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유키오의 불길한 예감
다케다는 네 명의 요원을 데리고 66층으로 치달렸다. 단숨에 6개 층을 뛰어올랐지만 호흡 한 점 가쁘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가 승부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10시 49분. 지금까지 사무실에 타깃이 있을 리 만무한 일. 펜트하우스에 있을 것이다.
여기 보안시설은 보나마나 최고 등급일 것이다. 아직 현관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도 모른다. 어쩌면 지문 인식이나 생체 인식일지도… 그러나 다케다는 제일 무식한 방법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권총보다 소총을 반입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 총기를 구멍가게 눈깔사탕 사듯이 구할 수 없는 나라다. 겨우 의뢰인의 도움으로 20자루의 글록 권총을 구한 것이 한계였었다.
다만, 꼭 같이 구해 주기를 강력히 요청한 것이 있었다. C-4(composition-4) 한 덩이.
쉽게 말해서 군용 프라스틱 폭약이다. TNT에 비해 1.34배나 강하고, 안정성 면에서도 최고다. 신관(기폭 장치) 없이는 절대 폭발하지 않는다. 가소제가 섞여 있어서 찰흙처럼 형태를 마음대로 만들기도 쉽다.
베트남전 이래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최고의 폭약인 셈이다. 다행히 소량이지만 러시아산 C-4를 넘겨 받았었다.
다케다는 C-4로 팬트하우스 현관문 손잡이를 통째로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66층 로비에는 당연히 경호원이 있겠지. 한 명? 아니면 두 명? 야간에 병풍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껏해야 한두 명.
자! 이제 계획대로 66층 로비로 뛰쳐나가 경호원부터 쏴 죽이고, C-4로 문을 부수고, 타깃의 머릴 쏘고, 엄지손가락을 자르고, 다시 전용 엘리베이터로 퇴각하고, 밖에서 대기 중인 쿠보 조가 G 게이트 야간 경비조를 제압하면 바로 사라지는 일… 수없이 해 봤다.
이보다 더 어려운 야마구치 구미 건물에 침입한 적도 있지 않은가.
20억이 아니라 60억이 걸린 희대의 의뢰 건. 대충 나눠 주고 50억은 꿀꺽해도 무방하다. 바로 은퇴하는 거지.
아래 55층으로 보낸 유키오 조와 41층의 야스이 조는 미끼로 던진 것이다. 그곳에 타깃은 없을 것이다. 다만 거기서 시선을 잡아끌고 있는 동안 팬트하우스에서 일을 치르기 위한 것이다.
다행히 알아서 탈출하면 다행이고, 죽어 주면 더 좋고, 설사 잡힌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신분을 바꾸고 지방에서 갓물주가 되어 살 테니까.
“대장!”
잠시 달콤한 꿈에 젖어 있던 다케다를 깨우는 소리. 다케다가 비상계단의 문을 잡고 망설이자 대원 중 한 놈이 이상한지 재촉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바로 로비 경호원부터 쏴 죽인다. 가자!”
왈칵 문을 열어젖힌 다케다는 구르듯이 안으로 진입하면서 총구를 들이댔다. 그 뒤를 따라 대원들도 진입했다.
“……!”
뭐지? 이 상황은?
경호원은커녕 66층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휑하다.
거기다 정면에 보이는 팬트하우스 출입문이… 열려 있는 건 무슨 경우인지.
“대장!”
“닥쳐, 나도 눈 있어.”
“안 됩니다. 함정입니다.”
“여기서? 코앞이 고진데?”
“대장, 유키오의 경고를 새기십시오. 일단 물러납시다.”
맞는 말이다. 백 번 생각해도 이건 누가 봐도 올무다. 목이 걸리면 댕강 날아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내 돈 60억, 은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가토, 네가 먼저 들어가 봐.”
“…….”
“개자식, 머리통을 날리기 전에 들어가. 나머지 인원은 엄호한다.”
가토라고 호명 당한 대원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케다는 잔인하기로 치면 비교할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거부하면 진짜 쏠 것이다.
잔뜩 웅크린 가토는 서서히 열린 팬트하우스 현관문을 향해 접근했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제발…….
그렇게 현관 입구의 왼쪽 벽에 등을 기댄 가토, 슬쩍 머리를 빼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밝다. 안쪽의 이중 문도 열려 있다. 온통 불이 환하다.
뒤쪽에서 지켜보는 다케다의 눈알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턱짓으로 진입하라는 지시가 재차 날아왔다. 오늘 완전히 잉어 떡밥 신세구나.
가토는 다케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안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슬쩍 한 발을 들이는 순간 가토의 머리통이 훌쩍 젖혀지면서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가토의 머리에는 한 발의 석궁이 자주색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속도로 머리통을 파고들어 가려는 듯 파르르 떨리며.
다케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몸을 돌렸다. 여기서 탈출구는 딱 두 곳,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없는 일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남은 건 들어왔던 비상계단뿐이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려면 온 길로 퇴각하는 것.
다케다는 남은 세 명 대원의 몸을 방패삼아 비상계단의 문을 잡아당겼다. 혹시라도 석궁이 날아오면 막아 주길 바라면서.
그런데… 안 열린다. 잠겼어?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누가 안쪽에 은신하고 있었다? 말이 안 된다.
이로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 66층 로비에. 열린 현관문으로 대가리만 들이밀어도 석궁이 박힐 것이고, 뒤는 잠겼다. 잔뜩 준비한 C-4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언제 여기 붙이고 터트린단 말인가? 이토록 준비한 상대방이 가만히 기다려 줄까?
잉어 꼬리를 잡혔다. 빼도 박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차라리 C-4 대신 수류탄을 몇 발 준비할걸…….
그때 열린 현관 문 안에서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
“총 버리고, 손 머리에 얹고, 무릎 꿇어. 다 죽기 전에.”
유창한 영어다. 고저가 없는 잔잔한 발음이 더 무섭게 들렸다. 그냥 개미를 눌러 죽이듯 너무 담담한 목소리.
“셋!”
“……!”
“둘!”
“개소리, 네가 나와라. 안 그러면 수류탄을 던져 넣을 테다.”
상대방이 알 도리가 없다 생각하고 던진 블러핑. 최소한 면상을 마주 대고 협상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던 다케다.
그러나.
갑자기 잠겼다고 생각한 비상계단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몇 명이 벼락처럼 뛰쳐나와 다케다 일행을 덮쳐 왔다.
미리 합을 맞춘 듯 한 명씩 달려들어 칼을 휘둘러 댄다. 표범도 저만큼 날렵하게 덤비지 못한다. 이건이건… 진짜 예상치 못했다.
쿠크리? X발, 용코로 걸렸네. 백병전에서 세계 제일이라는 구르카 용병이구나.
다케다는 다시 옆에 있던 대원을 당겨 칼날을 막았다. 순간 다케다의 얼굴로 피가 확 튀었다. 뒤이어 재차 대원 목 옆을 지나쳐 다케다에게 다가오는 이상하게 휜 칼, 쿠크리.
또 굴렀다. 도망갈 곳이 다 막혔지만, 다케다는 본능적으로 피하고 살길을 훑었다. 도리가 없다. 이제 구멍은 단 한 곳.
안에 이 야수 같은 놈들이 얼마나 더 도사리고 있는지 알 길 없는 비상계단을 빼면… 안으로 들어가자. 저 악마의 칼 쿠크리보다 석궁이 낫다. 머리만 보호하면 살 수 있을 수도… 안에 방검복을 입고 오길 잘했다.
생각은 순간, 행동은 더 빨리.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썰렸다. 저놈들 구하느라 지체할 시간 따위 없다.
다케다는 머리를 손으로 가린 채 현관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팔 한쪽 내주더라도 혹시 모른다. 타깃을 잡으면 살길이 생길지도.
예상대로 머리를 가린 손이 저릿하다. 한 발이 아니라 세 발이 그대로 관통한 것이다. 또 두 발은 가슴에 쿡쿡 박혔다. 방검복을 뚫지는 못했지만 충격이 그대로 몸에 전달되었다.
다케다는 포기하지 않고 또 한 바퀴 몸을 굴렀다. 이제 한 발만 더 내딛으면 거실이다. 타깃에 가까워졌다.
그때 울리는 연이은 총소리… 총?
갓 잡은 생선처럼 다케다의 몸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바닥으로 처박혔다. 망할 새끼들… 총이 있었으면 진작 쏠 것이지. 왜 석궁가지고 희롱하냐? 더러운 놈들.
널브러진 다케다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며 다가온 금발 머리 외국인과 온통 새까만 흑인. 한 명은 다케다가 놓친 글록을 멀찍이 발로 차 밀어내고, 얼굴을 들이댄 흑인은 웃고 있었다. 하얀 치아와 눈의 흰자위가 번뜩거렸다.
“여긴 한국이거든.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총을 사용하기 힘든 나라야, 병신아.”
“끄륵, 큭. 크윽. 내 60억…….”
“어? 일본 놈이네. 하여튼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흐흐흐, 누구냐?”
“그리고 여기 안쪽부터는 미국 땅이야. 총을 쏴도 합법적이란 말이지. 참, 누구냐고? 나 SS야.”
다케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까무룩 요단강 건넌 놈이 무슨.
* * *
K 타워가 피로 물들기 삼십 분 전.
“팀장님, 저 건너편의 봉고 차량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응, 그러잖아도 계속 지켜보는 중이다.”
“제법 됐습니다, 저기 정차한 지.”
“안에 몇 놈이나 있지?”
“앞 차에는 두세 명이 타고 있는 게 확인되는데, 뒤의 차는 기사만 관찰됩니다.”
“요놈들… 여행사 차도 아니고, 그렇다고 업무용 방문객도 아냐. 다 철수했을 시간이거든. 저기 정차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가 볼까요?”
“아니, 이럴 때 써먹을 사람이 있지.”
G 게이트의 보안 팀장 김보성은 빌딩 내부 통로를 통해 현관으로 나갔다. 거기에 매일 뻗치기하고 있는 양코배기들과 제법 면식이 있는 처지다.
통통통-
창문이 내려가더니 조수석의 흑인이 씨익 웃었다. 밤이라 하얀 치아만 보인다.
“굿 이브닝, 미스터 킴.”
“응, 굿이브닝이여. 음… 헬프 미, 콜?”
“…….”
“저쪽 마이 나와바리 G 게이트, 투 카 말이여. 베리 데인저러스 하거든? 너희들하고 나, 투게더 레츠 고! 오케이?”
한참을 생각하던 흑인과 백인 조합 두 명은 겨우 몇 마디 단어를 알아들었나 보다. 몇 번 ‘데인저러스?’라고 묻더니 차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곤 재킷 단추를 풀고 권총 홀더를 조용히 확인한 후 김보성에게 눈짓을 보냈다. 준비되었으니 가자는 뜻이다.
이게 훈련된 자들의 행동이구나. 김보성은 감탄했다. 제길… 나도 저런 진짜 권총을 가질 수 없나? 우리나라 땅에서 양코들은 총을 차고 다니는데, 정작 나는 가스총이 웬 말이여.
그렇게 흑, 백, 황 세 명의 묘한 조합은 정문 앞에서 길을 건너 G 게이트 쪽에 세워진 두 대의 봉고차 쪽으로 거슬러 내려왔다.
“쿠보 조장, 경찰 한 놈하고 깜둥이랑 백인이 접근합니다.”
“조용, 별일 아니겠지. 우리가 별다른 이상행동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준비할까요?”
“흠… 열시 이십 분. 마지막 관람객들도 다 나갔고, 십오 분 후면 다케다 대장이 움직일 거다. 작전 시간은 십오 분 그리고 철수 시간을 오 분으로 계산하고… 연락받으면 바로 게이트 경비초소를 장악해야 한다. 그때까지는 절대 조심. 또 조심. 총은 깊숙이 숨겨.”
“조장, 아무래도 저 세 놈이 우리를 향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냥 웃어. 조수석의 마나미가 재일교포 출신이야. 한국말이 유창하니까 우리는 웃어 주면 돼.”
김보성은 조금씩 봉고차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저 새끼, 분명 새 잡는 거다. 나와 눈이 두 번 마주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금도 다른 곳을 보는 척하지만 의도적으로 눈길을 피하는 것이다. 새 잡고 있는 게 확실하다.
“헤이, 프랜드야. 베리 베리 베리 데인저러스 한 피플이다. 비 케어플, 오케이?”
“Be careful, too”
감 잡은 거다, 미국 비밀 경호국에서 하는 일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것. 누가 암살자로 돌변해서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쏠지 모르는 나라인데, 그곳 전문 경호원이 그 정도도 눈치 못 챌까.
이미 눈 돌아가는 것을 다 본 터다. 흑인은 넥타이를 고쳐 매는 척하면서 권총 홀더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김보성은 슬쩍 지나가자고 말했다. 한 번 더 모른 척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경찰관님.”
“어? 아. 예.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습미다. 친구가 조금 늦네요.”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오는 조수석의 한 놈. 이 새끼 한국 사람이 아니구나. 경찰 제복과 경비 옷을 혼동할 한국 사람은… 없다. 거기다 약간 어색한 말투까지.
김보성은 순식간에 인사를 건네는 조수석에 앉은 놈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당겼다. 유도 선수 출신 김보성의 손아귀 힘은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평이 자자했다.
열린 창문으로 반쯤 몸이 끌려 나온 놈은 반항할 틈도 없이 켁켁거리고 있었다.
흑인도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 들고 운전석 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 사이 백인은 두 걸음만에 뒷 차 운전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일촉측발의 상황이 삽시간에 벌어지고 말았다.
총을 겨눈 흑인이 김보성에게 소릴 질렀다.
“Damn it! We were supposed to just pass by, right?” (제기랄, 그냥 지나치기로 했었잖아?)
“쏘리, 쏘리하다. 나보고 경찰 아저씨라고 하잖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