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제 발로 들어온 잉어 떼
“이게 다?”
“응, 딱 5,000개 업체.”
“대단하다. 이제 겨우 K 타워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됐다. 고생했어.”
“나는 네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이 새끼, 뭔 뻘소리하려고 구름 위로 띄우고 지랄이야?”
“흐흐흐. 시혁아, 아니지… 회장님!”
“말해, 컴컴한 속내 감추지 말고.”
계속 비실비실 웃는 박하송과 숨은 뜻을 모르겠다는 시혁.
“시혁아, 사람은 신의가 중요해. 맞지?”
“아… 이 또라이 새끼, 오늘따라 왜 찐득거려?”
“헤헤헤. 전에 약속한 거 말이다.”
이제 알겠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
“하송아, 습관은 한번 굳어지면 바꾸기 쉽지 않아. 고쳐라.”
“뭔 소리야?”
“너는 나에게 고용된 일개 월급 사장이 아냐. 그 정도 집행을 스스로 못하고 일일이 내 통제와 지시를 받는 것은 이사급이 할 행동이다. 너는 K 미르 그룹 총괄 대표야.”
“……!”
“그래. 재량권은 윗사람이 부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경영자라면 쟁취할 줄도 알아야지. 회장이라고 다 옳은 판단을 하는 건 아니니까. 네가 옳다고 판단했고, 집행을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이 있다면… 그냥 해. 나중에 나하고 박터지게 싸우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그게 대표의 역할이다.”
“야! 500명 임직원들에게 연봉의 300% 성과급을 주는 일이란 말이다.”
“병신, 쪼다 새끼. 간이 벼룩보다 작은 쫌팽이.”
“진짜 한다… 내가 알아서.”
“저질러, 병신아. 앞으로 이런 일은 네가 알아서 집행하라고.”
“…….”
“장수의 영(令)은 추상같고 지엄해야 하는 거야. 회장에게 빌어서 얻어 왔다고 하면 앞으로 누가 네 명령을 따르겠냐? 다 내 눈치를 살피지. 하지만, 그냥 네 선에서 집행을 해 버리면… 모두 너를 보게 돼.”
“…….”
“때로는 네 직을 걸고 나와 싸울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너와 평생 좋은 친구로 남겠지만, 경영은 달라. 치열한 논쟁과 토의 끝에 도출된 결과는 모두 승복한다. 회장 할아비라고 해도 네 명분이 맞다고 판단했으면 대가릴 쳐 받아야지.”
시키는 대로 하는 조직은 병든다. 고인 물이 되는 거다. 하지만, 내부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논쟁하는 조직은 혁신을 이룬다. 분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싸움의 결과를 명분과 성과로 보여 주면 되는 것이다.
아직 박하송은 이런 부분에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들게 강침을 박아 줘야 한다고 생각한 시혁은 가일층 밀어붙였다.
“너, 할머니 트라우마가 있는 건 알아. 너무 훌륭한 할머니를 둔 덕분에 스스로 초라하게 생각되고 자괴감이 생기는 거, 백 번 이해해.”
“…….”
“그래서? 그냥 그대로 살래? 평생 500원 삥 뜯으면서? 이젠 졸업하고 나면 줄 사람도 없어, 새끼야. 그게 할머니에 대한 은근한 반항이고, 너 자신에게 대한 위안이었겠지. 나는 백 할머니 손자지만 그 돈 한 푼도 물려 받지 않겠다… 뭐 이런 합리화?”
“…….”
“정신 승리는 패자가 하는 거야. 쟁취해서 얻은 정복자는 절대 합리화 따위 하지 않아. 내가 명분을 만드는 거야. 내가 가는 곳이 바로 길이고, 내가 원하면 세상이 바뀌는 거… 그런 치열함이 너한테 보이지 않아. 아예 없어. 승부욕 말이다, 등신아.”
“내가 그렇게 물렁했단 거네?”
“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겠지. 할머니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짓눌려서 내심 자괴감만 간직한 병신… 그게 지금 너다, 하송아.”
“잔인한 새끼!”
“박하송, 잘 들어. 너는 알을 깨야 해. 안타깝다고 밖에서 구멍을 내면 노른 자위가 다 쏟아지기 마련이다. 네가 뚫고 나와야 한다, 스스로!”
인재다. 품성, 순발력, 총명한 머리… 다 나무랄 것이 없는 인재. 하지만 할머니를 극복하지 못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박하송은 시혁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은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독한 새끼, 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팩트. 지금껏 알면서 고치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런 하송의 성격을 알기에 재산을 물려주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사랑하는 손자에게 독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아니까.
* * *
“받았어?”
“브라보!”
“진짜 주실 줄 몰랐어. 꿈만 같다.”
“나는 처음 여기 입사했을 때 솔직히 못 미더웠어. 경영진이 너무 어려서 회사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싶었거든.”
“이 과장, 다 똑같았을 거야. 여기 SKY 본 적 있냐? 다 지잡대 아니면 그저 그런 대학 출신이 대부분이야. 이상한 회사 아닐까 하는 생각, 다 했을걸?”
“면접관으로 새파란 대표님, 또 한국말 한마디 못 하는 외국인 미녀 변호사가 있는 것을 보고 깜놀했다. 그나마 공사홍 부회장님이 계셔서 다행이었지.”
“응, 나는 공사홍 부회장님의 면접 기준을 듣고 입사를 결심했었어. 절박한 심정이 없으면 돌아가라. 캬아! 지금도 뼈에 새기고 근무한다.”
“하긴, 지난 일 년 동안 단 한 명도 이직한 사람이 없었어. 높은 급여, 멋진 빌딩, 최고의 복지, 명확한 진급 체계… 여긴 꿈의 직장이었던 거야. 이류 인생만 살다가 땡잡은 거지.”
“일년 연봉의 500% 보너스를 진짜 받아 볼 줄이야. 지난 3개월간 죽도록 고생한 보람이 난다.”
“조금 전에 마누라 전화 왔어. 울더라.”
“그런데,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동기에게 들었는데 말이야. 300% 약속한 것을 500%로 올려야 한다고 박하송 대표님이 악을 썼다더라.”
“응. 다들 대표님을 대하는 자세가 바꼈어. 대단한 분이야. 악을 쓴다고 승인해 준 회장님도 그렇지만, 결국 대표님이 만들어 준 것이니까.”
회사의 분위기는 사상 유래가 없는 보너스 지급에 천정을 뚫고 솟아올랐다. 특히 박하송 대표에 대한 칭송이 넘쳐흘렀다.
“이번에 입주 기업들도 노가 난 거야. 마치 스타트업 기업이나 벤처기업이 아니라 성공이 보장된 유망 업체가 된 셈이다.”
“그렇지. K 타워에 입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벌써 대우가 달라졌다고 눈물 글썽이는 입주 사장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어. 우리가 큰일을 해낸 거야.”
“미국에 실리콘벨리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K 타워가 있다… 국뽕 차오르지 않냐?”
“사내에서도 창업할 아이디어나 좋은 아이템 있는 직원은 적극 지원하라던데?”
“나도 고민 중이다. 이번 기회에 묵히고 있던 아이디어로 도전해 볼까?”
“해 볼 만하지. 프로젝트가 심사 통과하면 사표 낼 필요도 없잖아. 급여도 받으면서 사내 벤처를 할 수 있다면 꿀이지, 꿀이야.”
그리고 월요일.
K 타워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5,000개 기업이 입주하기 위해 줄을 선 것이다.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TV 방송국에서 생중계할 정도였다.
-지금 기자의 뒤로 K 타워가 보이고 있습니다. 삼성동 앞 대로가 이삿짐을 실은 소형 화물차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기자, 출입문이 그곳 하나인가요?
-아닙니다.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지만 K 타워의 여섯 개 출입구 중에서 K 미르 그룹 전용 출입구 외에는 모두 개방했습니다만, 너무 많은 업체들이 몰리면서 혼잡이 빚어지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 중소기업에도 들지 못하는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들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특혜들이 있기에 화제가 되는 건가요?
-본 빌딩은 우선 아시아에서 가장 최고층, 초호화 빌딩입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국내 최고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는 모조리 복지 매장이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식사, 쇼핑, 카페, 운동, 심지어 캡슐 호텔도 구비되어 있고요.
-그 외 입주사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책은 없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입주 기업은 최소 30명이 근무할 수 있는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받습니다. 또한 법무, 세무, 경영에 대한 컨설팅도 역시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이템을 사업화하기 위한, 그야말로 기업 성공의 혈액과 같은 자금을 은행보다 더 저렴하게 대출해 주거나, 기업 가치를 평가한 후 지분 출자 형식으로 지원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자금이 있기에 그런 시도를 하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K 미르 그룹 한국 법인의 자본금이 5천억 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산이 아니라 순수 자본금이죠.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거기에 매년 천억 원의 자본금을 증액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국민 여러분,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의 생중계를 듣는 앵커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지금까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는 K 타워 현장에서 KBC 이진상 기자였습니다.
* * *
“하송아.”
“응. 시혁아.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잘했어. 그런데 말이다. 이거이거…….”
“왜? 그 회사들 문제가 있나?”
“아냐. 좀 자세한 자료 좀 볼 수 있을까?”
시혁도 정말 깜놀했다. 당신들이 여기서 왜 나와?
한국대학교 85학번과 86학번의 전설. 시혁보다 한 학번 또는 두 학번 위의 선배들. 모두 공대였던 그들.
미래 한국의 IT 사업을 이끌고 유니콘(자산 가치 1조 원 이상 기업)을 일구는 선구자들 아닌가?
‘한글로 컴퓨터’의 이찬정.
깨톡 메신저의 김범소.
게임업계의 영원한 대부 김정중, 김택장, 송재강.
그리고 전 국민 70%가 이용하는 포탈, 나이버를 만든 이해찬.
하나같이 전설로 남는 선배들이다. 이렇게 만나는구나.
“이 업체들, 좀 각별하게 지켜봐. 그리고 가능하면 경영권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지분 확보하고.”
“어? 다 우리 선배들이네?”
“그래서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확실하거든. 무조건 성공한다. 이 회사들만 잡아도 투자비의 몇 배는 건질 거야.”
“특혜를 주라는 말이면, 나는 거부한다.”
“이 새끼, 조금 오냐오냐 했더니 눈에 뵈는 게 없지?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임마.”
“시혁이 너, 이 선배들 알고 있었냐? 모두 공돌이들인데?”
“몰라, 만난 적 없어. 그냥 촉이 발동했다고 생각해.”
“하긴… 너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꿰차고 있는 놈이니까. 알았어. 따로 챙겨 볼게.”
아이고, 하송아, 박하송아. 너 지금 황금 단지를 통째로 주운 거야, 등신아.
그 시간, 삼송SDS에서 근무 중에 단어로 원하는 정보를 검색하는 시스템을 구상하던 이해찬은 알 수 없는 기운에 몸을 떨었다.
‘아씨, K 타워 입주하느라 무리했나? 왜 갑자기 이렇게 춥지? 감기약을 먹을까?’
또 대학원 재학 중에 옆방에서 살았던 대학 동창이자 친구인 김정중과 송재강은 함께 목욕탕에서 두런거렸다.
“정중아, MMORPG 원조격인 쥬라기 공원이 텍스트로 하는 게 지겨워서 그래픽을 넣으면 좋겠다는 발상만 보고 우리를 뽑아 준 K 미르 그룹, 미친 거 아냐?”
“큭큭큭, 우리야 좋아하는 게임 만들고 좋지 뭘 그래? 돈이야 되건 말건 재미가 있어야 돼. 거기에 집중하면 좋은 작품 나오겠지.”
“그래. 게임이란 게 생동감이 생명인데, ‘팔을 들어 공룡을 때린다.’ 이렇게 자판으로 쳐 넣는 게 말이 되냐고?”
“근데, 왜 갑자기 춥다. 아직 가을도 가지 않았는데.”
“나도 그래. 오늘 입주하느라 힘 좀 써서 그런가?”
추울 수밖에.
모두 마수에 걸린 것이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빠져나가기 힘든 시혁의 손아귀에 걸렸으니, 감기에 몸살 오는 건 당연하다.
축하합니다. 선배들은 모두 제 밥이 되었습니다. 잘 버무려서 맛있는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겠습니다.
오히려, 시혁은 씩씩한 걸음으로 K 타워를 나섰다. 한국을 떠나기 전 꼭 만나야 할 두 사람.
그들을 만나고 나서 떠나자.
무한 자본을 만들려면 아직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