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악연은 이어지고
결국 삼송이 꽁꽁 숨기고 싶었던 D안을 받아 든 시혁.
“보험이란 미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생명보험은 혹시 모를 상황에서 가족이 힘들지 말라고 드는 것이죠. 미래는 누구도 모르니까요. 이런 생명보험… 가장 기본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삼송생명은 저와 생각이 다르군요. 기업이 수익 창출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건 당연합니다. 인정해요. 하지만, 이건 생명보험입니다. 가족의 아픔을 보듬어 줄 최후의 보루란 말이죠. 그래서 일반 기업의 수익 추구보다, 좀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망스럽습니다.”
“…….”
“처음부터 C안과 D안을 같이 내놓고 비교하면서 설명했다면 저는 오히려 C안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신뢰가 우선이니까.”
“…….”
“우리 조문호 사원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무조건 계약만 하면 자신의 영달이 보장된다 생각한 겁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보험 계약자인 K 미르 그룹을 배려한 것입니까?”
“저는… 그냥 같은 동문으로 찾아 준 박하송 대표가 고마워서 이것저것 알려 준 건데…….”
“네, 고맙습니다. 덕분에 눈탱이 당하지 않고, 실체도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 동문끼리 따로 밥 한 끼 사도록 하겠습니다.”
“어… 나는… 그냥…….”
다시 칼날을 돌린 시혁.
“여맹구 사장님, 준비 많이 하셨는데, 다음 기회에 좀 더 진솔한 모습으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계약은 여기까지 하시죠.”
“김시혁 회장님, 그냥 최종 제시된 D안으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예, 안 됩니다. 나중에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지 심히 의심되거든요. 신뢰를 잃었습니다, 삼송생명은.”
시혁은 만년필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가시죠, 이 선생님. 새로 출범한다는 그 보험사와 계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 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예, 회장님. 신동방 생명보험입니다.”
“이름 멋있군요. 거긴 진솔한 제안을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겁니다. 제 친구들은 최소한 수익보다 생명의 존엄과 가족들의 슬픔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 보험모집인에게도 정당한 대가를 약속하는 보험사를 지향한다 합니다.”
* * *
줬다가 뺏는 놈이 더 밉다. 그리고 구름위로 올려놓고 흔들어 떨어뜨리는 놈은… 죽이고 싶다.
뭐 됐다. 일장춘몽이 이런 것인가?
삼송생명은 좋은 계약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쉽겠지만, 정작 조문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자네, 회사 기밀 서류를 유출함으로 인해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초래됐는지 아나? 말이 안 나오는군.”
“…….”
“자네가 먼저 연락했나? 아니면 박하송 대표가 먼저 보자고 했나?”
“…….”
“자네가 먼저 연락했군. 잘 보이고 싶었어. 회사의 입장이나 수익 같은 건 관심도 없었던 거야. 그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출세할 생각만 가득했던 거지. 아닌가?”
“…….”
“대기하도록 하게, 꼼짝도 하지 말고. 징계위원회 차원에서 끝날지, 아니면 형사고소를 할지, 회사가 결정할 때까지. 알겠나?”
“…….”
“입에 꿀 발랐나? 하긴… 주둥이가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긴 하겠네.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리게.”
원래 자리?
총무부 1과의 신입 때 쓰던 자리는 벌써 다른 신입이 앉아 있다. 아직 정식 임명장은 안 받았지만 어제부터 기획실 대리로 근무했는데 원래 자리로 가서 기다리라면… 앉을 곳도 없다.
힘없이 사장실을 나서는 조문호의 등 뒤로 비서실장의 냉혹한 말이 쑤셔 박혔다.
“저 새끼가 모든 것을 망쳤습니다. 그래도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이라고 대외비를 다 공유했건만… 배신자 새끼!”
“시끄러워. 저런 애송이에게 덜렁 기밀 문서를 넘겨준 자네도 성치 못할 줄 알아.”
“사장님!”
“그나저나 작정했어. 신동방 생명보험? 대놓고 저격한 거야. 우리가 당했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입니까?”
“그래, 조문호라는 생쥐 새끼를 이용해 명분을 만든 거지. 그리고 줄 듯, 안 줄 듯하다가 막판에 빅엿을 먹이면서.”
“그럼 조문호도 이용당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 아닙니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 저딴 놈 신경 쓸 때가 아냐. 당장 내부 단속을 강화하도록 지시하게. 이정필이 오늘 여기 온 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야.”
참, 처량하다. 고래 싸움에 이용당한 새우 꼴이네.
왜 그랬을까?
김시혁이 등장할 때부터 심장이 내려앉기는 했었다. 대학 시절 이유 없이 시혁에게 한 방 야무지게 먹은 적이 있었고, 그 후로 이를 갈았던 사이니까.
그렇다고 별다른 원한을 가질 까닭이 없는데… 왜 이렇게 내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지 모르겠다. 너무한 거 아냐?
갈 곳이 없어서 옥상에 자리 잡은 조문호.
담배를 피우던 한 무리의 직원들이 힐끔 보더니 그냥 고개를 돌려 버린다. 비릿한 미소를 남기고.
-저 새끼지?
-방금 사장 비서실 동기에게 들었어. 저놈 때문에 삼송생명이 완전 물먹었단다.
-제기랄, 황금 같은 점심시간을 나가지도 못하고 대기 탔는데… 꼴 좋게 됐다.
-저 새끼는 어떻게 되는 거야?
-끝난 거지. 한국대 법대에, 고시 1차 패스 스펙에, 이번 건으로 벼락 출세했다고 부러워했는데, 말짱 도루묵이지. 모가지 날아가는 건 기정 사실이고, 어쩌면 콩밥 먹을지도 몰라.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네? 그래서 사람은 겸손해야 되는 거야. 저 새끼, 가관이었데. 자기가 뭐라도 된 양 기획실에 배치된 지 하루 만에 창가 쪽 자리를 달라고 하더란다.
-큭큭큭, 팝콘 없냐?
처량하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삼송생명 모든 사람이 우러러 봤거늘.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사들이 먼저 아는 체를 해 왔던 조문호가… 죽고 싶어.
울리는 핸드폰. X발, 가지가지 하는구나.
“예, 과장님.”
[자네, 뭐 하나? 사장님께서 꼼짝 말고 자리 지키라 하셨잖아?]
“…….”
[당장 튀어와!]
“제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왜 없어? 새로 발령 받은 신입 옆에 보조 의자 놓고 같이 앉으면 되지. 하여튼 잘난 놈들이 꼭 이래. 에이, 씨. 왜 나한테 똥물을 튀기고 지랄이냐? 빨리 와, 새끼야.]
어지럽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다. 진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구나.
하늘이여, 너무합니다.
* * *
삼송생명은 삼송그룹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계열사다. 순환출자 구조에서 핵심 회사였다.
당연히 회사의 경영상 문제가 생기면 그룹 경영조정실로 직보가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신동방?”
“그렇습니다, 회장님.”
“이정필? 이 뼈다귀에 바람 든 영감이 아직 포기를 안 했단 말이야?”
“이정필뿐만이 아닙니다. 생존해 있는 5명 모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회사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자본금은?”
“천 억입니다, 회장님. 만만치 않습니다.”
“영감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천억을 마련할 수 있었나? 배후가 누구야?”
“…저, 김시혁입니다.”
“……!”
“이 보고서를 좀 봐주십시오. 벌써 한번 삼송생명을 휘젓고 말았습니다.”
30분에 걸쳐 보고서를 두 번씩 꼼꼼하게 읽은 이건호 회장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아! 이런 치졸한 도발에 당했단 말이네?”
“면목 없습니다. 너무 계약 규모가 컸던 탓에 눈이 멀었던 모양입니다.”
“허어! 이런 식으로 똥물도 튀기고 선전포고도 화려하게 했다? 이건 노골적으로 나를 향해 칼을 들이 댄 거네?”
“…….”
“이놈, 김시혁의 선배라고?”
“네. 같은 한국대 법대 2년 선배라고 합니다. 삼송생명 차원에서 적절한 징계를 할 겁니다.”
“아냐 아냐, 이놈… 그룹 비서실로 올려.”
“예?”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 뭔지 알아?”
“무슨 말씀이신지?”
“증오야, 복수심. 이건 골수에 박혀 있기 마련이지. 이런 놈이라면 김시혁을 제거하는 데 언젠가 꼭 써먹을 가치가 있어.”
“하지만 회장님, 회사 기밀을 누출한 쓰레기 같은 놈입니다.”
“쓰레기라는 걸 알고 써먹으면 돼. 더 푹 썩히면 가스를 만들고 나중에는 김시혁을 중독시킬 독가스도 만들겠지. 김시혁에게 당한 놈들, 원한이 깊은 놈들, 그런 놈들은 무조건 비서실로… 그래, 백정태 팀장 업무 지원 역할로 끌어올려.”
시혁이 조문호를 나락으로 처박은 건 미련을 털기 위해서였다. 조문호의 구역질 나는 행태를 확인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최송희에 대한 미련.
그건 최송희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그토록 잊지 못하는 사랑하는 딸 혜림이에 대한 미련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다시 만날 수 없는 딸을 마음속에서 떠나 보내려고 조문호를 부숴 버렸는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혁이 벌인 나비의 날갯짓은 엉뚱한 곳에서 다시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다.
조문호 입장에서는 지옥으로 처박히기 직전, 하늘에서 새로운 구명줄이 내려온 셈이다. 삼송생명 사장과 비교조차 불가한 튼튼한 구명줄이.
김시혁과 조문호, 이자룡의 악연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 *
“하송아, 할머니께서 가지고 있는 삼송생명 BW(신주인수권부 전환사채)가 얼마나 되지?”
“500억 원.”
“지금 삼송생명이 비상장이지만, BW 만기 때 우선적으로 주식 전환할 수 있는 거네.”
“그렇지. 원래는 동방보험 때 할아버지들 부탁으로 사 준 것인데, 삼송생명이 승계했으니까.”
“그거, 내가 사자.”
“미친놈아, 할머니 병원에 계신다니깐. 그리고 모든 재산은 이미 복지 재단에 기부하셨다고.”
“복지 재단은 당연히 만기 때 돈으로 받을 거 아냐. 주식은 필요 없잖아? 그렇지?”
“…그런 셈이지. 희망 복지 재단이야 현금으로 쟁여 놓고 쓰는 게 좋으니까. 더군다나 삼송생명은 비상장이라 주식으로 받아 봐야 자유롭게 현금화하기도 쉽지 않고 말이야.”
“내가 할머니를 좀 봐야겠다. 뵌 지도 오래됐고.”
“할머니 너 싫어해, 알잖아?”
“응, 알아. 돈 귀신 붙었다고 경기를 하시지.”
“근데도?”
“이번에 이정필 선생님한테서 할머니가 어떤 걸 제일 좋아하시는지 알아냈거든. 완전 뻑 가실걸?”
“아이고, 무시라. 너 혼자 가라. 나만 보면 소릴 바락바락 질러서 안 가련다.”
그렇게 찾은 병원. 참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
영등포의 작은 개인 병원. 그것도 8인 실. 시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진정한 의인들은 이럴까?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은 너무 아깝고, 몇백억씩 사회 약자를 위해 내놓는 거금은 기꺼이 생각하는 것일까?
“할머니, 저 왔어요.”
“에구! 저 돈 귀신. 이놈아, 다시 오지 말라고 했잖여?”
“할머니, 오늘은 저 쫓아내면 안 돼요. 벌떡 일어나실 뇌물을 가져왔거든요.”
“아서라, 이놈아. 이제 곧 먼 길 가는 할망구가 무슨 미련이 있다고 뇌물을 먹겠냐? 헐헐헐.”
“그래도 하송이랑 잘하고 있어요. 저는 알거든요, 할머니 마음. 하송이 걱정은 마세요.”
“…….”
“왜 하송이에게 그토록 혹독하게 하셨는지 압니다. 저놈 성격, 사기당하기 딱 좋아요. 분명 할머니 재산 다 탕진하고 자신까지 망칠 겁니다. 그래서 저와 일하는 걸 모른 척하는 거잖아요? 맞죠? 하하하.”
백 할머니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시혁아, 할미처럼 나이를 먹으면 조금 보이는 것이 있단다. 너는 분명 세상을 온통 흔들 귀신이 될 거야. 아마 엄청난 돈 귀신이 되겠지. 절대 하송이에게 돈을 주지 말거라. 그냥 편하게 일생을 네 밑에서 보내도록 하면, 그걸로 된 거여.”
“걱정 말라니깐. 한 조직을 건실하게 지키는 일은 하송이가 딱이고요. 공격은 어설퍼도 관리는 최고예요.”
“그려. 알겠다. 오늘은 무슨 일이더냐?”
“단도직입적으로, 할머니가 희망 재단에 기부한 것 중에서 필요한 게 있어서 왔죠.”
“흘흘흘… 삼송생명 BW가 욕심 난 거여? 네 눈알에 욕망이 가득하다. 꿈도 꾸지 마라, 이놈아.”
“에이… 오늘은 무조건 넘어오게 되어 있다니깐.”
“그래, 네가 준비한 패를 한번 까 봐라. 내가 홀랑 넘어갈 비장의 카드가 뭐냐?”
시혁은 말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철가방을 양손에 든 윌슨이 들어와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가스 버너도 같이.
“짜짠! 여기 계신 분들은 음식과 상관없는 환자들이라는 걸 원장님에게 들었고 허락도 받았거든? 수구레 국밥, 흐흐흐. 할머니, 이거 거절할 수 있어?”
벌써 윌슨이 들어서는 순간, 백할머니의 눈에 고이는 눈물… 어찌 저 냄새를 잊을까?
할아버지가 생전에 그렇게 즐겨 찾았던 마장동 수구레 국밥집의 그리운 냄새다.
죽기 전에는 먹을 수 있게 되었구나, 영감의 향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