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86화 (86/150)

86화 조문호의 지옥문

조문호는 한국대학교 법학과 85학번으로 입학했었다. 나름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했고, 3학년 때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한 이후 기세가 등등했다. 이제 2차만 합격하면 꿈에 그리던 소년등과(少年登科), 남은 인생은 탄탄대로라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어떤 지원도 없었다. 한국대학교 법학과의 기본 방침이 그랬다. 1차 합격자라고 별도로 관리하거나, 학점을 부여하거나,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 워낙 많아서 합격자의 현수막조차 걸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각자도생 하라는 뜻이었고 그게 전통이었다.

동문들끼리의 끈끈한 정? 밀어주고 끌어 주는 단결력? 그런 건 일체 없다. 오죽하면 모래알 법대라고 하겠는가. 다들 너무 잘나서 그렇다.

결국 죽도록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2차를 합격해야 비로소 목표가 달성된다. 1차를 백 번 합격해도 2차를 통과하지 못하면 도로 아미타불이다.

그런데, 2차에서 떨어졌다. 아쉽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다음 해 한 번에 한해서 1차 시험이 면제되니까 2차만 열심히 준비하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확률이 높아진다.

하아…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했건만 4학년 때 또 미끄러졌다. 이제 소년 등과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아무도 조문호를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는 온통 우주 괴물 이야기로 무성했다.

X발, 먼발치에서 봐도 후광이 가득하네. 세상 참 불공평하다. 학력고사부터 만점으로 입학하더니 2학년생이 1차 시험을 또 만점… 연이어 터진 뉴스에 의하면 행정고시도 만점, 외무고시도 만점을 받았다고 난리가 났었다. 보나마나 2차도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이리 추운데, 저놈은 2차까지 단숨에 붙어 버렸다. 점수는 관례상 공개하지 않았지만 수석이란다.

머릿속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부럽다. 저 새끼는 다른 세상에 사는구나. 나는 떨어졌는데.

조문호는 김시혁이 너무 싫었다. 아무 이유 없이 도서관에서 한 방 먹은 것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왜 저놈은 나한테 그랬을까? 아무 접점이 없었거늘.

“조문호 선배님, 여기서 공부하시나 봐요?”

“어? 으, 응, 뭐… 얼마 안 남았으니까.”

“소년 등과를 목표로 하는군요.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지.”

“소년등과 일불행(少年登科一不幸)이라는 말 아세요?”

“…….”

“옛날 율곡 이이 선생이 그랬다던데요? 인생에서 피해야 할 세 가지 불행은 소년등과, 중년상처, 노년고독… 이라고 말입니다.”

“…너, 지금 뭐라는 거냐?”

“송나라 학자 정이천(程伊川)은 소년등과 부득호사(不得好死)라고 했어요. 소년 시절에 과거 합격하면 좋게 죽지 못한다는 뜻이죠.”

“야!”

“선배는 그래도 하고 싶으세요?”

“지금 나 먹이는 거냐?”

뭐냐? 말 한번 제대로 섞어 보지 못한 처지에 느닷없이 다가와 왜 이 똥질을 하는 거냐?

“선배, 꼭 성공하세요. 2차 시험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렇게 똥을 참으면서 노력하는데 되지 않겠어요? 결과는 누구도 장담 못하지만 말입니다.”

“야! 김시혁!”

“선배, 여기 도서관입니다. 다 쳐다보잖아요?”

“……!”

“열심히 하세요. 제가 응원하겠습니다. 뽜이띵!”

“너…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빅엿을 먹이는 거냐?”

“음… 글쎄요. 그냥 선배가 마음에 안 드네요. 교활할 것 같고, 음흉할 것 같고, 남 뒤통수 치기 좋아할 그런 관상이라 할까? 하하하.”

“이 새끼, 밖으로 나와라. 아무리 시험이 목전이라 해도 너 같은 놈은 도저히 그냥 못 보겠다.”

“에이… 제 키가 185예요. 선배, 상대를 잘못 고른 거 아닙니까?”

“…….”

“어차피 떨어지겠지만, 그냥 거기 껌딱지처럼 눌어붙어서 공부해. 내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올해 안 되거든. 또 내년에도 떨어질 거야. 그리고 졸업하고 신림동 고시낭인이 되는 거지.”

“이 X새끼!”

“워, 워… 여기 도서관, 다들 보잖아. 아마 이렇게 생각할걸? 저 고약한 조문호가 애먼 신입생, 그것도 수석입학생을 잡고 몽니 부리는구나. 시험 스트레스를 왜 엉뚱한데 풀고 지랄이야?”

그 뒤로 도서관 3개월 출입 정지를 당했다. 실제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문호가 후배에게 패악질 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억울하고 분통 터질 노릇이지만 아무도 조문호의 변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설마… 만점 수집가가 그랬을 리 없어. 평소에도 성질 더러운 조문호 저 새끼 꼬장이 터진 거야. 잘됐다. 고소하다… 이랬었다.

졸지에 병신이 되고 말았다. 아닥하기에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든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다 끝났다.

저놈은 천상계로, 나는 나락으로 처박힌 것이다. 휴우! 하늘이시여…….

설마 저놈 말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 내년에 멋지게 붙어 주면 되는 거야. 비록 1차부터 다시 시험을 봐야 하지만, 나도 한국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수재 아닌가.

아자, 아자, 아자!

그렇게 일 년 더 개고생을 했다. 신림동 고시촌에 처박혀서, 재기를 꿈꾸며.

그랬는데… 이번에는 1차에서 떨어져 버렸다. 재기는커녕 당장 쥐구멍을 찾아야 할 판이다.

다행히 아버지가 작은 중소기업 사장이고, 별 부족함 없이 살아온 터라 내년을 기약하고 다시 공부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내면의 갈등.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조문호는 또 일 년을 고시원 좁은 방에서 법전만 파고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백 퍼센트 붙는다는 보장도 없는 판에.

고민하던 조문호는 지도교수를 찾아가 취업 지원서를 한 장 얻어 냈고 그 회사의 공채에 합격했다. 스펙이야 훌륭하지. 한국대 법대 졸업장이 프리패스였던 시절이니까. 거기에 약간 빛이 바랬지만 사법고시 1차 합격 전력은 훈장이었다.

그래. 조문호! 너는 할 수 있다. 어차피 한국대 법대 출신 모두 판검사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평균 30% 정도가 법조 물을 먹고 나머지 70%는 사회 각층에서 나름 잘나간다. 좀 쪽팔리지만 일찍 이쪽으로 방향을 잡고 성공하면 되겠지.

그렇게 삼송생명 총무과에 입사한 조문호.

웬걸?

복사 심부름? 거기다 커피 배달?

아무 일도 맡겨지지 않는 신입 시절은 한국대나 지잡대나 똑같네? 몰론, 시간이 갈수록 그 격차는 벌어지겠지만 당장은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적응기를 거쳐야 하는 한심한 생활.

회사 입장에서도 한국대가 아니라 하버드 졸업생이라한들 업무가 뭔지 알아야 일을 시킬 것 아닌가?

바로 프리젠테이션을 멋지게 해내고, 임원들의 관심을 받고,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직장 생활은 지잡대 대리와 과장의 따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거기다 시시때때로 울려 대는 민원 전화. 왜 보험금 안 주냐며 칼을 들이대는 조폭에 깁스 한 팔을 휘두르는 악성 보험 사기꾼 등쌀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 옛날이여! 학창 시절이 좋았어.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하려고 보니, 제기랄… 아직 과장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리도 눈치 보면서 지뢰 찾기 게임 중인데 갓 들어온 신입이 무슨 퇴근.

할 수 없이 엉덩이를 붙이고 낙서로 시간을 보내던 조문호는 문득 수첩을 뒤적였다. 오늘 이 스트레스를 받아 줄 마땅한 놈이 없을까?

오! 있었다.

언제든 부르면 쪼르르 달려와 시간을 보내 줄 골빈 여자.

반반한 얼굴 하나로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여자. 이 여자는 족발 같은 거 안 먹지. 적어도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봉골레 파스타는 사 줘야 나올 것이다.

봉천동 달동네 지지리 없는 집안, 겨우 전문대학을 졸업한 처지지만 자존감은 달 꼭대기에 있으니까. 특이한 여자였다. HOT나 젝스키스 같은 아이돌 빠도 아니고, 오로지 돈 많이 버는 야구 선수나 조문호 같은 부류만 쫓아다녔다.

영악한 거다, 자신의 처지를 남자 잘 만나 바꾸려는 뻐꾸기 알처럼.

조문호는 회사 전화로 다이얼을 눌렀다. 그리고 곧장 숫자를 입력했다.

-17717171

삐삐 세대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암호. 일명 I Love You.

바로 답이 왔다. 이 시간에 울리는 총무과 전화는 어차피 조문호가 다 받는다.

“네, 감사합니다. 삼송생명 총무과 조문홉니다. 무얼 도와 드릴까요?”

“문호 오빠, 뭔 개소리야?”

“아! 송희야, 잘 있었어?”

“흥! 통 연락도 없다가 웬 알럽유?”

“뭐 해?”

“TV 보는 중. 금동이.”

“촌스럽게 전원일기는… 밥 먹을까?”

“지금 8시거든?”

“그럼 야식.”

“살찌기 싫으니까 파스타, 콜.”

미친… 살 더쪄. 니글니글한 파스타가 무슨 다이어트 요리냐? 생각만 해도 토 나온다.

“차라리 한잔 어때?”

“디스코장?”

“야, 송희야. 요즘 세상에 누가 디스코장을 가? 나이트 클럽으로 고고씽, 오케이?”

그때부터 조문호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몸을 비비 틀었다. 저 빌어먹을 뚱뎅이 과장, 빨랑 가라고오! 그래야 대리도 지뢰 찾기 멈추고 나갈 거 아냐.

그 빌어먹을 뚱뎅이 과장은 한 시간을 더 있다가 일어섰다.

“어, 김 대리. 아직 안 갔어? 조문호 씨도 있었네. 너무 무리하지 마. 내일 하면 되는 거지. 어여 퇴근들 해.”

몰라서 묻냐? 뚱뎅아. 뻔히 알면서 먼저 가라 말 한마디 안 하던 놈이.

그렇게 헐레벌떡 로비를 가로질러 현관 앞으로 나온 조문호. 최송희는 잔뜩 볼이 부어 있었다.

“뭐야? 조신하게 살림 배우는 여자를 불러 놓고?”

“미안, 미안. 내가 유망주라서 말이야. 회사에서 놔주질 않네. 겨우 회의 끝났어. 가자.”

“에이… 씨.”

“야, 딱 좋은 시간이다. 10시는 넘어야 나이트 조명이 더 선명해지는 거 몰라?”

그때, 시혁은 넋을 잃고 최송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리고 뒤이어 뛰쳐나온 너는… 조문호?

큭큭큭! 그랬던 거야? 너희들, 그런 사이였었어?

그런데 조문호, 너는 그런 관계의 최송희를 나에게 소개시킨 거네?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내려서 둘의 귀뺨을 날리고 싶었지만, 저들은 아직 모른다. 미래를.

조문호와 최송희도 현관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보았다.

“와! 그랜다이저, 언제 저런 차를 타 보나?”

“흥이다. 우리 회사도 사장님만 타는 차다. 그런데 누구지? 번호가 희한한데?”

“7777. 멋지다. 누군지 몰라도 진짜 돈 많은 사람이겠지?”

“당근이지. 지방이라면 작은 집 한 채 값이야. 우리는 줘도 못 타. 저런 차는 기사 없으면 안 되거든.”

“부럽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저런 멋진 차를 타는 걸까?”

“그만 가자.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봐야 가랑이 찢어진다.”

“문호 오빠, 나는 꼭 저런 차 타는 사람과 결혼할 거야. 한 방에 인생 역전 하는 거지.”

“너, 그 꿈 아직도 못 버렸냐? 신데렐라도 12시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데. 그냥 아무 곳이나 취직부터 해.”

“아이고… 누구 코에 붙이려고. 한 달 뼈 빠지게 경리 해 봐야 진짜 쥐꼬리 같은 봉급.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그래. 안 말리 마.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꿈이라도 거창해야지. 오늘은 나이트 가서 죽도록 흔들어 보자. 오빠 기분이 엿같거든.”

“그다음은?”

“흐흐흐. 새삼스럽게 내숭 떠는 거야? 내일 아침에 헤어지는 거지. 너는 꿈을 이뤄 줄 남자를 찾아서 가고, 나는 출근하고.”

시혁은 다 들었다.

차라리 안 들었으면 좋았으련만.

차라리 오늘 여기에 안 왔어야 했어.

조문호와 최송희가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어야 했다.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는 내 사랑하는 아이 혜림이가 더럽혀진 기분, 비록 이번 생에서 볼 수 없다 해도 그 아이와의 추억을 간직하며 행복했을 텐데.

“쁘드득, 문호야, 문호야. 너는 끝내 지옥문을 열고 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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