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보은
X된 표정의 시티은행 사장.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지만 눈을 맞추는 놈이 없다.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발로 의자를 밀고 있다.
‘나 왕따당한 거야?’
“좋소, 우리 시티은행은 이런 요상한 거래에 끼지 않겠소. 하지만, 일어나기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네… 뭐, 그 정도야.”
“왜 이러는 거요? 목적이 뭐요?”
“아… 모르셨구나. 우리 K 미르 컴퍼니는 이미 세븐시스터즈의 주식을 평균 15% 정도 가지고 있거든요. 각 사별로 차이가 있지만 말이죠. 이번 기회에 경영권을 가지려는 겁니다. 단!”
“…단?”
“혹시라도 딴마음을 품는 분이 계시다면 시원하게 던질 겁니다. 휴지 가격에, 망하는 김에 시원하게 망하라고.”
경영권을 목표로 한다는 말에 반짝 희망을 품던 눈길들이 바로 처박혔다. 구두코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얼마에 던져야 간택을 받을 수 있을지,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흔들고 있었다.
시혁은 사우디와 오만에서 배상금을 전액 받아 냈다. 사우디와 오만도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일찍 주고 이 금덩이 같은 석유를 지켜야 했다. 쿠웨이트 유전 지대가 불바다가 된 이상, 지금은 석유를 쥐고 있는 놈의 방구 냄새가 지독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향력 만렙을 택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븐시스터즈의 회장들은 자신들의 보유 주식을 탈탈 털어 내놓고 살길을 모색했다. 태업하라는 지시에 순응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구명줄.
없는 사실을 공시하면 불법이지만, 물건이 없어서 안 팔겠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산드라는 그것을 지시한 것이다. 자리를 보전해 주겠다는 미끼로.
이를 거부하면 바로 골인이다. 사기라는 치욕을 평생 뒤집어쓰고 흉악범과 같은 방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파장으로 전 세계 증시가 발칵 뒤집어졌지만… 산드라의 깡다구를 믿기로 했다. 그녀라면 투자은행 책임자 정도는 씹어 먹을 것이다.
일단 골치 아픈 설거지를 산드라에게 떠넘기고 시혁은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생해, 산드라. 나중에 윌슨하고 같이 휴가 보내 줄게.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쉬자.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것도 중요하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것을 밀어준 할아버지 생신도 소중하다.
“왜 자꾸 공항에 나와요, 날도 추운데.”
“이놈이… 보자마자 타박이네. 내가 지금 할 일이 있냐? 남는 시간 이용해서 네놈 마중 나온 게야.”
“에이 씨. 그럼 내가 할아버지 짬 처리용이네?”
“시혁아, 잘 왔다. 양키들 틈에서 고생했어.”
말은 툴툴거리지만 둘은 따뜻하게 껴안았다. 친손자와 할아버지 이상의 교감. 이것도 운명이다.
“네 차는 따라오도록 두고, 할애비 차로 같이 가자. 밥부터 먹어야지.”
“또 국밥? 소고기인듯 소고기 아닌 그 거?”
“헐헐헐, 뭔들 못 사 주겠니? 살이 많이 빠졌구나.”
남대문 갈치 골목. 얼마나 오래 됐는지 구석탱이가 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살이 오른 갈치가 빨간 양념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살짝 걷어 내면 드러나는 뽀얀 속살. 죽음이지.
“빠다하고 빵만 먹어서 속이 더부룩했을 게다. 코리안 타운에 가면 김치찌개는 먹을 수 있겠지만… 이런 기막힌 갈치 조림은 없을걸? 맛있지?”
“예, 진짜 별미입니다. 외국에서 먹기 힘든 맛이네요.”
“그래. 이 할애비도 가끔 입맛이 없을 때면 오는 곳이다.”
“사람들이 못 알아봐요?”
“알아보면 어때서? 사람이 밥 안 먹고 산다든?”
“맞네요. 다 삼시 세끼 따뜻한 밥 먹으려고 고생하는 건데.”
빈말이 아니라 너무 맛있다. 서서히 해외 교민들이 문을 여는 한식당이 널렸지만, 역시 고국에서 먹는 골목 맛집과 비교할 수 없지.
“진짜 전쟁이 나더구나.”
“장난인 줄 알았어요? 거기다 2조 원을 배팅하신 분이 할아버진데?”
“그 돈이야 날라가면 어쩔 수 없다만, 그룹 전체를 걸고 보증서에 사인할 때는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이놈아.”
“어차피 해 주셨을 거면서.”
“아니, 솔직히 입술이 마르고 손끝이 달달 떨렸다. 아들 놈들은 죽는다고 악을 쓰고… 아마 내 평생 제일 큰 도박을 하는 심정이었을 거야.”
당연한 말씀이다. 친자식이 부탁해도 보증은 서지 않는 법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1등 재벌 계열사 모두를 걸고.
“근데, 왜 하셨어요?”
“그게 이상해. 머리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데… 여기, 이 심장이 말이다. 이게 우리 현도를 살리는 길이라고 벌렁거리더라. 내 인생 세 번의 기회 중 마지막이 온 게 아닐까? 이것도 못 먹으면 나는 헛살았다. 그냥 눈 딱 감고 찍어라……. 이런 속삭임이 나를 홀렸지 않나 싶다.”
삼송 같으면? 턱도 없는 소리다. 아직까지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왕회장의 위상이 살아 있는 현도였기에 가능한 배팅이었다.
“할아버지, 이거.”
“……?”
“배당금은 나중에 산드라가 보내올 거예요. 주식으로.”
“이건 뭔데?”
“원금요. 지브롤터에 할아버지 이름으로 넣었으니까 나중에 자제분들에게 잘 나눠 주세요.”
“응, 알았다. 그런데 배당금을 주식으로 준다는 말은 뭔 소리냐?”
아직 모르고 계시지. 하긴 시혁도 김포공항에 내려서야 산드라에게 보고를 받았으니.
“세븐시스터즈 아시죠?”
“사업하는 사람치고 그 기름쟁이들 모르는 이가 있을까?”
“제가 몽땅 먹었어요, 그 기름쟁이들.”
“……!”
“원래는 거의 1조 달러는 있어야 먹을 수 있는 덩치였거든요. 그래서 상황을 조금 비틀었죠. 다행히 각 사별로 차이는 조금 있지만 50% 이상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그, 그럼 네가 전 세계 석유의 절반을 가졌다는 말이야? 진짜로?”
“예, 그런 셈이죠. 기존 경영진 자리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그만한 돈이 있었던 게야? 아니면 따로 투자를 받은 게야?”
“에이, 돈 빌리는 것은 할아버지 한 번이면 족해요. 제 돈으로 했죠. 150억 달러가 생겼거든요. 거기다 지금 세븐시스터즈 주식은 휴지값만 못해요.”
“옛끼, 이놈아. 메이저 석유 회사 주식을 휴지값이라고 말하는 놈은 세상 천지에 너뿐일 거다.”
“잘 받아 두세요. 전체 주식의 10%니까 이대로 몇 달만 지나면 천억 달러? 나중에는 몇 천억 달러가 될 지 몰라요.”
“…….”
“왜 그래요? 갑자기.”
“아니, 추워서 그런다. 그 돈이면 현도를 통째 사고도 남는 돈이다. 무섭구나.”
“생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할아버지의 배팅이 성공한 겁니다.”
“하아…….”
장탄식을 연발하는 정조영 회장.
대한민국의 초창기 번영을 이끈 위대한 기업인도 만져 본 적이 없는 액수다. 현도가 지금은 한국에서 1등 가는 재벌이라지만 세븐시스터즈 한 개 회사만도 못한 게 현실.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 겨우 몇 년, 망치 들고 혼자 나가더니 상상초월 대저택을 만들어 왔다.
그런 자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시혁이 괴물같이 보였다. 이런 놈과 적이 되면… 에휴, 그냥 맛이 갈 거다. 내 눈이 녹슬지는 않았어.
“안 아깝냐?”
“할아버지는 아까웠어요?”
“…그렇구나.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한 거네.”
“네. 이심전심이고 염화시중의 미소였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허허허. 이거 큰일 났다. 자식놈이 주렁주렁 많아서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눈에서 불들이 나올 게다.”
“할어버지. 외람되지만, 제가 시기를 말씀드릴게요. 그때까지는 할아버지의 깊은 금고 속에 넣어 두세요. 견물생심이라고 막상 보면 누구나 욕심을 낼 겁니다.”
“그래야겠다. 칼부림 나도 이상하지 않을 금액이니까.”
겨우 본색을 회복한 정조영. 씨익 웃는다. 저 표정을 지으면 항상 짓궂게 변하던데…….
“너, 자식이 많아서 머리 아픈 것 같지? 아냐. 많을수록 뿌듯하고 든든해. 낳아 보면 안다.”
“네. 그렇겠죠. 혈연은 하늘이 내리는 첫 번째 인연이니까요.”
“성희 말이다. 곧 귀국한다. 아직 밥 한 번밖에 안 먹었다며?”
“에이, 진짜… 나 그만 먹을래.”
“짜식이, 다 먹어 놓고서. 너 자꾸 이러면 할애비 정치한다?”
“에이 씨… 그만해요. 좀.”
“사내 나이 23살이면 상투를 틀어도 이상할 게 없어. 그냥 숭숭 낳으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가정을 일궈야 하지 않겠냐?”
“저, 여자 있어요.”
“엥? 노예지?”
“아뇨. 할아버지는 모르는 여자요.”
“뉘댁 규수냐? 사고쳤냐?”
“무슨 소릴! 그 여자는 아직 저를 알지도 못해요.”
그제서야 어깨를 내리며 한숨을 내쉰다.
“아하! 짝사랑? 좋은 나이다. 연애는 얼마든지 해. 그래도 가정은 말이다.”
“아… 할아버지. 체합니다. 이 조림, 국물에 밥 비벼 먹어야 완성되는 거 모르세요?”
* * *
시혁이 귀국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보은과 미련.
정조영 회장에게는 더 많이 줘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이미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이다. 분명 현도 그룹의 자산 가치보다 더 많은 돈을 안겨 드렸지만 한국 제일의 재벌을 가진 분이다. 딱 약속한 20%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미련…….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딸 혜림이의 앙증맞은 모습.
그리고 혜림이를 낳아 준 미래의 아내 최송희.
행복한 가정생활은 아니었다. 이자룡의 수행비서로 평생을 살면서 가정에 충실할 수 없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최송희도 그랬었다. 비서실 과장일 때 소개로 만났고, 너무 늦은 나이였다. 그때까지 높은 콧대로 결혼을 하지 않았던 아내는 삼송이라는 명함을 본 것이다.
어디가서 쪽팔릴 직장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삼송맨이라는 허울에 눈이 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 한 달에 몇 번 들어오지 못하는 시혁을 기다리지 않았던 아내.
백정과 같이 간 술집에서 본 적도 있었다, 다른 남자와 함께 환하게 웃는 아내를.
배신감?
명색이 사낸데 그런 감정이 없었을까……. 하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렸었다, 혜림이 생각에.
또 스스로 생각해도 잘한 것이 없었고.
아내와는 동갑이었다. 둘 다 46 만혼이었으니, 서둘러 혜림이를 낳은 것이다. 아내는 혜림이를 출산하고부터 노골적으로 이혼 이야기를 달고 살았었다. 혼자 육아를 맡는 것이 너무 싫다고.
견딜 수 없어 이혼을 했었다. 그렇게 겨우 첫 돌이 지난 혜림이를 안고 시혁은 집을 나왔지만 막막했다. 당장 혜림이를 맡길 일가친척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자룡에게 빌다시피 사정해서 일주일의 휴가를 얻은 후 시혁은 오로지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 줄 사람을 찾아 헤맺다. 적지 않은 연봉 탓에 돈으로 봐줄 사람은 있었지만 미덥지 않았다.
결국 다시 찾은 불광 자비사. 스님은 오래전에 입적하셨으나 시혁에게는 유일하게 돌아갈 고향 집이었다.
매달 빠지지 않고 후원금을 보내왔던 인연이 남아 있어서 새로 오신 주지스님과 공양주 보살님께 아기를 맡겼다. 혜림이는 고아 아닌 고아처럼, 시혁의 운명을 대물림한 채 보육원에서 컸던 것이다.
다 내 잘못이다. 다른 이를 탓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세븐시스터즈와의 일이 끝을 보이자 시혁은 지금 시절의 아내가 문득 궁금했다. 그리고 혜림이는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끊이지 않았다.
그 의문과 궁금증을 풀기 위함이 이번 귀국의 두 번째 사연이었던 것이다.
만나 보자. 그리고 이 살을 저미는 혜림이에 대한 그리움과 최송희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자.
그다음 행보는… 모르겠다. 미래에 느꼈던 그 감정이 살아날는지.
딱 하나 걸리는 부분은.
최송희를 소개한 사람이… 선배 조문호였다는 것.
난감하다. 조문호는 연속으로 고시에 낙방한 후 작년에 삼송생명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시기.
학교에서 그 망신을 줬던 시혁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덜렁 나타나 최송희를 묻는다면… 보나마나 미친놈 취급을 할 것이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보고 싶었다, 미련을 털기 위해서라도.
시혁은 정조영 회장과 헤어진 뒤 곧장 삼송생명이 있는 태평로에 도착했다. 그냥 온 것이다,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런데.
어? 이건 또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