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엉뚱한 공격
일반인이 출입하는 A, B, C, D 네 곳의 게이트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작거렸다. 특히 전망대 관람객 전용인 D 게이트는 시장통보다 더 번잡했다.
K 타워는 몇 개의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는 완전 개방된 편의시설 위주로 식당과 체력단련실, 마트와 커피숍, 음심점 등 상가가 즐비한 곳이다. 각 층당 8천 평에 달하는 광활한 공간이다.
그러나 5층부터는 엄격한 출입 제한 구역이다. 아직 선정이 끝나지 않았지만 철저히 입주사를 위한 공간이다. 그들의 사무실과 실험실, 회의실이 35층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35층부터 40층까지는 입주사를 위한 지원 시설이 자리 잡은 공간으로 법무 서비스, 세무 서비스, 경영 서비스, 행정 서비스를 대행하는 곳이다.
그리고 41층에서 66층까지는 입주사들도 출입할 수 없는 K 미르 그룹의 전용 구역.
하지만 딱 한 층, 60층은 전용 엘리베이터로 일반 관람객 출입이 허용된 곳이다. 서울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가 그곳이었다.
항상 줄을 서는 곳, 공짜기에 더 그렇다. 무조건 선착순으로 입장이 가능하기에 새벽부터 대기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오늘도 야간에 서울의 불야성을 보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D 게이트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이 항상 들끓었다.
가장 많이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본인. 버블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지만, 아직 엔화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면 싸고 품질 좋은 한국산 제품을 쓸어 가는 시절이었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한국에 입국하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경복궁과 명동을, 다음으로 남산 타워 그리고 세 번째로 여지없이 들리는 코스가 K 타워 전망대였다.
문제는 공짜라는 것, 예약이 통하지 않고 오로지 줄을 서야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 이건 답이 없었다. 여행사들이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방법이 인원수에 맞춰 줄서기 알바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박씨, 왔어?”
“응. 오늘 유난히 사람이 많네.”
“그러니까 말이야. 오십 명이나 줄을 세우는 것을 보면 단체 손님이 야무지게 왔나 봐.”
“다른 여행사도 마찬가지야. 수십 명씩 알바를 동원했어. 저기 김 영감도 있잖아?”
“대단하긴 하다. 우리나라에 이런 빌딩이 있다는 거, 참 가슴 뿌듯해.”
“그럼 뭐해? 우린 정작 올라가 보지도 못하는데.”
“대신 돈을 받잖아? 다 쪽발이 놈들 돈을 버는 거야. 일당으로 쏠쏠하니까 서로 좋은 거지.”
“슬슬 우리 입장할 시간이 다 됐는데, 왜 안 오지?”
“호랑일세, 저기 오네.”
말이 끝나자마자 선두에 깃발을 든 인솔자와 일본 관광객 무리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다른 여행사 버스에서도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내렸다.
이들은 미리 자리를 맡아 두었던 알바들 대신 입장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들 사이사이에 끼어든 이들은 여느 관람객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60층 전망대의 관람 시간은 30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는 관계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이번 팀이 마지막 관람객인 셈이다. 저녁 10시면 모든 관람객은 K 타워에서 나가야 한다.
한 번에 입장 가능한 인원은 700명, 60층 전망대는 차례대로 입장한 관람객으로 북적거렸다.
“대단하군. 조센진들이 이런 건물을 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인정, 때에 절고 못 먹던 시절의 조센진이 아냐. 올림픽까지 성공시킬 줄은 몰랐어.”
“강남이 한눈에 다 보이는군. 한강도 넓고 도도해. 정비가 잘되었어. 서울은 훌륭한 도시야.”
“그래 봐야 우리 대일본제국을 따라오려면 가랑이 찢어질걸. 평생 물갈퀴질 해도 불가능한 일이야.”
“그건 당연한 이야기고. 근데, 우리 단체 여행, 조금 이상하지 않아?”
“싸면 좋은 거지, 뭐가?”
“너무 싸니까 이상한 거지. 여행사가 흙 퍼다가 장사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긴 하다. 아무리 쇼핑으로 수고비를 받는다 해도, 100엔으로 왕복 항공료와 호텔 비용을 뽑을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이야기지.”
“그리고, 슬쩍 버스에 올라탄 사람 몇 명은 조금 섬찟하지 않아? 처음부터 같이 했던 일행이 아닌데 말이야.”
“인상들이 더럽긴 했어. 게다가 한마디도 안 하더라. 또 똑같은 베낭을 메고 있더라고.”
“어? 지금은 안 보이는데?”
“여기 수백 명이 복작거리는데 섞였겠지.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또 만날 거야, 신경 꺼.”
마지막 관람객이 떠나고 K 타워 입구는 봉쇄되었다. 이제 내일 아침까지 K 타워에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불을 밝히고 업무를 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식이라도 조금 시켜 줘야 하는 거 아냐?”
“벌써 먹었다. 열 시야, 인간아.”
“벌써? 고생들 한다.”
“거의 1차 선별이 끝났어. 그야말로 폭풍 같은 석 달이었다.”
“몇 개사로 압축됐지?”
“정확히 2배수로 추렸어. 총 5만 건의 지원사 중에서 딱 만 개만 남았다.”
“여기서 또 절반을 줄여야 하는 거네?”
“응, 어차피 공간은 한정돼 있으니까.”
“나중에는 이런 시설을 더 지어야겠다. 이렇게 호응이 뜨거울 줄 몰랐어.”
“시혁아, 뜻은 이해한다. 다 좋아. 훌륭하지.”
“행간에 숨은 뜻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정도라는 게 있거든. 사람이 그렇더라. 부족한 하나를 얻으면 너무 좋아해. 너무 절실하니까. 그런데 거기에 하나를 더 주면 그냥저냥 좋아하게 되어 있어.”
“좋아하면 된 거지.”
“아니, 호의가 지속되면 당연한 권리로 생각해, 인간이란.”
“너무 퍼 준다?”
“그래, 여기 입주 기업 중 상당수가 성공할 거야. 법무, 경영, 세무 지원에 일하는 공간과 업무 지원까지 해 준다. 또 자금이 필요하면 은행 이자로 돈도 빌려줘. 미래 비전을 가진 기업이라면 실패하기도 힘들지.”
“그런데?”
“아깝게 생각하는 놈들이 나올지도 몰라. 아니, 꼭 나올 거야.”
“뭘?”
“자신들이 입주하면서 내놓은 5%의 지분, 또 자금을 수혈받으면서 제공한 추가 지분… 성공한 후에 돌아보면 배가 아플 수 있거든. 상장을 했다고 쳐. 1%면 돈이 얼만데… 내가 왜 K 미르 그룹에 이 엄청난 지분을 뺏겼지?”
“하송아, 다 알아. 그런 족속이 분명 나올 거야.”
“시혁아, 네 뜻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생각이니?”
박하송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시혁이라는 친구의 본심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로 인해 이 착한 친구가 상처를 입을까 걱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박하송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시혁의 다음 말을 들은 후에.
이놈, 이놈…….
“하송아, 전에 내가 알던 사람이 삼송 비서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어. 착한 사람이었지. 그 사람에게 들은 건데 말이야.”
“…….”
“삼송 비서실에서는 항상 신입 사원을 뽑고 나면 기다려.”
“뭘?”
“가장 화려하게 목을 날릴 놈을……. 보여 주는 거야. 저렇게 돌출 행동을 하면 온 세상에 피를 튀기며 뒈진다. 이런 놈은 앞으로 영영 다른 회사에 이력서도 내밀지 못한다.”
“…….”
“짤리고 식당을 열면 그 옆에 유명 프랜차이즈를 데려다 놓고 반값 행사를 끝없이 하지. 망할 때까지……. 편의점을 오픈하면 지근거리에 마트를 열어 버려.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거야.”
“흠… 진짜 잔인하구나.”
“그래서 항상 직원을 뽑을 때 한두 명을 더 뽑아. 물론 더 뽑힌 놈은 자신이 잉여인간인지 모르지. 적절한 시점에 날 잡아서 그놈의 목을 본보기로 날리는 거야. 삼송은 그렇게 해 왔어.”
“…너 설마?”
“하송아, 내가 그렇게 마냥 착한 놈으로 보이디?”
“…….”
“네가 걱정했던 사태는 무조건 생겨. 사람이니까. 그때 나는 삼송보다 더 잔인하게 목을 날릴 거야. 회사를 산산조각 내고, 사장과 경영진은 패가망신시킬 거야.”
“후와!”
“말로 설명하면 안 되냐고? 천만에, 안 돼. 네 말대로 사람이니까… 차라리 화려한 불꽃 쇼를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거든. 모두 볼 수 있도록.”
“너, 이 새끼. 독한 놈이었네. 내가 잘못 봤어.”
“하송아, 은혜는 가슴에 새기고, 원한은 뼈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하는 인생… 지겹다. 다시는 그렇게 당하며 살고 싶지 않아.”
“시혁아…….”
“차라리 내가 먼저 부숴 버린다. 그리고 폐허 위에서 내 맘대로 다시 만드는 게 더 쉽다고 봐. 고쳐 쓰는 거 아냐. 암울한 얘기지만, 사람이니까.”
‘친구야, 내가 그렇게 당했거든. 삼송 비서실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였거든.’
* * *
60층 전망대도 이천 평의 넓은 공간이다. 그럼에도 동시 관람객을 700명으로 제한한 것은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저녁 10시면 마지막 관람객도 모두 퇴장하고 내일 오전 9시까지 빈 공간이 된다.
하지만 60층과 61층 사이의 비상계단에는 15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적지 않은 인원이 있었지만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 맞춘다. 현재 시간 10시 40분, 유키오 조는 55층의 기획 경영실로… 야스이 조는 41층 업무 조정실로… 우리 조는 66층을 바로 친다.”
“타깃, 현 위치 파악된 겁니까?”
“아쉽지만, 아직 몰라. 내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한정적이었어. 다행스러운 건 이 빌딩은 완전히 폐쇄된 상태, 밖에서 관측된 바에 의하면 41층과 55층만 불이 밝혀져 있다. 타깃은 이 두 개 층, 또는 66층 팬트하우스에 있다는 거지. 한 놈만 잡으면 이번 일은 끝나, 간단하게 생각하자.”
“대장, 너무 허술한 작전입니다. 아무리 민간 회사라 해도 이 정도 건물이면 보안 요원들 수십은 있을 겁니다.”
“닥쳐! 한국은 총을 소지할 수 없는 나라다, 우리에게는 총이 있고. 그리고 여기 남은 사람들은 모두 머리만 커다란 책상물림들이야. 그런 놈들 상대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쯧.”
“퇴로 확보는?”
“타깃만 제거하고 나면 즉시 66층으로 집결한다. 거기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을 통해 G 게이트로 바로 나간다.”
“입구의 보안 요원들은?”
“지금 밖에 대기 중인 쿠보 조가 시간 맞춰 정리할 거야. 겨우 4명뿐인 경비야, 거론할 가치도 없어.”
“다시 말하지만, 일거에 들이쳐서 모든 이들을 제압한다. 다만, 의미 없는 살상은 자제하도록! 아무리 소음기를 장착했다 해도, 다수의 사망자가 나오는 건 좋지 않아. 우리 목표는 딱 한 놈이라는 걸 명심하고.”
무리들은 시계와 무전기 채널을 맞추고 소음기가 끼워진 글록 권총을 재점검했다.
“다케다 대장.”
“유키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입 닫아.”
“나는 말이오. 이번 작전, 왠지 찝찝해.”
“유키오, 이 새끼. 너는 그 입 때문에 언젠가 뒈질 거다.”
“이 빌딩, 화려한 반면 너무 무거워. 이런 기분 처음인데 말이오.”
“아가리 닥쳐! 여기서 성공하면 다들 목돈을 손에 쥘 것이고, 만약 잡히거나 죽으면… 알지? 계약금 건네준 것 외에는 한 푼도 없어. 특히, 유키오 이 새끼… 너 아가리 놀렸다간 본국의 네 가족들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주마.”
“하이고, 다케다 대장이나 조심하시구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생존 본능은 대장보다 더 뛰어난 거, 몰라요?”
맞는 말이다. 저놈의 촉은 정말 기막히게 위기를 간파했었고, 덕분에 다케다도 생명을 건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 험하게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번 건은 리스크 제로다. 총도 없는 마이다스 킴의 숨통만 끊으면 되는 간단한 일.
그간 외부에서 수없이 간을 봤지만 SS(미국 비밀 경호국) 차가 신경 쓰여서 쉽게 저지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건 꽉 막힌 상자 속에서 오렌지를 꺼내는 것과 같은 작전.
“시작하자! 십오 분, 정확히 십오 분 동안 정해진 구역에 타깃이 있으면 가차없이 쏘고 66층 팬트 하우스로 집결한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