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비공식 그룹 회의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당시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충격도 훨씬 더 컸다.
-K 타워, 준공. 아시아 최고 높이에 최대 연면적을 자랑하는 K 타워가 드디어 준공되었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세계 만방에 알린 국내 초고층 빌딩이지만 세간에서 우려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 큰 건물에 입주할 세입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오늘 K 타워 총괄 박하송 사장(23)에 따르면, K 타워는 40층까지는 일반 분양이나 임대를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여기서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럼 텅 비워 둔다는 말인가?
-아니었다. K 타워는 젊은 창업인, 발명 특허권자, 좋은 사업 모델을 가진 초기 스타트업 기업인, 특히 아이디어만 가진 대학생들에게 무료로 공간을 나눠 준다고 발표했다.
-K 타워에는 입주 기업들을 위한 부가 서비스를 완벽히 갖출 계획이라 한다. 팩스, 복사는 각 층마다 공용으로 비치해 언제든 이용할 수 있으며, 두 개 층에 모두 수백 개의 회의실을 마련해 입주사들이 신청만 하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수십 명에 달하는 상주 변호사의 법무 서비스, 전문 회계사 집단의 세무 회계 서비스, 전직 고위 공무원과 기업가로 구성된 고문단의 경영 진단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놀라기는 이르다. 지하 1층, 6천 평 넓이의 식당에서는 대학교 학식 가격에 24시간 열린 부페 식당을 운영한다. 미리 입주사들은 한 장당 500원짜리 쿠폰을 구입하면 언제든 삼시 세끼를 먹을 수 있으며, 한 편에 대형 사우나도 열려 있다.
-한마디로 K 타워 안에서 기업 활동을 위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판 실리콘밸리가 아닐 수 없다. 놀라운 발상이다.
-앞으로 6개월간 신청을 받고, 사업 성과 기술성 분석을 거친 후 입주자를 결정할 것이라 한다. 이런 멋진 빌딩에서 마음껏 연구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각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공간… 이것이 K 타워를 만든 목적이라 밝혔다.
강남이었다. 벌써 그곳은 별세계처럼 변하고 말았다. 기존 거주민은 종적을 감췄고, 서울에서도 돈 꽤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버렸다.
그런 강남땅, 그것도 삼성동역을 바로 앞에 두고, 아시아 최고층 빌딩 K 타워를 공짜로 쓸 수 있다는 말에 창업을 꿈꾸는 모든 이들과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스타트업 기업들이 들썩거렸다.
은행처럼 복잡한 서류와 담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사업성과 기술력, 미래 비전 세 가지만 본다. 그중에 하나만 확실해도 입주가 가능하다.
야, 김시혁. 다 좋은데, 이거 유지 관리비는 어떻게 할 건데?”
“아몰랑, 네가 알아서 해야지, 새끼야.”
“내가 무슨 재주로?”
“빨리 밖에 가서 500원씩 구걸해 와.”
“…그, 그, 그 돈으로 될까?”
“아니면 할머니 돈 훔쳐 오던가.”
“마구니 새끼, 할머니 병원에 계신다. 전 재산을 다 재단에 넣으셨고. 나 거지야.”
“너, 제발 회사에서는 500원 하지 마. 내가 쪽팔려서 얼굴을 못 내밀겠다.”
“안 해. 나도 체면이 있지.”
“좋게 말할 때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마라. 공사홍 삼촌에게 매일 삥 뜯는다며?”
“삼촌은 다르지 않냐? 직원이 아니잖아, 삼촌인데.”
“차라리 오천 원씩 달라고 해, 새끼야. 삼촌도 너를 또라이로 보거든?”
변함없는 박하송. 언제든 이 새끼 저 새끼 해도 욕으로 들리지 않는 친구다.
“지원자는 좀 늘었냐?”
“…너 회장 맞아?”
“대답은 안 하고 새끼가 회장님한테 질문질이야?”
“미친! 하루에 오천 건씩, 지금 일주일 동안 삼만 건 이상의 입주 신청이 왔다. 이걸 심사하는 직원들이 겨우 백 명이야, 회장 놈아!”
“그래? 한 사람이 하루에 열 건씩 1차로 걸러 내면 하루에 천 개 회사, 석 달 만하면 되겠네?”
“우리가 로봇이냐? 휴일도 없이 일만 해? 그리고 심사하는 동안 또 지원서가 밀어닥칠 텐데, 이건 어떡하고?”
“박 사장, 심사 직원들에게 전해. 6개월 만 죽어라 고생해 주면 전원 300% 특별 보너스 지급한다고. 보상은 확실하게 해 준다. 알았어?”
“나도 해당되냐?”
“그럼, 너도 준다.”
“회장님,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로봇입니다. 충성!”
* * *
산드라는 결국 원하는 물량을 손에 넣었다.
세븐시스터즈의 주식을 움켜쥐고 있던 투자은행들은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라크가 최후의 발악으로 쿠웨이트의 모든 유정에 불을 지른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석유는 채굴과 운송, 정제, 판매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톱니바퀴처럼 촘촘하게 짜여져 움직인다. 운송할 파이프 라인이나 유조선 없이 무작정 퍼내다간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결국 최종 목적지에 도착해서 정제하고 판매하는 생태계까지가 공고한 상품인 것이다.
거기다 세븐시스터즈의 경영진들이 노골적인 태업, 석유가 없어서 장사를 못하겠다고 버티는 상황이 아닌가. 지금 처분하지 못하면 나중에 어디까지 떨어질지 감도 안 온다.
전염력이 가공할 정도로 강한 것이 공포다.
베어스턴스라는 월가 5대 투자은행이 먼저 제안서를 제출하자, 나머지 모든 은행이 줄을 이었다.
구입 자금은 정해져 있다. 아예 150억 달러라고 공표를 해 버린 것이다. 거기에 들지 못하면 팔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거기에 들려면… 무조건 더 싸게, 더 저렴한 가격에.
경매란 조금이라도 더 비싼 가격을 쓰는 놈이 낙찰 받는 것인데… 여기는 상대방보다 더 싸게 적어야 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저 새끼, 얼마를 적어 냈을까?
그들에게 보여 주는 산드라의 미소, 소름이 오싹 일었을 것이다.
[회장님, 돈 다 썼어요.]
“잘했어, 산드라.”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말투네요?]
“더 없는 게 아쉬워.”
[얼마나 거뒀는지 궁금하진 않아요?]
“이제 말할 거잖아?”
[…쳇! 엑슨모빌 57%, 물론 헨리 회장이 양도한 15%를 합해서요. 쉐브론 52%, 코노코필립스 56%… 하여튼 세븐시스터즈 전체 평균 54%는 회장님 거예요.]
“잘했어, 산드라.”
[나, 떨려서 죽을 뻔했단 말예요. 칭찬이 약해.]
“아주아주 잘했어, 산드라.”
[악당!]
“산드라, 아직 장거리 비행기 일등석 안 타 봤지?”
시혁의 주위로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조직 개편이 필요해졌다. 지금껏 모두 시혁의 원맨쇼로 지탱해 왔던 것이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다 모아 보자.
그렇게 마련된 자리였다. 시혁의 연락을 받고 한국으로 무수히 많은 이가 모여 들었다.
“아마 오늘 처음 보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비록 전공 분야도 다르고, 사회적인 지명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분들도 있습니다. 또 아직 껍질을 깨지 못한 분일 수도 있죠.”
“…….”
“하지만, 우린 모두 한 가족이라는 걸 명심하십시오. 한국 말로 이를 식구라고 합니다. 먹을 식(食), 입 구(口), 즉 같이 밥을 먹는 사람… 우리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
“한 분씩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
“우선 우리 K 미르 그룹의 최고 어른이자 고문을 맡아 주신 분입니다. 현도그룹의 정조영 명예회장님.”
엄청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외국에서 온 이들도 한국 1위 재벌인 현도그룹 정조영 회장은 익히 알고 있다.
“지금부터는 각 기업별로 소개토록 하겠습니다.
-일본 소프트파워의 손창의 사장입니다.
-일본 K 글로벌 재팬의 이끼 다다시 사장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미국 엑슨모빌의 헨리 제리코 회장입니다.
-미국 쉐브론의 마샬 브라운 회장입니다.
-미국 코노코 필립스의 마크 리버 회장입니다.
-영국 BP의 리처드 레드포드 회장입니다.
-영국 로열 더치 쉘의 월리엄 쉘던 회장입니다.
-프랑스 토털에너지의 루이 자그레브 회장입니다.
-이탈리아 에니의 지오바니 조제페 회장입니다.
여기서 입이 떡 벌어진 참석자들. 말이 돼?
-미국 K 글로벌 USA의 존 메리웨더 대표입니다.
-미국 컬컴의 어윈 제콥스 대표와 스테판, 폰티악 부사장입니다.
-미국 엔바디아의 젠슨 홍 대표와 커티스, 크리스 부사장입니다.
-미국 CMM의 버트 라인하트 대표와 러셀 홀스타인 보도국장입니다.
-대만 TSMD의 모린 창 회장입니다.
이 사람들도 익히 들어 봤다. 특히 이라크전 이후 미국 언론계를 씹어 먹고 있는 CMM… 저 회사도 같은 그룹사였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K 미르 그룹 임원진을 소개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공사홍 부회장입니다.”
아… 저분이구나. 지금껏 음지에서 조용히 김시혁 회장을 보필하고, 절대 앞에 나서지 않았던 K 미르 그룹의 2인자.
“그룹 비서실장 산드라 리페어입니다.”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저 여자다. 철혈의 변호사로 불리는 마이다스 킴의 대리인. 피도 눈물도 없다는 산드라 리페어가 비서실장으로 불리자 세븐시스터즈 회장들은 눈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치가 떨린다. 왕창 털리고, 협박당하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잡아 처넣겠다는데 도리가 있나? 말을 들으면 살려 주겠다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방긋 방긋 웃으면서 칼날을 날리던 그 여자.
“그룹 안보실장 윌슨 잭 다니엘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임원 소개가 끝나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사실 세븐시스터즈 회장들도 킴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자기들이 전부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분야의 회사들이 K 미르 그룹이라는 이름 아래 있을 것이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숨이 멎은 것은 컬컴이나 엔바디아 구성원들, 너무 놀라 넘어갈 정도였다.
후와! 전 세계 석유의 절반을 쥐고 흔드는 세븐시스터즈가 우리와 같은 식구? 보스가 이런 분이었구나. 어쩐지 아낌없이 지르더라. 충성!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경영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조력자를 소개합니다. 제 친구이자 K 미르 그룹 총괄 박하송 대표입니다.”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는 박하송.
정조영 회장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회장 김시혁과 비슷한 연치의 박하송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의례적인 박수만 터져 나왔다.
친구 잘 만나서 졸지에 벼락출세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그럴까?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 시혁 못지 않게 한국에서 엄청난 일을 벌여 놓은 인물이다.
나중에 산드라가 맡은 악역을 뛰어넘어 악마의 단두대라 불릴 박하송의 데뷔 무대였지만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탓에 둥글둥글하게 보일 뿐.
할머니가 누구였나? 한국 증권시장 초창기 30%를 쥐고 흔들었던 백할머니, 단 한 명이 한 나라의 주식 시장을 쥐락펴락 했던 것은 세계사에 전례가 없는 일.
그 피가 어디 가지 않는다.
“우리 K 미르 그룹은 각 계열사 간의 경영 간섭을 자제할 생각입니다. 너무 다른 분야들이 모인 만큼 이를 하나의 규칙 아래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합니다. 단!”
회의실에 모인 회장과 대표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부터 나올 말이 진짜다.
“그룹 차원에서 어떤 목표를 정했을 때, 또는 공통의 적이 나타났을 때, 제가 결정한 안건이 있을 때… 이에 반하는 행동은 용납치 않겠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설사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통일된 자세를 견지하길 당부드립니다.”
“…….”
“앞으로도 여러 분야의 회사가 그룹에 편입될 것입니다. 국가도 다르고, 사업 분야도 다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한 가족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렇게 다양한 회사들이 모이고 모일수록 더 단단한 결속력을 보여 주세요.”
“…….”
“조금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건 겪어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각 회사 간 시너지를 낼 날이 곧 다가옵니다. 세계는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유래가 없는 혁명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 미래에 대비하지 못하면 공룡이 멸종되듯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한발 앞서서 변화하면 우리는…….”
“……!”
“어쩌면 이 세상을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전무후무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다가올 미래를 맞이하기를 총회장으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모르겠다, 솔직히 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지만 왠지 가슴이 뭉클하다. 참석한 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