 놓치지 않은 덕분에 몇 번의 위기를 넘겼다.
꼭 마이다스 킴을 만났을 때, 가슴이 쿡쿡 저리도록 느껴지던 그 기분이 되살아났다. 비록 콜을 하고 되빠꾸(레이즈)를 당하면서 사인을 하긴 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섬찟하다.
그렇다고 이라크 총리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어렵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겨우 만남을 주선하는 대가가 너무 달콤한 것이 찝찝한 것이다.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거늘.
“정히 어렵다면 그만합시다. 차라리 로열 더치 쉘을 찾아가 보렵니다.”
“……!”
아! 뜨겁다. 이 감자 먹자니 목구멍을 델 것 같은데… 그냥 들고 있자니 로열 더치 쉘에게 우리 몫의 기름을 털리게 생겼다.
“섭섭합니다. 우리 공화국이 지금껏 헨리 회장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겨우 사람 한 명 소개하는 것을 이토록 꺼리다니. 그냥 없던 일로 합시다.”
X됐다. 완전 똥 밟은 거다.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외통수가 들어왔다.
사담 후세인의 성격상, 엑슨 모빌이 이라크에서 퇴출될 가능성 백 퍼센트. 그리되면 이사회에서 나를 발기발기 찢어 버릴 것이다.
소낙비는 피하고 보자 했던가?
* * *
“새로 사무실을 열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네, 크게 소문 낼 일도 아니고, 오픈식도 하지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소박한 선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특보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크네요.”
“아마 현존하는 지구본 중에서 가장 클겁니다. 급히 맞췄습니다. 비록 속은 비었지만 껍질 자체가 순금입니다.”
“너무 과분한데요? 하여튼 고맙게 받겠습니다. 멋있네요.”
느닷없이 방문한 엑슨 모빌의 헨리 제리코 회장. 선물이라고 들고 온 것이 어마무시하다. 엘리베이터에 실리지 않을 것을 예상한 듯 네 조각으로 분해한 상태로 가져와 한쪽 편에서 열심히 조립 중이다. 저 정도 두께의 지구본을 순금으로 만들려면 상당한 돈이 들었을 것이다.
왜? 우리가 그만큼 살가운 사이였던가? 오히려 거꾸로 배팅을 한 껄끄러운 입장일 텐데?
한쪽은 무조건 죽는 게임.
마치 절벽을 향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달리는 치킨 게임.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승부의 뚜껑이 열리는 시점이.
“제가 특보님을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큰 겜블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란 게 또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좋은 관계로 남았으면 합니다.”
“예, 좋은 말씀입니다.”
“월가의 떠오르는 신성, K 글로벌 USA가 특보님 소유라는 것을 아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또 사무실을 맞바꿨다는 것도 놀랍고 말입니다.”
“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입을 열어, 이따위 헛도는 이야기하지 말고. 당신의 얼굴에 씌여진 그 다급함… 다 보인다.
“시간이 괜찮으면 내일이라도 식사를 모실까 합니다. 제가 장담하는 아주 괜찮은 맛집이 있지요. 어떠십니까?”
“…….”
“내일 시간이 없으면 모래라도.”
“누굽니까?”
“……!”
“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