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조문호는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회사에서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지만 최소 대리, 어쩌면 과장으로 점핑 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제 갓 공채로 입사한 신입이 주임, 계장직을 건너뛰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대리? 과장?
하지만 아무도 여기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투였다. 진득한 부러움과 함께.
화장실에서 급똥을 싸고 있을 때 들리던 소리.
-야, 조문호 말이야.
-응, 후배 잘 만나서 용 된 사나이 말이지?
-부럽지 않냐? 그래서 한국대 한국대 하나 봐.
-아냐, 나도 비록 한국대는 아니지만 스카이를 나왔는데, 듣기로 한국대 법대는 유명했어.
-그 말이 그 말이지. 동문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고. 죽이는 스토리잖아?
-염병하네. 법대는 너무 잘난 놈들이 모여서 각기 제 팔 흔들고 사는 곳이야. 오죽하면 모래알 법대라고 하겠냐?
-근데, 이번에 K 미르 그룹? 하여튼 거기 사장은 왜 선배랍시고 알뜰히 챙기는 거지?
-어디나 별종은 있는 법이니까… 또 모르지. 거기 박 대표라는 사람이 조문호에게 큰 신세를 졌던가.
-부럽다. 사람 인생 한 방에 역전이네.
-야, 명색이 한국대 법대야. 그리고 조문호는 고시도 1차 합격한 놈이라고. 시간이 가면 자동적으로 우리 머리 위로 직행할 놈이야.
-그 시간조차 단축하니까 하는 말이다. 바로 대리 9호봉을 준다고 하던데? 기획실 동기에게 들었어.
-하긴, 바로 과장시키기는 그렇겠다. 아직 업무 숙련도가 꽝일 테니까. 그래도 대리 9호봉이면 일 년 정도 비서실에서 돌다가 바로 과장 다는 거네. 20대 중반에 과장이라… 최연소 임원까지는 확정적이네.
-헹, 그 정도면 그룹 차원에서 관리하지 않을까? 이거 본계약 사인만 마치면 바로 천상계로 직행할지도 몰라.
-그리고 보험 계약에 따른 인센티브가 장난 아닐 텐데?
-일반적인 보험 판매직이라면 초대박으로 받겠지. 조문호는 직원이잖아… 그래도 별도로 챙겨 줄걸? 적은 금액은 아닐 거야.
-아… X바, 배 아파 뒤지겠다. 사촌이 밭을 산 게 아니라 금광을 발견해 버렸네? 제기랄. 왜 나는 저런 거물 후배가 없는 거냐?
-그나저나 조문호 왕따시킨 과장하고 대리 말이다. 지금 심장이 쫄깃쫄깃하겠다. 크크크.
-말이라고? 아까 봤는데 거의 옥상에서 줄담배로 시간 때우더라. 사무실에서 눈도 안 마주칠걸?
-둘 다 흙수저에 지잡대 출신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최상위 포식자 한국대 법학과가 떡하니 신입으로 들어오니 내심 배알이 뒤틀렸겠지. 한편으론 이해된다.
조문호도 무협지와 지뢰 찾기가 괘씸한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이것들이 나를 의도적으로 왕따시킨 거네? 업무도 안 맡기고 계속 복사기와 커피 머신으로 만든 이유가 질투 때문이라고?
그래, 이 못난 새끼들. 꼭 갈아서 마셔 줄 테다. 나는 너희 같은 놈들과 태생이 달라. 박하송의 K 미르 그룹이 있는 한, 알아? 이 쭈구리들아. K 미르 그룹이 내 뒷배라고.
벌써 사장님과 몇 번 만났는지 알아? 어제는 같이 점심 먹고 사우나도 갔어. 홀랑 벗고 남자들끼리 땀을 뺀다는 게 어떤 건지… 알 턱이 없지.
내가 엉? 그런 위치에 있다, 이거야.
흐뭇하다. 뒷담화를 들었지만 나쁘지 않아. 가뿐한 기분으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중 울리는 핸드폰.
아… 이 가스나. 귀찮게 엉겨 붙네.
[오빠, 요즘 연락이 뜸하다?]
“송희야, 오빠 바쁘다.”
[헐! 또 까인 거야? 신입 주제에 뭐 그리 바쁜 척하는 건데?]
“야, 야, 옛날의 조문호가 아냐. 삼송의 떠오르는 신성이 바로 오빠라고. 내일 계약만 끝내면 얼굴 보기 힘들걸?”
[또라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오늘 나이트 가자.]
“하아… 너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그만 끊자.”
[X바, 나는 오빠한테 뭔데? 심심풀이 땅콩이냐?]
“아냐, 땅콩은 삼키기라도 하지. 너는 그냥 껌이야, 심심풀이 껌.”
[개자식, 너는 아웃이야.]
“송희야, 아웃은 약한 쪽에서 하는 게 아냐. 쯧쯧쯧. 잘살아.”
실제로 오늘은 세상이 망해도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었다.
이 모든 행복을 만들어 준 귀인과의 만남이.
조문호는 히죽히죽 웃으며 몇 가지 서류를 챙겼다. 대외비라는 빨간 도장이 찍힌 서류도 같이.
* * *
삼송생명 사옥. 모두 22층 사장실 동향에 귀를 쫑긋거렸다. 오늘은 삼송생명 역사상 단일 규모로 가장 큰 계약이 이뤄지는 날이다.
물론, 대기업들이 삼송에 여러 가지 직장인 단체 보험을 몰아준 전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 세대보다 나이가 꽉 찬 장년층 직원이 포진된 것과 이번 계약은 차원이 달랐다.
가입자 전원이 생생한 심장과 튼튼한 몸을 가진 젊은 층들이다. 한마디로 생명보험금 나갈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말이다. 다 수익으로 봐도 무방하다.
매년 백오십억 이상을 자동으로 버는 계약,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하필 약속 시간이 12시 정각. 아마 기분 좋게 사인하고 근처에서 식사를 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외근 직원을 제외하곤 모두 비상 대기 지시가 내려왔다.
드디어 12시.
삼송생명의 현관으로 이름도 찬란한 그랜저 두 대가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장은 재깍 차문을 열었다. 그 옆에 같이 서 있던 조문호는 내리는 박하송을 향해 활짝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박하송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전에는 제가 너무 사적으로 대화를 했었죠? 오늘 삼송생명 대리 신분으로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아이고, 선배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한 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 아닙니까?”
해병대냐?
박하송은 비서실장과 조문호의 영접을 받았지만…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아! 뒤 차량에 K 미르 그룹 회장님께서 타고 계십니까?”
“네. 잠시 전화를 받느라… 조금만 기다리시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 분을 쪼개 쓰시는 분일 텐데요.”
조문호도 궁금하기는 했었다. 도대체 박하송을 그 엄청난 회사의 대표이사로 임명한 회장이 누군지.
가만있자… 저 차 낯이 익은데? 흔한 번호판이 아니다.
서울 가 7777? 어디서 봤더라?
먼저 조수석에서 전에 왔었던 금발의 미녀가 내리더니 뒷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이윽고 내린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란 이는 다름 아닌 삼송생명의 비서실장이었다.
이정필 전무?
이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영감이 왜 저기서 내려? 뭔가 잘못되었다.
사색이 된 이는 비서실장 혼자가 아니었다. 조문호는 아예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
영감 한 명을 앞세우고 뒤이어 내린 사람. 처음에는 머리 하얀 저 영감이 회장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박하송의 말에 영혼이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회장님, 여기 우리 동문 선배 아시죠? 85학번 조문호 선배가 여기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아! 기억납니다. 1차 패스하고 연기처럼 없어진 분. 안녕하세요? 조문호 선배님.”
“…….”
“회장님, 이분은 삼송생명 비서실장이십니다.”
“네, 김시혁입니다. 실장님.”
“…….”
실장도 조문호도 시혁의 인사를 제대로 받을 정신이 없었다.
실장은 먼저 차에서 내린 노인 때문에. 조문호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김시혁 때문에.
“참, 소개드립니다. 제가 보험업계를 너무 몰라서 조언해 줄 어른 한 분을 모셔 왔죠. 전 동방보험 전무를 역임하셨던 이정필 선생님입니다.”
“…….”
“오랜만일세, 곽 부장. 이제는 곽 실장으로 불러야 하나?”
“…….”
스산한 가을 바람이 사옥을 감싸고 지나갔다. 오늘 하루, 쉽지 않은 날이다, 삼송생명에게는.
역시 똑같은 반응. 사장실에서 기다리던 기획이사와 총무이사, 특히 여맹구 사장의 얼굴은 납처럼 굳어 버렸다.
“분위기가 왜 이렇죠? 오늘 계약하러 모인 즐거운 날 아닌가요?”
“…네. 김시혁 회장님. 귀한 분을 모셔 놓고 실례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죠.”
괜히 사장을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신색을 회복한 여맹구는 시혁에게 맞장구를 쳤다. 사인만 받으면 끝난다. 그게 장땡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
“오랜만이오, 여맹구 사장.”
“…네, 이정필 전무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덕분에 아주 잘 있습니다. 세탁소가 밥 먹고 살기 나름 괜찮아요. 제 처남이 삼송에게 큰 신세를 졌습니다. 꼭 인사를 전해 달라 하더군요.”
“……!”
빌어먹을, 대량 발주를 해 줄 것처럼 이정필 처남을 꼬드겨 공장 확장을 시켜 놓고, 막판에 온갖 트집 거리를 잡아 망하도록 했었다. 돈이 없는 처남이 이정필에게 손을 벌리도록 공작까지 해 놓고.
거기에 삼송의 이름은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계열사의 1차 밴더 업체에 압력을 넣어 차도살인을 쓴 것이다. 그렇다고 눈치 못 챌 이정필이 아닐 터.
여맹구가 오금을 저리는 이유였다. 그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본인이니까.
비수가 가슴에 꽂힌다.
“자, 점심시간입니다. 더 늦기 전에 계약서를 한번 볼까요? 먼저 초안을 받아 보긴 했습니다만, 제가 너무 몰라서요. 이 선생님, 매의 눈으로 살펴 주십시오. 2만 5천 입주사 직원 모두가 관련된 문제입니다.”
“…….”
기획이사도 감을 잡았다. 몇 차례 보낸 계약서 초안을 꺼내면 절대 안 된다. 이정필이라는 전문가가 중간중간 숨겨 둔 문구의 함정을 못 찾아낼 리 없다. 그는 한국 생명보험업의 기초를 만든 사람.
잽싸게 플랜 C로 준비한 서류를 꺼내 각자의 앞으로 돌렸다. 괜히 관리의 삼송이 아니다. 온갖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A, B, C, D안을 준비해 둔 것이다.
기획실의 전 직원과 핵심 관계자들 외에는 알 도리가 없다. 이건 흠집 잡을 부분이 별로 없는 안이다. 비록 처음보다 수익은 많이 줄어들겠지만.
“회장님, 초안과 지금 제시된 계약서가 판이합니다. 삼송생명 입장에서 양보를 꽤 했군요.”
“그렇습니까? 이 선생님, 그럼 사인을 해도 무방하단 말씀이네요?”
“네, 모든 것은 회장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나쁘지 않은 설계안입니다.”
여맹구 사장과 기획이사, 비서실장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정필의 독사 같은 눈을 피했다. 조금 덜 먹더라도 성사시키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다.
“그런데요.”
만년필을 꺼내 뚜껑을 벗긴 후 사인을 하려던 김시혁이 갑자기 조문호를 향해 말을 건넸다.
“우리 조 선배 이름이 왜 여기에 들어가 있는 거죠?”
“…….”
“이번 계약의 에이전트, 아! 미안합니다. 제가 보험업을 너무 모릅니다. 모집인이라고 하나요? 거기 조 선배가 이름을 올린 이유가 뭐죠?”
“김시혁, 처음 박하송이 나를 보고 찾아왔으니까 당연히 내 이름을 올린 것이지. 안 그래? 박하송 사장.”
얼굴이 붉어진 조문호의 대답.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빨리 사인부터 하라고, 이 새끼야.
“삼송의 기업 문화가 그런 모양이죠? 일개 대리? 사원이 나서서 고객사 회장과 총괄 사장 이름을 불러 대고… 조문호 대리님!”
“……!”
“보험이라는 게 보험모집인과 계약자의 끈끈한 관계로 이뤄지는 경우가 태반이라 들었습니다. 박하송 사장, 여기 조문호 사원과 그 정도로 친분이 있었나요?”
“웬걸요, 학교에서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습니다. 더군다나 조문호 씨가 졸업한 뒤로는 이 건 때문에 처음 본걸요.”
“그런데 왜 삼송생명을 택한 겁니까?”
“저도 회장님처럼 보험업계를 너무 몰라서요. 이와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고 수소문을 했더니 동문 선배가 있더군요. 그래서 온 겁니다.”
“흠. 도움은 좀 받으셨나요?”
“예, 이 설계안은 C안이군요. D안과 차이가 또 많이 납니다. 어제 저녁 조문호 사원에게 받은 D안과 비교하면 보장액 차이가 많이 나는데요?”
시혁은 만년필 뚜껑을 돌려 닫았다.
“그렇다네요? 삼송이 준비한 D안도 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