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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75화 (75/150)

75화 마음 속 울림대로… 그리고 후회.

‘적과의 동침’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살다 보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항상 좋은 사람, 친한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유토피아지.

현실은 지긋지긋하게 싫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 원수 같은 놈과 마주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지금 헨리 제리코가 그랬다.

시혁과 마주 앉아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싫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인 포로, 날개가 절단된 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신세, 어떻게든 시혁을 설득해서 무함마드 총리와 만나게 해야 한다.

“특보, 그냥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훗! 헨리 회장님, 우리는 선수 아닙니까? 링위에서 글러브를 맞댄 처지에 그런 허황된 이야기 말고 말해 보세요. 저를 불러내 달라고 부탁한 사람… 누굽니까?”

“…….”

“진짜 순수하게 식사를 하자는 뜻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제가 과민성 대장 증상이 있어서요. 괜히 비싼 음식 먹고 소화불량에 걸리면 아깝잖아요?”

“특보!”

“바쁘신 와중에 방문해 줘서 감사합니다. 배웅은 못 하겠군요. 저도 좀 바쁘거든요.”

어찌 된 놈이 이리 뻣뻣하냐? 단 한 치도 양보를 안 한다.

이미 속내는 들켰다. 이 미친놈은 나보다 윗줄의 선수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남은 방법은?

“특보, 사실은 누구라고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특보를 뵙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요.”

“이름?”

“미안합니다.”

“위험한 사람이란 뜻이군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뭘 줄 수 있습니까?”

이래서 오기 싫었다. 이놈은 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바로 들어오는 레이즈.

“헨리, 당신도 대가를 받았을 터… 나는?”

“좋습니다. 우리 회사가 계약한 물량을 더 늘려 드리면 되겠습니까?”

“호오! 구미가 당기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더 늘릴 물량은 있으시고?”

“이라크 루마일라 유전에서 엑슨 모빌의 채산량 전체를 더 드리죠. 물론 내년 10월과 11월 물량에 한정된 것이긴 합니다만.”

“사담 후세인 쪽 사람이군요.”

“……!”

“우선 그 제안은 깨끗이 거절합니다. 하지만 식사 초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대신!”

이놈아, 제발 그만해라. 지금까지만 해도 심장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전에 세븐시스터즈와 맺은 계약 조항을 조금 손봤으면 합니다.”

“…어떤 점을?”

“내년 10월 물량을 인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시 세븐시스터즈는 배상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예, 열 배의 배상금을 내기로 했었습니다만.”

“그래요. 그 배상금조차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경우…….”

“꿀꺽!”

“세븐시스터즈는 일괄적으로 51%의 주식을 넘기는 페널티 조항, 넣어 주세요.”

“다, 다, 당신… 진짜 미친 거 아냐?”

“하하하, 내가 미친놈이란 걸 다 알면서 거래에 응했던 헨리 회장은?”

“그건 내가 혼자 결정 못 하오. 다른 세븐시스터즈가 동의할 리 없습니다. 불가능한 조건이에요.”

“이상하네……. 당신들은 어차피 내 배팅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 아닌가요? 그냥 공짜로 먹는 돈이라 생각하고 내 모든 담보를 잡았어요. 나는 거래 금액을 훨씬 상회하는 담보 설정에 다 동의해 줬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나서서 설득하시오. 이건 어차피 세븐시스터즈가 먹는 판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쿨하게 사인하자.”

“킴, 차라리 이라크 물량을 더 얹어 주는 조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걸로 합시다.”

응, 안 해. 내가 왜 당신들에게 겜블을 걸었는데. 그 개도 안 물어갈 이라크 석유, 한 방울도 필요 없거든.

“헨리 회장님, 레이즈의 기본도 모릅니까? 내가 부른 조건보다 더 가치가 있지 않는 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한 말 기억 안 납니까?”

“……?”

“쫄리면 뒈지시던가!”

마차 바퀴가 빠졌는데, 인디언이 손도끼를 들고 돌진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면 대갈빡이 쪼개질 판이다. 마차를 버리고 도망가던지, 아니면 살려 달라고 백기를 들어야 한다.

살벌한 놈이다.

“휴우… 알겠소. 나중에 세븐시스터즈 회장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Nope! 지금!”

시혁은 인터폰으로 산드라를 호출했다. 간단한 설명과 녹음기를 지참하라는 지시도 함께.

“일단, 헨리 회장님은 직접 사인하셨으니 됐고요. 나머지 회사들은 각 회장님께서 동의하신 내용이 녹음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 계약 시 동석하신 영국의 왕립 변호사님들께 추가 조항에 대해 통보를 했습니다. 이에 대한 정식 문서는 최대한 빨리 원본을 확보하겠습니다.”

맹한 듯하지만, 일처리 하나만큼은 진짜 똑소리 나는 산드라.

흐뭇한 표정의 시혁과 달리, 헨리 제리코 회장의 표정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여 버렸지?

분명히 이기는 겜블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이 느낌, 위험 신호가 분명한데… 그 실체가 모호하다.

이 미친놈은 뭘 믿고 이렇게 막장으로 밀어붙일까? 똥배짱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이제 약속대로 맛있는 식사를 해 볼까요?”

“…언제 말이오?”

“서둘러요. 나머지 세븐시스터즈 서류를 받는 그날이 바로 만찬 날이니까.”

* * *

“앗쌀라무 알라이쿰!”

“쌀람.”

“마이다스 킴입니다.”

“나는 그냥 무함마드로 불러 주시오. 그런데 아랍어가 너무 유창하구려.”

“흔히들 서구권에서 ‘앗쌀라무 알라이쿰’을 ‘당신에게 평화를’ 정도로 해석합니다만, 여기에 숨겨진 뜻이 따로 있다는 걸 압니다.”

“…그 숨겨진 뜻이 뭐라고 알고 있습니까?”

“안전이죠. 당신은 나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 아닌가요?”

“왜 그리 해석하시오?”

“쌀람이라는 단어의 여러 뜻 중에 ‘평화’가 있다 보니 일반적으로 이상하게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슬람 입장에서는 오역이죠. 실제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을 해치지 않겠다, 안심하라……. 이게 맞다고 봅니다.”

“그럼, 왜 내용을 그토록 잘 알면서 그렇게 인사하는 것입니까?”

“무함마드, 말 그대로요. 나는 당신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안심하세요.”

뒤집어서 이해하면, 너를 언제든지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는 도발이다.

“내가 누군지 들었군요?”

“아닙니다. 처음 봅니다. 헨리 회장은 당신이 누군지 일체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

“나를 만나려고 했던 이유가 뭡니까? 무함마드.”

“궁금했을 뿐이오, 세기의 천재라고 하기에.”

“그게 답니까?”

“…….”

“오늘 식사가 꽤 짧아질 것 같습니다. 그게 이유라면 말이죠.”

“…….”

“만남에는 어떤 목적이 수반됩니다. 사랑의 쟁취든, 시간 때우기든, 궁금증 해소든, 간을 보는 것이든 말이죠.”

“그래요? 나는 어디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까?”

“간도 보고, 궁금증도 해소하고.”

무함마드 오베르는… 말을 잊었다.

왜 이처럼 어린 나이에 미합중국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지 알 것 같다. 녹록지 않은 상대다. 삽시간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런 상대에게 잔머리 굴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마음을 얻지 못하면 원하는 결과는 물 건너간다는 것, 지난 세월 총리까지 오른 내공으로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백 퍼센트 블러핑은 바로 잡힌다. 진실 절반에 거짓말 절반도 위험하다. 적어도 진실이 구 할은 되어야 상대방이 넘어오기 마련이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나는 이라크 공화국 총리 무함마드 오베르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베르 총리.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숨어 들어왔다고 생각합니까?”

“아까 대답했습니다만.”

“그렇군, 답… 들었었네. 간도 보고 궁금증도 해소하고.”

“총리, 그 얘기를 듣기에 귀들이 많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맞소.”

무함마드는 묵묵히 포크를 놀리는 헨리 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헨리 회장,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이제부터 루마일라 유전 생산량의 50%는 엑슨 모빌 것입니다.”

“험, 험… 나도 루마일라 유전에서 생기는 이익보다 두 분의 대화가 더 중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총리와의 구두 계약은 파기하겠습니다.”

어쩌면, 회사의 운명을 가를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진한 예감… 헨리 제리코는 버텼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잘못 배팅하는 바보짓은 한 번으로 족하다.

꼭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귓속을 파고드는 시혁의 매몰찬 이야기.

“헨리 제리코,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려고 하지 마라. 한국 속담이죠. 이미 배팅은 끝났어요. 결과를 귀동냥한다 해도 물려 줄 겜블러는 없습니다.”

순간 헨리는 그 간질간질한 기분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거였어.

“마이다스 킴, 당신! 지금껏 함정을 파고 있었던 거구나. 그 구덩이에 우리 세븐시스터즈를 한꺼번에 몰아넣었어.”

“병신, 겨우 감 잡았어? 그래서 어쩌라고? 더 이상 내놓을 게 없을 텐데? 으흐흐흐.”

아직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패를 까기 전까지 누구도 결과를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릴까? 분명 내가 에이스 석 장을 들고 있는데…….

저놈이 설마? 설마? 나머지 에이스 한 장을 들고 있고, 나머지 4장이 다 같은 숫자라면… 우리는 다… 죽는다.

“그만 나가 봐! 여기에 당신이 낄 자리는 없어.”

“무함마드 총리, 이건 말이 다르잖소? 내가 마련한 자리 아닌가. 당연히 자격이 있어. 안 그렇소?”

“헨리 회장, 나도 아랍 속담을 하나 들려 드리죠. ‘녹슨 칼은 사막에 묻는다’. 전장에서 녹슨 칼을 휘두르는 건 자살 행위거든. 그만 나가 보시오.”

고함을 치느라 일어났지만 되레 휘청거렸다. 그리고 마약에 취한 듯 헨리는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내가 가진 카드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구나. 저놈은 이미 내 카드를 다 알고 배팅했어. 사기 도박이었다. 나는 호구였고.’

까무룩 정신을 잃고 비서에게 들려 나가는 와중에도 느껴지는 킴과 무함마드의 차가운 눈길, 가슴을 파고드는 비수.

녹슨 칼이라니… 나, 헨리 제리코가.

“자! 대충 정리됐습니다. 감 잡으세요. 궁금증도 해소하시고.”

“킴, 겜블을 즐기시오?”

“남자라면.”

“무슬림에서 술과 도박은 절대 금물입니다. 알라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그런데 알게 모르게 무슬림도 술과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반대합니다만.”

“흥미롭군요.”

“도박은 항상 상대방이 있죠. 여러 명이 하는 도박도 나와 마지막까지 맞서는 상대는 한 명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패에 따라 승부가 갈립니다.”

“총리, 감동적인 서론, 충분히 들었습니다.”

“미국은 위대한 나라입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있어요. 그러나 미국도 세계 모든 나라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통제해서도 안 돼요. 베트남의 교훈이 이를 잘 증명했다고 봅니다.”

이 양반, 고수다. 이라크 같은 나라의 총리로는 아깝다. 적어도 판의 흐름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 반대파구나. 대통령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거다.

망설여진다. 이런 사내에게 거짓말을 할 것인가? 또 항상 가슴 한구석에 도사린 부시 대통령과의 의리.

내 결정은…….

“쿠웨이트를 넘지 마십시오.”

“……!”

“선을 넘으면 이라크는 멸망합니다.”

“……!”

“부시 대통령은 참지 않습니다. 베트남을 보고 오판하지 마세요. 사담은 미국의 저력을 과소 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킴, 쿠웨이트는 우리 공화국의 일부였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민족도 같아요. 영국의 욕심이, 그다음으로 미국의 이익이 결합하면서 오늘날 경계선을 고착화시켰습니다. 내가 사담의 뜻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외세가 개입하는 것도 반대합니다.”

“총리, 귀국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군사력에 몰빵했습니다. 아랍과 페르시아, 수니파 대 시아파, 화해할 수 없는 숙적 이란과 전쟁을 벌인 건 이해의 폭이 있습니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다릅니다.”

“킴, 다시 말하지만 쿠웨이트는 우리 공화국의 일부요.”

“풉! 그게 뭐 대수라고?”

“뭐요?”

“미국이 그 명분에 대해 눈썹 하나 까딱할 것 같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고 그냥 이해할까요?”

“지금 발언은 킴의 생각이오? 아니면 부시 대통령의 평소 소신이오?”

“당연히 내 개인 생각이죠. 하지만 프레지던트도 똑같을 겁니다.”

“킴이 중재할 수 없습니까? 최소한 부시 대통령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가능성이 없을까요?”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죠. 사담은 쿠웨이트로 만족할 사람이 아닙니다. 범 아랍 제국을 꿈꾸는 몽상가로 보입니다. 총리가 돌아가서 막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라크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아… 결국 마음속 악마와 부시와의 의리 사이에서 부시를 선택하고 말았다.

‘X됐다! 나… 이제 망하는 건가? 여기다 모든 걸 배팅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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