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임원 회의
시혁은 거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82층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사무실 공간이 너무 넓어서 30평형 숙소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운동장이다.
82층에서 내려다보는 뉴욕의 야경은 끝장이다. 왜 불야성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된다.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유난히 불빛이 밝은 지역이 보인다.
월 스트리트(Wall Street)다.
뉴욕시 맨해튼 남부에 위치한 금융의 중심지. 뉴욕증권거래소와 거대 금융사, 투자은행이 몰려 있는 세계 금융시장의 핵심과 같은 곳.
처음 이곳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인디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Wall)을 쌓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 고착화된 것이다.
전 세계의 자금이 유입되어 돌고 돌아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결국 여기서 전 세계의 경제를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월가에서 악재가 터지면 도미노처럼 세계 경제가 연쇄적으로 몸살을 앓는 식이다.
대공황도 그랬지만, 미래에 세계 금융 위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같은 지랄맞은 일들이 모두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좋아. 여기만 장악하면 전 세계 자본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 진정한 무한 자본의 처음과 끝이 여기인 것이다. 힘내자.’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불이 꺼지지 않는 월가를 노려보는 시혁에게 윌슨이 다가왔다.
“보스, 겨우 대충이지만 내부 보안은 갖췄습니다.”
“응, 고생했어, 윌슨.”
“외부는 아직 불안합니다. 비록 외곽을 SS(비밀 경호국)가 감싸고 있지만 안심할 정도는 아닙니다.”
“나보다 바이스 체어맨 미스터 공, 법무 팀장 산드라의 경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예, 여러 경우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직의 핵은… 보스입니다. 그래서 별종들을 좀 끌어들였습니다.”
“별종?”
“예, 세계 최고라 불리는 데브그루도 마주치면 섬찟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호오!”
“버림받은 놈들입니다. 아주 사납지요.”
“윌슨이 그 정도로 극찬을 하는 사람이라… 재미있네.”
“보스, 구르카 용병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응,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는, 그 네팔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지.”
“아닙니다. 프랑스 외인부대가 널리 알려져서 그렇지만, 실제 구르카 용병은 영국이 원조입니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흠, 그래?”
“네, 이들은 영국 정규군의 70% 정도 급여를 받지만, 네팔 현지와 비교하면 몇십 배에 해당하는 큰돈이죠. 그래서 매년 수만 명이 지원을 합니다.”
“나도 들은 바가 있어.
“문제는 근무 중에 사고를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쫓겨납니다. 워낙 용맹스런 사람들이라 사고 이력이 있으면 취직을 못 합니다. 고용주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인성에 문제는 없나?”
“네, 보스. 모욕을 받으면 참지 못하는 민족성이 있어서 그로 인한 사고가 대다수였습니다. 인격적인 대우만 해 주면 실로 무서운 전투 종족입니다.”
“그래, 윌슨이 알아서 해.”
그래도 쭈삣거리는 윌슨. 뭔가 더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다.
“저… 또 있습니다.”
“하하하. 오늘따라 윌슨답지 않다, 편하게 말해.”
“체첸 전사들도 제법 포섭했습니다.”
하아… 좀 그렇다. 무슬림 중에서도 무슬림. 꼴통 중의 꼴통. 아직은 아니지만 몇 년 후에 벌어질 러시아와 체첸은 두 번에 걸친 전쟁을 하게 된다. 그 독한 불곰국이 치를 떨었던 종족이 체첸 아니던가.
“체첸인들도 DNA에 전투 본능을 가지고 있는 괴물입니다. 비록 무슬림이긴 하지만, 종교적인 성향도 굉장히 유연한 편입니다.”
“…그래, 알아서 해. 어차피 내 목숨은 윌슨에게 맡긴 거니까.”
“예, 그럼 근접 경호대에 구르카족을 포함시키고, 그림자 조직은 체첸 전사들 위주로 편성하겠습니다.”
“그림자?”
“예, 2선 경호 개념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지휘는 모두 제 옛날 동료들을 스카우트해서 맡겼습니다, 보스.”
“알았어.”
그냥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시혁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82층에 이렇게 무단으로 들어올 사람… 딱 한 명밖에 없다.
“회장님!”
“응. 산드라, 무슨 일이야?”
“예산을 공평하게 집행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훼방을 놓으세요? 왜 그래요?”
“…무섭다. 목소리 좀 낮추면 안 될까?”
“돈이 썩어 나요? 그럼 홈리스에게 퍼주던가 할 일이지 우리 법무 팀이 쓰레기 처리장이예요?”
“에이… 쓰레기… 는 너무 나간 거 아냐?”
“당장 다시 가져가세요!”
“그냥 예비비 항목으로 잡고 법무 팀이 비축하면 안 되나?”
“하아… 돈은 쓸데가 있을 때 필요한 거죠. 그냥 마구 안기면 그게 바로 쓰레기란 말이예요, 쓰레기. 알아요?”
“산드라, 그냥 가지고 있어. 다 쓸데가 생기는 거야. 돈이란 없어서 문제인 거지. 많다고 짜증 내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야.”
“회장님, 입 닥치고 다시 가져가요. 그리고 내가 요청한 자금만 딱 맞춰서 다시 보내고. 오케이?”
내가 대장인데… 여기서는 좀 외롭다.
“보스, 우리 산드라의 말이 맞습니다. 왜 몇 배나 더 보내서 산드라를 힘들게 하십니까?”
윌슨, 너마저!
우리 산드라? 언제부터 너희들이 손을 맞잡고 나를 이토록 갈구는 거냐?
“윌슨, 당신도 자꾸 법무 팀에 알짱거리지 마요. 나는 커피 싫어. 홍차라면 몰라도.”
“오오오, 홍차! 역시 우리 산드라. 돈으로 때우려는 누구랑 비교하면 고상해, 우아해.”
“윌슨, 설마 돈으로 때우는 누구가 나는 아니겠지?”
“보스, 노코멘트입니다.”
“그냥 칼질을 하는 게 더 낮지 않을까?”
지금도 회장의 지시에 따라 각 분야의 전문 변호사들을 계속 영입 중이다. 미국은 모든 일이 변호사 손에서 시작되고 변호사 사인으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변호사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한국 변호사처럼 모든 분야를 다 맡아 하는 변호사는 오히려 극히 적다. 모두 나름 전문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고 공부한다. 명함에도 00 전문 변호사라고 파고 다닐 정도였다.
처음에는 진짜 우연이었다. 길을 가던 회장의 눈에 파리똥만 한 간판이 눈에 띄인 것도 우연이었고.
“상거래 적격 여부 전문 산드라 변호사 맞나요?”
“아! 예, 예, 맞아요.”
“첫 개시해 볼래요? 작은 거래이긴 하지만.”
“…저, 아직 포트폴리오가 없는데.”
“영광입니다. 산드라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에 제 거래가 올라가겠네요.”
“수임료는 시간당 10달러, 아니 첫 의뢰니까 8달러, 7… 7달러까지 해 드릴게요. 고객… 님.”
“만 달러로 퉁 치면 안 될까요? 시간 잴 필요없이.”
“…사기꾼 아니죠?”
“더 줘요?”
“거래 상대방이 마피아죠?”
“그냥 석유상인데요. 나는 바이어.”
“플루토늄이나 마약을 석유 속에 숨겨 오는 거네.”
“…….”
그랬었다. 동양계 깡패 취급을 했었다. 천 달러만 해도 아닥하고 나설 변호사가 차고 넘치는데 만 달러? 이상한 놈이지.
그날 이후 산드라의 인생이 바뀌고 말았다. 마피아라고 생각했던 거래 상대방. 그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들.
찔끔 지렸다. 세븐시스터즈? 그것도 회장들? 거기다 영국 왕립 전속 변호사 그룹?
거래 금액은…….
총 525억 달러란다. 계약금이 78억 달러래. 또 위약금은… 지랄! 780억 달러.
평생 세어 볼 일이 없는 금액. 장난으로라도 쓸 일이 없는 숫자라고.
그러나 이 겜블은 절대 불가능한 배팅이라고 생각했던 산드라. 한동안 멘붕에 빠져 있었지만, 어찌어찌 회장의 꼬드김에 넘어가 전속 변호사가 되고 말았다. 맹한 자신의 성격이 문제라며 머리칼을 쥐어뜯었지만 이미 승락을 했으니…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열심히 일을 했었다.
이 빌어먹을 회장 놈은 그동안 일도 많이 벌렸었네? 한국에서, 일본에서, 미국에서 온갖 해괴한 방법으로 돈을 뻥튀기 해 놨어.
한국의 K 글로벌 코리아, 일본의 K 글로벌 재팬, 미국에도 K 글로벌 USA를 만들어서 휘어잡고 있는 중이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어쭈? 다 잘나가?
월가의 친구에게 슬쩍 물어보니 펄쩍 뛴다. K 글로벌 USA가 지금 월가를 다 씹어 먹고 있다고? 실제 주인이 누군지 의문투성이라고?
여기 있는데… 그 또라이.
필요 없다는 데도 자꾸 돈을 퍼붓는 이상한 회장.
“산드라, 내 말 잘 들어요. 돈은 말이죠. 싸락눈처럼 쌓으면 바로 녹아 없어집니다. 돈이 쌓이려면 함박눈처럼 모아야 합니다.”
“글쎄! 그건 회장님이나 돈 벌 때 함박눈으로 쌓으시고, 내 업무 영역에서는 내가 세운 예산대로만 달라고요오!”
“산드라, 법무 팀을 지금의 열 배 이상으로 확충하세요. 안 그러면 산드라의 머리가 부풀어 오른 꽈리처럼 뻥 터질 겁니다, 곧!”
“회장님, 그게 무슨 말이죠?”
“대망의 1990년 새 아침도 밝았는데, 우리 이번 기회에 임원 회의 한번 할까요? 윌슨, 공 부회장님 올라오라고 하세요.”
* * *
K 미르 컴퍼니의 존재는 실로 몇 사람밖에 모른다. 이 회사가 버진 아일랜드라는 조세 회피처에 본사 소재지를 두고 있다는 것도, 이 회사가 한국과 일본, 미국의 K 글로벌 그룹사의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것도.
그뿐인가? 최근 엄청난 기술로 뉴욕 증시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엔바디아의 최대 주주도 이 회사다.
달랑 4명뿐인 K 미르 컴퍼니의 임원 회의. 1990년 1월 1일 아침에 달리 갈 곳 없는 일벌레들이 모여 앉았다.
“이제 다 공유하겠습니다. 명색이 그룹 최고위 임원들인데 실질적인 내용을 모르면 안 되죠.”
“…….”
“얼마 전 이라크 총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부시 대통령과도 티 타임을 가졌어요. 그 결과…….”
“꿀꺽!”
“이라크는 다가오는 8월에 쿠웨이트를 침공합니다, 100% 확률로.”
“……!”
벌떡 일어나는 산드라. 잠시 주위를 돌아보니 정작 이토록 놀라는 사람이… 없네? 나 혼자 그런 거야?
윌슨도 그러려니 하는 표정. 하긴 저 근육돼지는 회장을 신으로 생각하니까. 그리고 공 부회장은 표정의 변화가 아예 없다. 평소처럼 노트를 펴 놓고 뭔가 쓰고 있다.
슬쩍 보니… ‘때가 되었다. 전쟁. 8월.’
이런 된장, 나만 몰랐던 거야?
“산드라, 당신을 배제한 것이 아냐. 윌슨도, 공 부회장님도 오늘 처음 듣는 거야. 다만 윌슨은 내가 이라크 총리를 만날 때 현장까지 같이 동행해서 감을 잡고 있을 뿐.”
“후! 후! 좋아요, 회장님. 내가 늦게 알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 하는 것이 궁금해요. 말해 주세요.”
“미합중국이 원하니까.”
“설마… 정의의 사도, 민주주의 수호자 미국이?”
“응. 독수리 오형제도 먹고살아야 하거든, 지구를 지키려면.”
“…….”
“원래 흰수리 독수리가 그래. 썩은 고기도 마다하지 않아. 대신 죽은 시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걸 이라크로 정한 것뿐, 바뀌는 건 없어.”
맹하지만 순진하고 일에 대해서는 똑 소리 나는 변호사 산드라.
충격이 큰 모양이다. 산드라야, 나도 그랬어. 어릴 때는 공산당 빨갱이들 머리에 다 뿔이 있는 줄 알았으니까.
“…그럼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죠?”
“굿! 그 프로 정신에 경의를 표하지. 우선 세븐시스터즈의 모든 지분 구조에 대한 분석, 올해 8월부터 시작해서 특히 10월과 11월의 예상 채굴량 그리고 그동안의 유가 동향에 대한 예측을 해 봐. 물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친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리고요?”
“뭐가 그리고야? 세븐시스터즈를 털도 안 벗기고 날름 먹으면 되는 거지.”
“오 마이 갓! 지저스 크라이스트! 당신, 진짜 사기꾼 맞았네. 처음 예감이 딱 들어 맞았잖아… 미치겠다.”
“저번 수정 계약서 공증 다 받았지?”
“회장님, 저 산드라예요. 공증으로 부족하다 싶어서 ICC(국제 상공회의소)에 계약서 등록까지 마쳤다고요.”
“됐어. 으흐흐흐. 다 내꺼야.”
“회장님, 지금 너무 음흉한 거 아세요?”
“산드라, 빌런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적이 꼬꾸라질 때 아닌가? 흐흐흐.”
“악마 같아, 우리 회장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82층에서부터 서서히 광풍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화약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