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95화 (95/150)

95화 남자의 쇼핑

“사장님, 더 늦으면 다 죽습니다.”

“안 해, 새끼야.”

“그 고집이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니까.”

“네가 뭐래도 안 해.”

“차 좋아하는 형님의 순수함, 모르는 바는 아닌데… 당장 먹고살아야죠. 차만 껴안고 있으면 밥이 나와요? 사장니임!”

“BMW 병행 수입하는 거, 좋지. 그런데 아무나 시켜 주냐? 도이체 모터스 권 회장, 거지 같은 놈 밑으로 들어가야 하잖아? 그놈은 차를 몰라. 주가 조작으로 한탕 하려는 양아치라고.”

“좀 숙이면 어때? 모가지 부러진답디까? 형님만 자존심 숙이면 저도 살잖아요? 아버지 집까지 팔아 밀어 넣었는데… X발.”

둘 다 차가 좋아서 의기투합한 처지였다. 그러나 온통 듣보잡 차를 수입해 진열한 전시장은 썰렁했다.

사람은 많이들 찾아왔다, 많이. 문제는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

쇼윈도우에 걸린 예쁜 옷은 팔기 위해서라기보다 시선을 끌기 위한 전시용이 많은 법이다. 내부에도 가슴과 등짝이 푹 파진 드레스만 쟁여 놓으면 그 가게, 망한다.

딱 그 짝이다. 너무 차를 좋아한 나머지 가진 모든 돈을 퍼부어 매니아가 아니면 결코 사지 않을 차만 수입한 것이다.

신기하니까, 본적 없는 차가 있으니까, 개나 소나 들어와서 둘러보는데… 정작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버텼건만 지금까지 2대밖에 못 팔았다. 임대료가 밀리기 시작하고, 며칠 전부터는 관리비를 못 내서 전기가 끊겼다. 이제 구경하러 오는 사람의 발길도 사라졌다.

당장 한 대라도 팔지 못하면 이 좋아하는 차들과 함께 길거리로 내쫓긴다. 같이 투자한 이놈은 그래서 악을 쓰는 것이다. 사기꾼 비슷한 놈이지만 수완이 뛰어난 병행 수입 딜러 도이체 모터스 권 회장 밑으로 들어가자고.

“미안하다. 그래도 차는 달라. 기계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수만 개의 부속이 모여서 도로를 달리는 예술. 굴러만 간다고 다 차가 아니란 말이다.”

“어이구, 예술가 나셨네. 나도 이제 모르겠다. 알아서 해요. 쫓겨나면 차에서 먹고 자지. 뭐.”

둘 다 마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는 동생 놈도 차에 미친놈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때,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캄캄한 전시장 문이 열렸다.

오후 햇빛 덕분에 입구는 사물을 구분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외국인 여자와 떡대 좋은 남자 두 명?

이상한 조합의 세 사람이 전시장으로 들어오자 사장은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구경하러 온 사람일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몸에 익은 행동이었다.

“조금 어둡네요?”

“어서오십시오. 사정이 조금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이 앞 길을 자주 오고 갔던 사람입니다. 신기한 차가 많아서 구경하러 왔는데, 특히 저기 저 차 만져 봐도… 괜찮죠?”

“그럼요. 차를 좋아하신 다면 얼마든지 둘러보세요. 안 사도 괜찮습니다.”

호오! 저 표정은… 진짜네? 딱 봐도 막장 환경, 그런데 차 이야기만 나오면 반짝거리는 눈빛.

좀 괴짜다. 가끔 지나치면서 봐도 진열된 차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말 한국에서 보기 힘든 이상한 차들.

오케이! 이제부터 시혁의 시간.

시혁은 벌써 한 시간 이상 사장을 붙잡고 캐묻는 중이다. 연신 하품을 하는 산드라.

남자란, 참 이상한 종족이야.

자동차는 예쁘고 편안하면 그만인 거지. 뭐? 무게 중심이 거기서 왜 나와? 백미터를 5초에 도달하든, 4.7초에 도달하든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직렬 엔진은 뭐고, V형 엔진은 뭔지… 그리고 공기저항 계수? 차를 사려는 건지 총알을 사려는 건지, 원 참.

도무지 별세계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회장님과 거기에 장단 맞춰 침 튀기며 설명하는 사장도 이상하다. 엔지니어도 아닌 주제에 어떻게 저런 공학적인 부분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지.

대충 사지, 돈도 많으면서.

지금 시혁과 산드라, 수행원이 있는 곳은 자동차 편집 숍이었다. 하나의 브랜드를 판매하는 대리점이 아니라 희귀 명차만 전문적으로 수입해서 파는 곳이다.

산드라가 봐도 예쁘긴 하다. 영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차들. 하지만 뉴욕에서는 종종 보이던 그런 차들이 즐비했다. 그래도 지겹다. 대충 사면 안 되나?

“회장님, 그냥 여기 있는 걸 다 사면 안 돼요? 나중에 시간 날 때 직접 몰아보면서 평가하면 되잖아요?”

딸꾹- 딸꾹-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직원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존경의 하트를 뽕뽕 뿜어내고, 설명하다가 지친 사장도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다 사라고?

여기 진열된 차들의 종류는 모두 제각각이다. 이런 어마무시한 가격의 차들을 전부? 말로만 듣던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라니… 꿈이냐?

‘거기, 하품하고 있는 금발 머리 외국 아가씨… 잘한다. 더 펌프질 해 봐. 너희 회장님, 너무 집요하다. 돌아 버릴 것 같아.’

“흐음. 다 좋은데… 여기 있는 것보다 상위 등급은 어떤 게 있죠?”

“상위 등급은 정말 하이엔드급으로 넘어갑니다만.”

“카탈로그는 있죠?”

“예. 하지만 하이엔드급은 가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봅시다, 그 상상을 초월한 차들.”

고급차를 지칭하는 몇 가지 구분법이 있다.

먼저 플래그십(Flagship).

흔히 기함(旗艦)이라고 부르는 차… 깃발을 단 함정, 즉 함대의 지휘관이 타고 있는 지휘함. 대빵을 말하는 것이다. 벤츠의 S클래스, BMW의 7시리즈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하이엔드(High-End).

말 그대로 최상위 차를 말한다. 특정 제품군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것들에게 붙이는 경외의 표현이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대표적인 하이엔드급에 속한다.

“아닌데… 내가 바라는 것은 이런 일반적인 자동차가 아니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희귀한 자동차를 찾는 겁니다.”

“아! 그러면 하이엔드가 아니라 원 오프(One-off)로 하셔야 합니다.”

“원 오프?”

“네, 회장님. 하이엔드보다 더 궁극의 차량이 있습니다. 소위 슈퍼 카를 뛰어넘는 하이퍼 카라고 부르죠. 하지만, 이것도 원 오프 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

“특별한 주문에 의해, 오로지 한 사람의 고객을 위해 개별 제작한 차량. 브랜드 전체가 움직여서 2대도 아닌 딱 한 대만 제작하는 차량이 바로 원 오프 카라고 불립니다.”

설명을 듣던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고급차로 통칭되는 자동차가 이렇게 디테일 한 계단이 있었어. 이왕 지르는 거 나를 위한 선물, 제대로 해 보자.

“그럼, 벤츠도 롤스로이스도 다 하이퍼 카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군요. 어디가 좋을까요?”

“회장님, 다 필요없습니다.”

“……?”

“진정한 슈퍼카 위의 하이퍼카, 또 세상에 하나뿐인 원 오프 카를 원하신다면 무조건 부가티로 가셔야죠.”

“부가티(Bugatti)?”

“넵. 남자가 꿈꿀 수 있는 최후의 로망입니다. 부가티는 그런 찹니다.”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사장 뒤에서 직원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한다. 이제 이 캄캄한 전시장을 밝힐 수 있어. 어쩌면 다시 새로운 차들로 가득 채울 수 있을지 몰라.

다시 세 시간이 더 흘렀다. 산드라는 소파에서 침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세상이 그렇다. 어제는 백화점에서 시혁을 고문했지만 오늘은 자신이 된통 당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혁은 부가티의 EB-112를 베이스로 한 자신만의 차를 계약했다. 자그마치 1년을 기다려야 인도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1987년 처음 선을 보인 부가티의 EB-112는 매끈한 곡선미를 강조한 세단.

람보르기니 미우라와 쿤타치를 디자인한 마르첼로 간디니와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공동 작품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였다.

현도 자동차의 포니(Pony) 자동차를 디자인했던 조르제토 주지아로… 그 사람이다.

“흠… 그리고 1년 동안 탈 자도 필요하니까, 아까 산드라가 말한 대로 여기 있는 차들, 전부 삽시다. 한 번씩 몰아보는 재미가 쏠쏠하겠네.”

“……!”

오!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 천지신명이시여! 사장은 오줌 지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착하게 살면 이런 날도 오는 거다. 차카게 살자, 차카게.

* * *

흡사 송곳 하나 박을 곳이 없는 공간. 강남 테헤란로가 그랬다. 유난히 집중적으로 고층 빌딩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이젠 대로 양쪽으로 한 평의 땅도 남지 않았다. 꽉 찼다.

테헤란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면 삼성역이 나온다. 삼성역에 내리는 사람은 누구나 고개를 하늘로 들 수밖에 없게 된다. 아시아에서 최고층을 자랑하는 K 타워를 보기 위해서다. 흡사 용틀임을 하듯이, 하늘로 치솟은 빌딩은 한국인의 웅지를 표현한 걸작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 K 타워에는 총 여섯 개의 출입구가 있었고, 동측 출입구는 오직 K 미르 그룹 임직원 전용 게이트였다.

김보성 팀장은 이 G 게이트의 보안 책임자다.

출세했다. 오갈 데 없어서 무작정 찾은 공사장, 거기서 박하송에게 삥을 뜯기다가 이어진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다. 공사 중일 때는 정문의 경비반장으로 근무했지만, 지금은 가장 핵심 출입문의 보안 책임자가 되었다.

짙은 회색 정장으로도 어깨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을 감출 수 없는 김보성. 눈빛이 날카롭다.

여기는 G 게이트, 일명 골든 게이트로 불리는 곳.

통행하는 사람들 모두 낯이 익은 사람들뿐, 일반인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K 미르 그룹의 한국 본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 숙지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익숙한 봉고차 두 대가 다가왔다. 저 번호판은 41층부터 66층까지 청소를 담당하는 용역 회사 차량이다.

그러나 김보성은 보안실 안에서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경계심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차는 차단막 앞에서 멈췄고, 탑승한 사람들은 모두 내려야 한다. 규정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출입증을 재차 확인받아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이들이 검사를 받는 동안, 보안 요원은 차량의 내부와 밑바닥까지 보안 거울로 살핀다.

“캄퐁, 바뀐 사람 없지?”

“없다. 나 캄퐁 지킨다. 사람 안 바꿔.”

어눌한 한국 말. 이들은 모두 네팔 출신 용역 청소부들. 내부 보안을 위해 일부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보성과 보안 요원들이 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얼핏 진한 친밀감도 엿보였다.

“캄퐁, 내일 아침 교대할 때 소주 한잔 꺾을래?”

“팀장, 너랑 술 안 먹어. 취하면 또 싸우자고 할 거니까.”

“흐흐흐. 이 새끼, 쫄았지?”

“캄퐁, 무서운 거 엄다. 맨손은 너 이겨. 칼 들면 너 죽어.”

“어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알았어, 얼른 들어가 봐.”

캄퐁이라고 불린 인솔자와 네팔인 20명은 검색대를 통과해 다시 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내일 아침 7시에 교대 인원이 올 동안 저들이 빌딩을 청소할 것이다.

“팀장, 저놈들. 날 잡아서 한판 더 붙어야지 않겠소?”

“형규야, 너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친하게 지내라.”

“어이구, 저깐 밤톨 같은 놈들 몇 명이 들러붙어도 한 주먹감이죠. 저번에 보셨잖아요?”

“병신… 살기를 뿜뿜하는 놈이 무섭다더냐? 천만에, 안으로 감출 수 있는 놈이 진짜 무서운 거다. 저놈들 그걸 손에 쥐는 순간… 당할 자가 없어. 네가 그걸 모르니까 콧김 불어넣는 거야, 병신아.”

“그게 뭔데요?”

“그런게 있어. 평소에는 절대 꺼내지 않을 그거.”

김보성은 피 맛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군 시절 북한군과 수도 없이 마주쳤었다. 서로 조심하는 터라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게 상책이지만, 느닷없이 맞닥드리면… 한쪽이 전멸해야 끝나는 전투가 왕왕 벌어지곤 했었다.

총기는 쓰지 않는다. 양쪽 모두 총기 휴대가 금지된 구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 결국 승부는 대검 한 자루에 의지한 접전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아수라장을 겪은 김보성에게도 저들은 은근 두려운 존재였었다.

날씨가 스산하다. 바람에 약간의 비린내가 섞여 있는 느낌에 김보성은 다시 전면을 응시했다. 여기는 성지. 어떤 잡인의 접근도 불허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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