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믿음과 신뢰 사이
“한국에 들어왔다고?”
“예, 실장님.”
“뭐 하고 있나?”
“좀 의외였습니다.”
“자세히.”
“삼성동에 현도건설이 시공한 아시아 최고층 빌딩이 준공되었습니다. 아십니까?”
“그걸 모르는 한국 사람이 어디 있나? 어떤 돈지랄하는 외국 회사가 입주 기업들에게 무상으로 40층까지 나눠 준다고 기사가 났었잖아?”
“네. 그 미친 외국 회사의 오너가 김시혁입니다.”
“……!”
“사실입니다. 버진 아일랜드에 주소지를 두고 있지만 실상 K 미르 컴퍼니 오너가 그놈이었습니다.”
“썅! 미친! 겨우 23살이야.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그렇지. 말도 안 돼!”
“실장님, 지금 그곳으로 세계 유수의 회사 회장들이 모여 들고 있습니다. 다 파악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봐, 백정태 팀장. 미국에서 물먹은 건 이해하겠어. 거긴 그런 나라니까. 하지만 여긴 한국이야. 나보고 그걸 믿으란 말이야?”
“실장님, 저는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한 사실만 보고드리는 겁니다. 판단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
“어쩌면 김시혁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놈에 대한 대응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으음… 사실이라고 치자. 어떻게?”
“우선 스타트업으로 가장한 우리 사람을 침투시켜야 합니다. 좋은 아이템을 이용해 두각을 나타내면, 자연스럽게 그곳 경영진의 눈에 들 것이고, 김시혁에게도 접근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아냐,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차라리 자네 팀이 한국에서 정리하는 것은 어떤가? 여기는 어떤 짓을 해도 다 커버가 가능한 우리 바운더리 아닌가?”
“당연히 그쪽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도 치욕을 갚아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된통 당했지만 놈은 혼자가 아닙니다. 저도 장담치 못하는 프로가 옆에 있습니다. 어쩌면 조직일 수도 있고요. 또 미국 대통령의 비호를 받는 놈입니다. 저는 저대로 할 테니, 실장님은 장기 프로젝트를 따로 가동하는 게 옳을 것으로 보입니다.”
“큰일 났네. 회장님께 어떻게 보고를 드리지? 자네, 회장님께 같이 가세. 직접 말씀드려.”
여우 같은 이학소 실장. 매를 나눠 맞으려고 방패를 세우는 것이다. 백정태도 나쁠 것이 없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회장의 존안을 또 볼 수 있겠나?
“…….”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놈의 동선이 너무 은밀해서 조금 늦게 파악되었습니다.”
“조금?”
“…네. 많이 늦었습니다.”
“허어, 믿기 힘들군. 불가능한 일이야. 겨우 3년 만에 그런 제국을 건설했다고?”
“네, 그에 대한 건 여기 백정태 팀장이 따로 보고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동행했습니다. 말씀드리게.”
“그래, 백정태 팀장. 경영전략실 비상 기획팀장이라고? 해 봐, 더함도 뺌도 없이.”
“네, 회장님. 제가 김시혁을 처음 만난 것은 1학년 때입니다. 당시 실장님의 지시로 김시혁을 데리러 갔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부른 것으로 기억합니다.”
“응. 기억나네. 안 왔지. 보기 좋게 거절 당했어.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서 총장실을 빌려 만난 거고.”
“네. 다음이 미국에서였습니다.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결론은 무참히 당하고 왔습니다. 그때도 놈과 통화만 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네. 회장님. 모두 제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모를 리 없다. 그래도 일단 오물을 자기가 지시했다고 할 수 없는 일. 백정태도 너무 잘 안다.
“그 뒤로 저는 제 옛날 동료들을 통해 놈을 계속 추적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을 왕래했다는 것은 그간의 출입국 기록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부시 대통령과 같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건 다 아는 사실이고.”
“네. 그때 비로소 저도 표적의 범위를 좁힐 수 있었습니다. 주로 미국의 지인들, CIA와 FBI 쪽 친구들을 통해 동선 추적에 나섰습니다. 예산의 한계 때문에 더 디테일 한 부분은 파고들지 못했지만요.”
이 부분에서 이건호 회장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이학소 실장은 똥 씹은 표정으로 회장의 눈을 피했다.
“계속해 보게.”
“부시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로 보입니다. 놈은 지금 공식적으로 차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책 특보라고 불리지만 실질적으로는 백악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흐으음.”
“또 놈은 부시의 특보라는 직위를 이용해 사우디의 왕세자와 오만 국왕을 만났습니다. 확인된 겁니다. 다만, 어떤 이유로 만났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사우디와 오만? 석유 거래를 한 것인가?”
“저는 백 퍼센트 확인된 사항만 보고 드리는 겁니다, 회장님.”
“더 듣고 싶네.”
“일주일 전 삼성동의 K 타워 준공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놈이 현도그룹의 정조영 회장과 같이 테이프 커팅식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보통 관계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현도 영감?”
“네. 그 뒤 어제 갑자기 엄청난 국제적 거물들이 한국으로 입국하여 모두 K 타워로 향했습니다.”
“누구누구야?”
“우선 세븐시스터즈의 7개사 회장들 그리고 CMM의 사장과 보도본부장, 엔바디아와 컬컴이라는 IT기업과 대만 TSMD 회장도 참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잠깐! 다시 이야기해 봐. IT업체 어디라고?”
이건호 회장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파랗게.
“예, 제가 파악한 바로는 엔바디아의 대표와 부사장들, 컬컴의 대표와 부사장들 그리고 TSMD의 회장이 참석했습니다만.”
“……!”
“회장님,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제기랄… 이놈이 나를 타깃으로 삼았구나.”
“예?”
“컬컴이 이동통신의 원천 기술 CDMA(코드 분할 다중 접속)를 개발한 회사야. 얼마 전 한국전자통신원과 계약을 체결했단 말이야. 우리 삼송 핸드폰은 어쩔 수 없이 컬컴에 막대한 로열티를 물면서 생산하는 지경이고.”
“……!”
“그리고 TSMD는 이미 파운드리 시장에서 우리와 경쟁 관계야. 겨우 시작 단계지만, 차후 어마어마한 공룡이 될 게 틀림없어.”
이건호의 예상은 틀림없었다. 그의 동물적인 촉이 발동한 것이다. 역시 그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기술적으로 핸드폰 시장에서는 컬컴에게 종속되고, 반도체 분야에서는 TSMD와 피 터지는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김시혁이 쥐고 있다면? 한마디로 잉어 꼬리 잡히는 꼴이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은 제가 파고들 수 없었습니다. 이 정도도 로비의 인포 여직원을 구워삶아 알아낸 것입니다.”
“이학소, 너 당장 백 팀장 자금 한도 락을 해제해. 무한대로 주란 말이야. 도대체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 일의 선후와 중요성에 대해서 판단할 정도의 뇌가 없어?”
지금껏 이런 막말을 회장에게 들어 본 적이 없던 이학소 실장은 죽을 맛이었다. 괜히 저 새끼를 데려왔구나. 혹 떼려다 큼지막한 혹을 더 붙이고 말았다.
“백 팀장, 자네는 지금부터 회장 직속이다. 놈에 대한 모든 것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최우선으로 보고하도록 해.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백정태에게 날개를 달아 준 이건호 회장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진땀이 축축할 정도로 흐른 것이다.
벌써 호랑이가 산으로 튀어 버렸다. 우리에 가둬 놓고 사육을 하던가, 아니면 굶겨서 죽여야 했어. 큰일 났다. 이제 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물려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칠 상황까지 내몰렸다.
당장도 문제지만, 아… 저 어설픈 아들놈. 방어할 수 있을까?
“회장님, 허락을 득할 일이 있습니다.”
“뭔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지침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상당한 무리수가 동원될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끝까지 가자. 백 팀장, 네 생각이 내 생각이다. 어떤 일이 생겨도 뒷감당해 주마. 다만, 확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한 거사는 역사로 남지만, 실패하면 야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도록.”
성공하면 책임을 지겠다. 그러나 실패하면 나는 모른다. 이거네?
까짓것, 어차피 김시혁과는 묵은 원한이 있다. 좋든 싫든 목을 내놓고 부딪쳐야 한다. 그런 판에 회장의 말은 보험이 아닌가.
회장실을 나서는 백정태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조명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보험은 완벽하게 들었다. 비릿한 백정태의 미소를 이건호도 이학소도 보지 못했다.
백정태는 지금도 그 목소리만 떠올리면 심장이 따끔거리도록 쫄리곤 했었다.
수많은 사선을 넘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백정, 기억해. 다음에 만나면… 너는 죽는다.’
* * *
며칠 동안 정신이 없었다. 각 회사 경영진을 차례대로 만나야 했다. 때로는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때로는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아직 완전하게 한 몸이 되지 못한 어중간한 관계. 법적으로는 손아귀에 들어왔지만 언제든 도망갈 생각이 가득한 세븐시스터즈가 대표적이었다.
사실 억지로 취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처음에는 사우디와 오만의 석유를 쥐고 미친놈처럼 겜블을 걸었고,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무리수를 동원한 셈이었다.
물론, 겜블은 보기 좋게 시혁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장악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최악의 순간에 세븐시스터즈 회장들이 모든 걸 내려놓고 ‘배 째라’를 시전했다면 난감했을 것이다.
회사를 파산시킬 수도, 모든 회장을 감방에 처넣기도 쉽지 않은 일. 이번 겜블은 회장들의 노욕에 적당한 공포를 버무려 항복하도록 만드는 것이 화룡점정이었다.
그 악역을 맡아 거침없이 철퇴를 휘두르다가, 달콤한 꿀로 꼬드기는 역할을 해 준 산드라. 아무도 산드라의 본 모습이 약간 맹하고, 머리도 며칠씩 안 감는 워커홀릭이라는 걸 모른다.
“헨리 회장님.”
“네. 총회장님.”
“눈빛이 살아 있군요. 제가 그래서 헨리 회장님을 높게 봅니다.”
“……!”
혹시? 눈치챘나? 아무리 곱씹어도 칭찬은 아니다.
헨리 제리코는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산드라가 약속한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지킵니다. 회장님이 생존해 계신 이상 경영권을 보장한다고 했습니다. 부족하십니까?”
“아닙니다. 패장을 이리 우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요? 진심이길 바랍니다.”
“…….”
“거기에는 단서 조항이 있었죠. 지주사의 지침에 반하지 않는다. 저의 합리적 지시에 순응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기억하십니까?”
“네. 이면 합의서에 분명히 명시된 부분입니다. 저 헨리 제리코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약속드립니다.”
“그래요. 제가 먼저 헨리 회장님을 끌어내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 일단 믿어 보죠.”
서로 주고받는 말의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조금만 뜯어 보면 전혀 다른 동상이몽.
눈빛이 살아 있다는 시혁의 말은 ‘아직도 반항하는 거냐?’라고 읽힌다. 또 살아 있는 동안 회장의 자리를 보장한다고 했고, 먼저 당신을 끌어내리지 않겠다고 했고, 일단 믿어 본다고 했다.
단, 당신이 배신하지 않을 경우다.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이 아니라 일단… 믿어 보겠다는 의미. 헨리가 모를까?
헨리의 숙인 눈빛은 더 가늘어졌다. 그런 헨리를 바라보는 시혁의 눈빛도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거대한 댐은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거기 때려 박은 철근과 콘크리트가 얼만데.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댐도 개미구멍이 뚫리는 순간, 크랙이 가고 이를 중심으로 터지게 되어 있다.
시혁은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구멍을 뚫는 개미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개미도 댐 주인 시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둘은 서로 격려하고 신뢰하는 척하는 것이다.
[보스, 공사가 끝났습니다.]
“…….”
[이제 몰아넣으면 됩니다. 지시만 하십시오.]
“윌슨, 한국에서 아직 못 한 일이 있어. 조금 기다려.”
[네. 명대로.]
시혁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꼭 정리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시혁을 붙잡고 있던 그 존재… 미련을 털기 위함이다. 더불어 목구멍에 달라붙은 가래처럼 진득한 구원도 털어 내야 했다.
‘문호야, 조문호야. 가끔 말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기도 하더라.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