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위기인가, 기회인가?
“사담 후세인 대통령 각하, 믿지 마십시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미합중국이란 말이오.”
“차 드세요. 언젠가 아메리카노를 마셔 본 적이 있어요. 그게 커핍니까? 그저 맛만 흉내를 낸 거죠. 자고로 커피란 진한 향이 입안 가득 퍼져 야죠.”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사람들이 아랍인들이다.
원두를 가볍게 살짝 볶은 후 밀가루처럼 곱게 빻고, 이브라크(ibriq)라고 하는 긴 손잡이가 달린 구리 용기에 원두 가루를 물과 함께 넣어 끓인다.
거품이 일기 시작하면서 끓어오르면 살짝 불에서 내려놓고 거품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다시 올린다. 이런 과정을 3번 반복하고 나서야 작은 잔에 부어 마시는 것이 아랍식 커피.
마시는 사람은 거품과 가루가 잔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천천히 마셔야 한다. 빨리 마실 수 없는 것이다.
이 빌어먹을 아랍식 커피, 입안에 가득 차는 향이라고? 독약과 비슷한 쓴맛에 헨리 제리코는 인상을 썼다.
거기다 탁자에 올라온 쌀밥과 양고기 스프와 양파 조각, 더럽게 맵다. 이 밥알에 양고기 스프를 뒤적이고 다음으로 반찬처럼 양파를 같이 먹은 후 화끈해진 입안을 진한 커피로 행구는 방식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
힘들게 만난 이상, 어떻게든 오늘 설득해야 한다. 이 전쟁광에게 미국의 무서움을 가르쳐서 주저앉히지 않으면… 아아! 생각하기도 싫다.
“왜 국무장관을 보내 엉뚱한 동맹을 맺겠습니까? 모든 게 함정이란 말이오. 미국은 가만있지 않습니다. 쿠웨이트 경계선도 넘어선 안 됩니다, 각하!”
“헨리 회장.”
“예. 각하.”
“최근에 부시 대통령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취임식 때 잠깐 인사드리고 따로 볼 시간은 없었습니다.”
“같은 텍사스 출신인데, 부시가 헨리 회장을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구려.”
“그건 아닙니다. 특별한 이슈가 없었을 뿐입니다. 부시에게 세븐시스터즈는 아주 각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요? 듣기로 세븐시스터즈는 민주당 두카키스에게 올인했다던데?”
“그건…….”
“우리는 산유국이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보단 작지만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라오. 이 신의 선물이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합니다. 당신도 그 덕분에 돈을 버는 것 아닌가요?”
“각하!”
“마이다스 킴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 대가로 약속한 물량은 공급하겠소. 그러나 우리 공화국의 내정까지 당신이 간섭할 권한은 없어. 알겠소?”
“각하, 마이다스 킴은 악마와 같은 자입니다. 그는 분명히 거꾸로 말을 했을 겁니다. 뱀의 혓바닥에 숨은 독을 어찌 곧이곧대로 믿는단 말입니까?”
사담 후세인은 순간 의전용으로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낼 뻔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헨리 회장, 뭔가 착각하고 있구려.”
“예?”
“마이다스 킴은 공포에 질려 있었소. 그래서 블러핑을 한 거지. 미국이 우리 공화국을 응징할 것이라고. 절대 쿠웨이트를 치지 말라고. 그는 부시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 당연히 부시의 입장에서 말을 했겠지.”
“설마… 킴이 그리 말했다는 겁니까? 미국이 이라크를 응징할 것이라고?”
“그렇소, 그는 당신 말대로 뱀의 혓바닥으로 나를 주저앉히려고 안간힘을 다 썼소이다. 미국은 우리 공화국의 100만 대군과 전쟁을 벌일 수 없어요. 비록 승리할지 모르나 미국도 너덜너덜하게 될 테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왜 킴이 그렇게 말을 했을까요?”
“무함마드 전 총리가 녹음까지 해서 들려줬어요. 그 목소리에는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더군. 무서운 거지. 전쟁은 애송이가 가지고 놀 장난감이 아니라오.”
“아닌데… 절대 그럴 리 없는데… 그 악마 같은 놈이 진심을 말할 리 없는데…….”
“거기서 더 확신을 가졌소. 미국은 우리 공화국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킴이 총리와 만나고 바로 부시에게 달려갔다는 정보를 획득했소. 공화국 정보부도 장난이 아니거든.”
“…….”
“그 직후 국무장관이 방문한 걸 보면 모르오? 부시의 친서까지 가지고 왔더군. 양국의 우정과 동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나? 소련 무기 말고 미국 무기를 더 사 달라고 하는 내용도 있었소이다. 큭큭큭.”
“각하, 미국이 쿠웨이트 합병을 용인한다고 해도 일단 전쟁이 터지면 세계 유가가 미친 듯이 폭등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제2의 석유파동이 일어납니다. 이라크에게도 득 될 것이 없잖습니까?”
“천만에, 딱 이틀이면 쿠웨이트를 쓸어 버릴 수 있소. 겨우 3만 명에 불과한 쿠웨이트는 절대 우리 대군을 막지 못해.
“…….”
그리되면 우리 공화국은 전 아랍의 40%를 가진 거대한 산유국이 되는 거요. 유가는 바로 안정을 찾게 되고, 우리는 비로소 대제국으로의 기틀을 마련하겠지. 안 그렇소?”
그럴까? 과연 그렇게 될까?
헨리 제리코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담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는 일이다. 이라크의 석유를 퍼 오면서 배럴당 1달러는 사담의 개인 주머니로 넣어 주는 관계가 아니던가? 여기에 쿠웨이트 석유까지 독식할 수 있으면, 말 그대로 대박이다.
단, 미국이 이 사태를 용인한다는 전제하에서.
보아하니 사담 후세인의 마음을 돌리기는 이미 늦었다. 이란과의 8년 전쟁을 승리했다고 하지만, 얻은 것이 없다. 국민들의 생활은 나락으로 처박히고, 남는 것은 막대한 군비로 확충한 군대… 이걸 써먹고 싶은 것이다. 국민들의 불만도 잠재우고, 쿠웨이트 석유를 통해 경제난도 해결하고.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각하, 언제쯤으로 생각하십니까?”
“당신 미쳤나? 아무리 우리의 관계가 좋아도 그걸 발설할 수 있다고 생각해?”
“흥분하지 마십시오, 각하. 어차피 속살을 본 사이 아닙니까? 우리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디데이를 알아야 제가 준비를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킴과 저는 모든 걸 던진 겜블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10월 유가가 지금처럼 15달러 아래로 안정되면 킴의 자산을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달러를 넘어가면 제가 위험합니다. 그래서 각하의 진정한 의도를 꼭 알아야 합니다.”
“10월?”
“예, 각하. 제가 망하면 각하의 주머니를 채울 사람이 없어집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담은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국가의 흥망성쇠가 달린 일이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라 해도 발설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헨리 제리코와는 벌써 오랫동안 뒷거래를 해 온 사이. 스위스 비밀 계좌에 차곡히 쌓인 엄청난 비자금은 모두 헨리에게 받아 챙긴 돈 아니던가?
“헨리 회장, 이슬람력을 알고 있습니까?”
“예, 당연합니다. 각하.”
“신년 기간에는 나도 가족들과 평화롭게 즐길 생각이요. 원래 사막의 전사들은 초승달이 시작되어야 움직이는 경향이 있소. 보름에는 알라의 신성한 기운을 받아야 하지 않겠소?”
다시 헨리의 머릿속은 팽이처럼 회전했다.
태양력을 쓰는 서구 사회와 달리 아랍 국가들은 이슬람력을 쓴다. 태양력은 일 년이 365일이지만, 이슬람력은 354일. 11일이나 적다. 그리고 금요일과 토요일이 휴일이다.
신년 기간 동안은 평화롭게 가족과 즐긴다? 초승달이 시작되어야 사막 전사들이 움직인다?
대부분 7월 중순에 새해가 시작되는 이슬람력, 거기다 거의 보름을 쉬는 나태한 종족들.
‘8월 초… 사담이 국경을 넘는 시간은 8월 초순이구나.’
가만있자.
신년 휴가를 마치고 바로 몰아쳐서 이틀 만에 쿠웨이트를 점령한다고 치자. 미국도 이를 용인한다고 치자.
유가는?
잠시 치솟겠지만, 더 떨어질 소지가 높다. 아니, 더 떨어질 것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의 막대한 석유를 마구 퍼내기 시작할 테니까.
“헨리 회장, 이 소식은 당신이 무덤까지 지켜 줄 것으로 믿소. 만약… 대업을 망친다면, 엑슨 모빌은 영원히 아랍권에서 석유 한 방울 못 가져갈 거요. 명심하시기 바라오.”
“걱정 마십시오, 각하.”
“그래, 유가는 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10월이면 소화가 다 되다 못해 양파 밭에 똥으로 퍼질러 놓을 충분한 시기 아니겠소?”
“덕분에 시름을 덜었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마이다스 킴을 잘근잘근 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 * *
“아이 씨, 왜 귀가 이렇게 가렵지?”
“또 누가 욕하고 있나 보죠.”
“산드라, 나는 착한 사람이야.”
“예, 예, 그럼요.”
“인원 보강은 다 했어?”
“예, 돈이 썩어 나는 판에 뭔들 못 하겠습니까? 회장님.”
이 아가씨. 계속……. 그래도 귀엽다. 일은 진짜 딱 부러지도록 확실히 하니까. 또 산드라가 내심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익히 알고 있다. 술에 취해 윌슨에게 우리 회장님 망하면 불쌍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삿대질을 했었단다.
“산드라, 세븐시스터즈 7개 사의 51% 지분이면 얼마나 될까?”
“계산 불가요. 단순히 주가만 반영한다면 간단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위상과 세계 석유 시장 절반의 장악력 그리고 그 석유를 무기로 휘두를 때 어느 나라도 고개를 숙여야 하는 위력, 다 감안해야 하거든요.”
“대충이라도 말해 봐.”
“음, 어렵긴 한데 대충이라면… 거의 1조 달러는 넘지 않을까 싶어요.”
“……!”
“놀랐죠? 그러니까 회장님이 악마라고 하는 거예요, 악마!”
“흐흐흐. 듣기 괜찮네. 윌슨하고 데이트는 자주 하나?”
“에, 예? 절대 아니거든요. 윌슨은 근육돼지잖아요? 나는 키가 조금 작아도 호리호리하고 총명한 남자 그리고 얼굴이 제임스 딘 같은 반항적이면서 조각 같은 남자, 또 여자를 포근히 감싸 줄 낭만적인 그런 남자를 찾는 중이에요. 헤헤헤.”
“산드라도 미쳤구나?”
“씨!”
“그런 남자들은 산드라같이 똑똑한 여자 되게 싫어한다? 기피 대상 1호란 거 몰라?”
“…….”
“거울 좀 보고 살아라. 산드라, 머리 안 감은 지 일주일 넘었지? 벌써 그 옷, 며칠째 보는지 알아? 워커홀릭에 걸린 여자를 누가 좋아할까나? 쯧쯧쯧!”
“오 일밖에 안 됐는데… 냄새 나요?”
“어허! 그 냄새 좋아해 줄 남자 저기 온다, 윌슨.”
말끝에 등장하는 윌슨. 그런데 장난 칠 표정이 아니다.
“보스, CIA 앤드류 국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왜?”
“여러 가지 상황을 두고 좀 뵈었으면 한다고… 아마 사막과 관련 있는 듯합니다.”
“언제?”
“지금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할 이유 없지, 오라고 해.”
잠시 후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CIA 앤드류 국장. 혼자가 아니다. 터번을 두르고 정장을 멋스럽게 차려 입은 무슬림 한 명이 같이 들어왔다.
낯이 익다. 물론 회귀한 이후로 접했던 아랍인이 여럿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왕세자를 만났었고, 오만의 국왕과 술도 몰래 마셨다.
그러나 지금 들어오는 이는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웬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졌다.
누구지? 아직 정확하지 않다.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특보님.”
“아녜요. 정신없이 바쁜 분이 오셨는데 차 한잔하는 게 뭐 대수라고요. 커피?”
“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아! 여기 같이 온 분 소개를 깜빡했군요. 우리와 같이 일하는 분입니다. 오사마 빈 무함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죠.”
“……!”
앗! 뜨거라.
풀네임이 상당히 복잡하지만, 처음과 끝만 들으면…….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사실은 특보님께 긴한 부탁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여기 동행하신 오사마 선생, 너무 기니까 줄여서 그렇게 부릅니다만, 이분 활동에 특보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윌슨, 밖에 다른 요원을 더 배치하고 누구도 출입시키지 마세요.”
의외로 심각한 표정의 시혁을 본 윌슨은 말없이 같이 있던 요원에게 눈으로 지시를 내렸다. 이 방은 당분간 철옹성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상상치도 못했던 사람의 방문은 그만큼 시혁을 긴장시켰다. 빈 라덴이라니… 오사마 빈 라덴.
“네. 국장님.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들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