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이놈아, 도대체 얼마나 더 먹어야 직성이 풀리냐? 대충하면 안 되겠니?”
“할아버지, 탐욕이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네 마음 속에 도사린 욕망, 그게 심마다. 알고는 있어? 네가 지금까지 이룬 것만 해도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단 하나만 성공해도 자축할 일을 수천, 수만 배 이뤘거늘……. 뭘 더 먹겠다고 나가?”
“…….”
“네가 가진 부를 합하면 웬만한 소국은 사고도 남을 게야. 거기다 세븐시스터즈가 만만한 회사더냐? 전 세계 석유의 절반을 가진 곳이다. 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놈이 또 너란 말이다, 시혁아.”
“…….”
오늘따라 과격하게 말리는 정조영 회장.
“시혁아, 네가 원한다면 현도그룹을 통째 넘겨주마. 그래 봐야 세븐시스터즈 한 개 회사만도 못 하겠지만, 이 한국 땅에서는 황제처럼 행세할 수 있는 힘이 있다.”
“……!”
“거기다 너는 한국 대통령을 만든 사람. 그뿐이더냐?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도 네 말 한마디면 버선발로 달려오는 상황이다. 하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저 되놈들은 어떻고? 거기 주석이 며칠을 걸러 안부 인사를 하고 있어.”
“할아버지.”
“닥치고 들어. 너는 특출 난 놈이다. 정말 신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할애비가 모르는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미래를 꿰뚫어 보고 있어,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그래… 네 그런 능력 덕분에 나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라크에서 발을 뺀 것은 신의 한 수였지. 자칫 현도건설이, 현도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뻔했다.”
“…….”
“생각만 해도 등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그걸 막아 준 네 공을 어찌 모르겠느냐? 너는 그런 놈이다, 시혁아.”
왜 이렇게 장황한 말씀을 하는지, 시혁도 알고 있다. 할아버지의 진심이 가슴에 와 닫는 것이다. 오죽하면 당신이 평생을 바쳐 일군 현도그룹을 통째로 줄 수 있다고 할까? 친자식도 아닌 시혁에게.
하지만… 이미 시혁의 결심은 공고했다, 콘크리트처럼.
“할아버지, 다 맞는 말씀이예요. 지금까지 쌓은 부만 가지고도 대한민국 제일 부자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전 세계를 통틀어도 손가락에 꼽힐 수 있겠죠. 돈으로만 따지면 말입니다.”
“할애비나 너나 그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 아니더냐? 그런데 너는 돈이 목적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네, 저는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치졸한 복수심 때문에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복수? 삼송이더냐?”
“……!”
“쯧쯧쯧! 이놈아, 명색이 현도그룹 왕회장이다. 네가 삼송과 불편한 관계란 걸 캐치 못 할 것 같더냐? 유달리 삼송과 각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제기랄… 이쯤 되면 커밍아웃 해야 한다. 진심으로 대하는 정조영 회장에 대한 예의도, 할 짓도 아니다.
“예, 내용을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맞습니다, 삼송.”
“할애비가 나서서 부숴 주리? 그럼 네가 좀 편해지겠냐?”
“……!”
“얼마든지 싸워 주마. 지금까지 현도와 삼송은 크게 사업군이 겹치는 게 없었다. 겨우 설탕이나 만들고 사카린 밀수나 하던 놈들. 그런데 변했다. 이건호가 회장으로 등극한 이후 무섭게 성장했어. 특히 전자를 중심으로 완전히 체질 개선에 성공한 셈이다. 현도의 턱밑까지 따라왔다.”
“하이고, 할아버지. 삼송과 싸워서 무슨 득이 있다고요?”
“그래, 막상 현도와 삼송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 한쪽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겠지. 설사 이겨도 현도 역시 상처투성이일 테고.”
“그런데 할아버지가 왜 싸워요?”
“내 손자의 원수니까.”
하아… 이 할아버지, 진짜 대책없다. 이 지독한 무한 사랑을 어쩌면 좋나.
“아까 말했지만, 삼송은 이미 제 적수가 아닙니다. 적절한 시점이 오면 깔아뭉갤 수 있어요. 기다리는 이유는… 아깝다고 할까요? 삼송이라는 이름이.”
“이름?”
“네,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먼 미래에 이 삼송이라는 이름, 브랜드 가치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게 됩니다. 물론, 현도도 충분히 글로벌화돼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어떤 브랜드도 삼송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 동력을 지금 죽이고 싶지 않은 거죠. 저도 한국인이니까.”
“질투 나는 말이구나.”
“뭐… 어쩔 수 없습니다. 팩트니까요. 저는 삼송을 사랑합니다. 그 이름 앞에 경의를 표해요. 대한민국을 받치는 든든한 기둥 아닙니까?”
“복수는?”
“별개죠. 언제든 할 겁니다. 한시도 잊지 않고 있어요.”
“그래도 기다린다?”
“네, 아직 병아리에 불과한 삼송을 공룡으로 바꾸는 일의 적임자가… 불행히도 이건호 회장입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삼송을 티라노사우루스처럼 살찌우지 못합니다.”
“허어, 고약하고 고약한 놈일세. 음흉하기 짝이 없지 않나?”
“흐흐흐. 그런가요?”
“너와 적이 된 이건호 일가가 불쌍하네. 어쩌다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놈에게 찍혔나 그래.”
시혁과 정조영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정조영은 시혁에게 편히 살라 한다. 그만하면 됐다고, 다 이뤘으니 내려놓으라 한다.
넌 행복할 자격이 있다며,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가정을 이루라고 한다.
더 이상 탐욕에 찬 모험을 멈추라 한다.
“할아버지, 기독교에서 말하길… 인류가 생긴 이래로 가장 치명적인 죄가 있다고 해요. 정욕, 시기, 분노, 탐욕, 탐식, 교만, 나태. 이렇게 7가지를 꼽습니다.”
“뜬금없이 웬 예수쟁이 이야길 하고 지랄이냐?”
“하하하. 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남자에게 정욕은 당연한 거고, 시기한다는 말은 아직 의욕이 남아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누구든 적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동기부여가 됩니다. 탐욕과 탐식은 약자가 가질 수 없어요. 강자의 권한입니다.”
“아직 두 가지 남았다.”
“예, 마지막 교만과 나태… 이게 문제입니다. 이건 절대 가지면 안 됩니다. 그 순간 무너집니다. 아무리 힘들게 성을 쌓아 올려도, ‘이제 됐어. 충분해…….’ 이렇게 안주하면 모든 것이 무가치해지고, 모든 게 허무해지고, 모든 게 시들해져요.”
“……!”
“그걸 바라는 건 아닐 거라 봅니다. 할아버지 시대에는 무조건 열심히 하면 뭔가 이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과 결탁하고, 거래를 하고, 거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할아버지, 앞으로도 그럴까요? 세상은 눈부신 광속의 발전을 할 겁니다. 교만하고 나태해지면 끝이거든요. 시혁이가 그랬으면 좋겠습니까?”
“…….”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부의 성을 쌓았어요. 대한민국 제일의 현도그룹을 주실 분도 있습니다.”
“…….”
“멈춰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놈 이놈, 내가 어찌 말로 너를 당하랴. 알겠다, 내가 착각했구나. 내가 살아온 날만 생각했다. 네가 살아갈 날은 다르다는 것을 까먹었어. 맘대로 하거라, 네 맘대로.”
“네, 저는 전 세계의 모든 부를 한 손에 움켜쥘 겁니다.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드는 세상, 제 마음대로 만들 수 있도록.”
* * *
이어서 시혁이 방문한 곳은 청와대.
정문의 101 경비단 경찰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저 차… 도대체 무슨 차가, 저렇게 생겼냐?
우리나라 차는 아닌데… 전면부 그릴이 역삼각형, 정말 독특한 디자인에 빨간 색도 아니고 짙은 와인색의 희한한 모양이다. 어찌 보면 강남에서 출현한다는 오렌지족 차 같다. 저런 놈이 이 지엄한 청와대, 그것도 현관으로 들어와? 죽을라고… 씨!
그러나 제지하려던 경찰은 바로 뒤를 향해 빨리 문을 개방하라는 신호로 손을 휘저었다.
제길, 저번에 경호관에게 들었던 그 사람. 우리 정도는 입김으로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그 사람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알파로메오? 듣도 보도 못한 저 차가 이탈리아산 명차란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시는 모습을 TV로 봤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각하.”
“응, 깡패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억압하고, 갈취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침 네가 일본 용병에게 기습당하는 일도 있었고. 이번 기회에 조폭의 씨를 말릴 작정이다.”
“군부와는 좀 더 거리를 두십시오. 지금 각하는 오직 국민의 지지만 보고 친서민 정책을 펼치시면 됩니다.”
“흠… 시혁아, 중국 모택동이가 그랬다,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백성을 위하는 것도 좋아. 하지만 최악의 순간을 생각한다면 군을 내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 든든한 법 아니겠냐?”
철학의 부재다. 군인 출신 대통령의 명확한 한계.
“각하, 전도환과 같이 탱크로 역사를 뒤집었습니다. 이건 주홍글씨처럼 평생 따라다닐 겁니다.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각하는 전도환과 다릅니다. 체육관의 거수기가 아니라 국민이 직접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입니다.”
“끄응! 네 독설은 변하지 않는구나.”
“쓴 약이라야 병을 고칩니다. 꿀물은 눈을 멀게 만들고요.”
“그래, 계속해 보거라.”
“이제 다시는 탱크로 정권을 잡지 못합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을 죽이지 않는 한… 이미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아 버린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군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권력은 총부리가 아니라 민심에서 나옵니다.”
“그래, 알겠다. 그리하마. 그런데 말이다…….”
“예, 제가 조언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나는 어떻게 되느냐? 네가 보는 미래 노태후의 모습이 궁금하구나.”
“……!”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되느냐?”
“…….”
대답을 못 하는 시혁을 보고, 노태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편하게, 그래. 편하게 네 예측을 듣고 싶구나.”
“…괜찮겠습니까?”
“충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괜찮아.”
진심일까? 진심으로 보인다. 지금 노태후의 표정은 달관한 모습이다. 그저 궁금한 것이다. 항상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을 했던 시혁이다.
“아마, 전도환과 같이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옥에 가실 수도 있고요. 엄청난 추징금을 내셔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냐?”
“예, 정사는 지배자의 일기고, 야사는 패한 자의 울음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노태후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잘하고 있다고,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비록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나름 국민에게 다가서는 정책들과 탈군인화, 민주주의 존중을 위해 무던히도 참고 인내했기에… 지금 시혁의 말이 못내 섭섭했던 것이다.
“각하, 운명이라 생각하십시오.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시고 과감하게 정권을 민간에 이양해야 합니다. 각하 개인의 보신과 영달을 위해 권력을 쓰시면 안 됩니다. 오로지 국민만 보십시오. 그게 진정 역사 앞에 속죄하는 길입니다.”
“너, 너, 너란 놈은… 정말 잔인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 이렇게 상처를 쩍 벌려 놓고 거기다 소금까지 끼얹는지 모르겠다. 하아!”
“죄송합니다. 저도 달콤하고 좋은 말, 할 줄 압니다, 잘합니다. 그러나, 그건 각하께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내가 감옥에 간다고? 기가 막힌다. 그런데도 내 후대를 보호받을 수 있는 군 출신이 아니라 민간에 넘겨주라고? 보나마나 바로 목을 조를 터인데?”
“예, 어차피 그리됩니다.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각하의 손을 떠났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노태후는 잠시 머리를 흔들다가 미친 듯이 웃었다, 마치 실성한 놈처럼.
나중에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배를 잡고 광소를 터트린 노태후. 마주 앉은 시혁이 당황할 정도였다.
“나오시구려, 김 총재.”
그러고 보니 평소와 다르게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작은 별실로 안내되었다. 그 별실과 연결된 다른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아마 경호 문제 때문에 그럴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시혁은…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곤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