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02화 (102/150)

102화 김양삼과의 조우

검은 머리칼 사이사이에 섞인 흰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멋쟁이.

경남 통영에서 수십 척의 멸치 어선과 가공 공장을 가진 전통 금수저 출신… 미래에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연소 나이, 25살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내리 9선을 하는 직업 정치인.

처음에는 국회 부의장과 국무총리 비서로 근무하다가 자유당 소속으로 뺏지를 달았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이에 반발, 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긴 뒤, 평생을 군사정권에 맞서는 야당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

바로 앞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다중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후를 대통령으로 만든 주역. 하지만 지금은 노태후, 김종팔과 함께 3당 합당을 하고 소위 적진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들어간 불굴의 승부사.

경제를 ‘갱제’라고 발음하고 조금 억지 같지만 관광을 ‘간강’이라 들릴 정도의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래, 김양삼이었다. 그 사람이 열려 있던 다른 방 문을 열고 나와?

“다 들으셨죠? 김 총재. 푸하하하.”

“김시혁 군, 나 김양삼이요. 반갑소.”

“아, 예. 안녕하십니까? 김시혁입니다.”

“대차고 결기가 보여, 상남자다. 직이네?”

“네?”

“니… 뭐꼬?”

“예?”

“몇 학번이라꼬?”

“아! 선배님, 저는 87학번입니다.”

“응, 글체? 내는 완전히 화석이다, 아나?”

“문리대 철학과 48학번이면… 예, 화석 맞습니다.”

“글나? 인정하제?”

유쾌한 사람이다, 첫 인상은. 아무리 대선배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렇게 쾌활한 사람… 그 오랜 세월 정치판에서 닳고 닳았건만 거침없는 성격. 순수하달까?

“각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시혁아, 나는 여대야소로 만들라는 네 말대로 3당 합당을 했다. 그런데 김 총재께서 묻더구나. 군바리 출신이 왜 후배를 밀지 않고 자신을 미느냐고? 그래서 네 얘기를 말씀드렸더니, 꼭 한번 보자고 하시지 뭐냐?”

뒷말은 김양삼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내 옆방에서 다 들었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입장에서 그리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 살다 살다 처음 본다. 니… 진짜 멋진 놈이데이.”

“…네. 송구합니다, 선배님.”

“아이다. 내도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참느라꼬 어금니를 너무 깨물었더니 턱이 아프네. 크크크.”

“…….”

“땅크 몰고 역사를 찬탈했다. 쿠데타의 주역이다. 이건 주홍글씨로 따라다니다 나중에 감옥 갈 거다. 그래도 지금 국민만 바라보는 정치를 해라. 그게 역사 앞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이다……. 보레이, 이런 말을 대통령 면전에 대고 하기 쉽더나? 니 간뎅이 진짜 직인다, 맞제?”

“듣고 계신 줄 알았으면 좀 더 심하게 할 걸 그랬나 봅니다.”

노태후도, 김양삼도 멍한 얼굴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둘 다 또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통쾌한 것이다.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 몰라도 시혁이 같은 별종이 있다는 사실이 못내 좋은 것이다.

“각하한테 들었다, 또 내도 나름대로 알아봤고. 부시하고 깐부(짝꿍)라 카데. 또 짱꼴라 장쩌민은 니를 무슨 귀빈처럼 모신다 카고… 마이 쎄다. 이미 한국 대통령 정도는 물로 본다 이기가?”

웃고 있지만, 내심은 아닐 것이다. 거물이 되었으니 이렇게 막 행동하는 것이냐? 한국 대통령 정도는 무시한다는 말이냐? 이거다.

“선배님, 제가 미국 정부로부터 차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연봉도 나옵니다. 심지어 SS가 일호 경호를 해 줍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제 여권은 여전히 대한민국입니다. 이건 결코 변하지 않을 겁니다.”

“호오! 글나?”

“예, 그리고 노태후 대통령 각하는 제가 처음 시드 머니를 마련할 때, 도움을 받은 처지입니다. 그 덕분에 제법 돈을 벌었습니다. 오늘날 김시혁의 토대를 만들어 주신 분이죠. 저는 올챙이 적을 잊은 적 없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음… 맞나? 그라믄 내하고도 깐부 할끼제?”

“……!”

“니 덕분에 각하한테 미움이나 견제도 안 받고 제대로 해 볼 기회를 맞는 셈인데… 막상 중간에 내를 이토록 만들어 놓고 발을 빼믄 되겠나? 유종지미, 알제? 니가 뿌린 씨앗을 거둘 때까지 내하고도 깐부 해야 되지 않겠나?”

아… 잘못 걸렸다. 또 예기치 않게 신기 충만한 무당이 되야 하는 판국이네. 그런데 김양삼은 무속 신앙을 무지 싫어하는 정통 개신교 신자 아니었나?

빙글빙글 웃고 있는 노태후와 다그치듯 밀어붙이는 김양삼.

“내가 되긴 되겠나? 어떻노?”

“…….”

“에이… 짱구 고마 굴리고 말해 보거라. 우리 오늘부터 깐부 1일차잖아? 그렇다고 따로 복채를 내거나, 니한테 특혜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는 거 명심하고, 사심 없이 말해 보거라.”

“…네, 선배님은 여러가지 타이틀을 거머쥘 겁니다. 역대 최연소, 최다선 국회의원은 이미 달성하셨고, 최초의 문민 대통령, 재도전으로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 가장 많은 당적을 가졌던 대통령, 전임자보다 연장자 대통령, 첫 한국대 출신 대통령, 가장 많은 6명의 자녀를 둔 대통령.”

“우와! 일마 이거… 니 완전 간신 아이가? 어쩜 귀에 쏙쏙 박히구로 기분 좋은 말만 골라서 해 주노? 직인다.”

아닙니다, 김양삼 선배.

당신은 지금 마주 보고 있는 노태후와 전도환, 두 전직 대통령을 잡아넣는 당사자가 될 거고, 군내 사조직 하늘회를 쓸어버릴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사형을 집행한 마지막 대통령 그리고 미래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 중 임기를 마치고 숨을 거둘 때까지 전직 대통령 예우를 온전히 받는 유일한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치적도 있죠.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했어요. 치욕의 일본 총독부를 해체하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노무한, 이명보, 이화창, 손학규, 이재오, 정의화, 김영춘, 박형준, 안희정, 이광재, 심재철, 최기선, 박재호라는 걸출한 사람들을 정치판으로 끌어 낸 당사자였습니다.

너무 많군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정말 중요한 팩트 하나…….

당신이 국가를 부도냅니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IMF 사태를 부르는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앞서의 모든 공과 중 문민정부를 발족시켰다는 점, 군을 정치에서 완전히 밀어냈다는 점, 쿠데타의 주역 전도환과 노태후를 단죄했다는 점은 확실히 백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 모든 공도 국민들의 삶을 통째로 들어내고, 치욕스런 삶을 살게 만든… 그 IMF 사태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을 부도낸 당사자가 당신입니다.

나도 당신을 보면 헷갈립니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 * *

결국 산드라의 뜻대로 전용기를 사고 말았다. 자그마치 400인승 보잉 747이다. 이를 50인승으로 바꾸려면 침실과 화장실, 회의실 등 통짜 구조 변경이 필요하다. 빨라도 1년 이상 걸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 친구, 잘 있었나?]

“국왕 전하, 웬일이십니까?”

[한번 들려, 요즘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오만 왕국의 술탄.

이 양반, 비밀을 같이 공유한 이후로 뻑하면 술 타령이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조심하셔야죠. 무슬림이, 그것도 술탄께서 알코올 중독자란 게 밝혀지면… 상당히 쇼킹할 겁니다.”

[친구, 모르지? 사실 그건 비밀이 아냐. 알 만한 놈들은 다 알거든. 국민들도 쉬쉬하지만 눈치 까고 있을걸? 흐흐흐.]

“진짜 대책 없군요. 하여튼 무슨 일입니까?”

[장난감 하나 줄까?]

“갑자기 그 무슨 뜬금없는 말이예요?”

[내가 이 년 전부터 보잉에서 비행기를 하나 만들고 있지. 그런데 자네가 전용기 주문을 넣었다길래 급히 전화한 거야.]

“어쩌라고요?”

[원가에 넘겨줄게.]

“…왜요?”

[자네 덕분에 돈 많이 벌었거든. 위약금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그래도 유가가 워낙 많이 뛰었고 무엇보다 위상이 높아졌다고 할까나……. 나랑 사우디 국왕이 방귀만 쏴도 벌벌 떨거든?]

씨… 더럽게.

그래도 고마운 일이다. 자신의 물건을 남에게 내놓는다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전용기를.

그러나 다음 말에 분노 게이지가 최고조로 상승했다.

[고맙지? 그렇지? 나는 말이야. 그런 비행기 여섯 대나 있어. 부럽지? 그렇지?]

“…고맙고 부러운데, 왜 이렇게 성질이 나죠?”

[흐흐흐, 억울하면 땅을 파 보든가? 석유가 나올지 또 아나?]

“젠장… 그놈의 석유.”

그렇게 뜻하지 않게 인수한 전용기.

솔직히… 너무 좋다. 기가 막힐 정도로 화려하고 멋지다. 무슨 화장실 수도꼭지가 도금이 아니라 순금? 침실 문 손잡이도 순금, 침대 머리도 빤짝거리는 순금이란다. 잠이나 오겠니?

원래 400명이 타는 좌석을 싸그리 들어내고 달랑 50명만 타도록 개조했다. 얼마나 편할까, 두 말하면 잔소리지.

50명 모두 앉을 수 있는 회의실과 별도로 마련된 응접실은 또 어떻고?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집무실도 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전용기 차원을 넘어 하늘의 사무실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혁아, 내가 출세하긴 했나 봐.”

“이 새끼, 또 뭐라는 거야?”

“비행기 1등석도 못 타 본 내가 전용기를 타고 미국에 갈 줄이야. 널 만난 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나 봐.”

“아니, 하송아. 내가 너를 만난 게 행운이지. 넌 아직 각성을 못했을 뿐, 세상의 꼭대기로 갈 거다, 나하고 같이.”

“…세상의 끝이 어딘데?’

“우리가 만드는 곳, 남이 이룬 것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우리 맘 먹은 대로 만든 곳, 세상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곳이지.”

“꿈꾸냐?”

“응. 맞아, 꿈일 수도 있겠다. 하송아, 꿈은 깨면 없어진다. 그런데 눈을 떠도 꿈이 그대로라면… 그건 꿈이 아닌 현실이 되는 거다. 그렇게 만들면 된다.”

박하송은 시혁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엉뚱한 놈, 갑자기 만점 수집가라는 별명으로 등장하더니, 어느 날 잔뜩 술을 먹이고 노예 계약서에 지장을 찍어 버렸다.

처음에는 할머니를 이용하려는 의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저놈이 가진 자산은 할머니의 모든 것을 합쳐 봐야 발톱에도 미치지 못할 황금의 산, 그걸 쌓는 동안 할머니의 도움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모두 스스로 만들었다.

그럼 도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고 억지로 대표 자리를 맡긴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 부장.]

“어, 박 대표. 별일 없지?”

[그동안 고마웠다.]

“어디 가?”

[…그건 아니고, 감사의 인사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싱겁기는… 오늘은 회장님 일정 때문에 바쁘니까, 내일 한잔하자. 수시로 우리 혜림이 돌봐 줘서 고마워.”

[그게 무슨 힘든 일이라고… 나도 혜림이 덕분에 행복했고 즐거웠어.]

“박 대표, 회장님 나가신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끊자, 미안!”

그게 마지막이 될 줄 그땐 몰랐다.

백 할머니가 재산의 거의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극히 일부만 물려받은 박하송.

배운 게 도둑질이었던가? 신용금고를 만들었지만, 망했다. 성격상 워낙 남을 의심할 줄 몰랐던 박하송에게 금융업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감빵에서 몇 년을 썩은 뒤 출소했고, 주위 모든 이들이 등을 돌렸다. 그래도 시혁만큼은 변함없이 동기로, 친구로 대해 줬었다.

왜 몰랐을까? 그동안 고마웠다. 행복하고 즐거웠다. 모두 과거형… 박하송의 마지막 인사를 시혁은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까짓 회장 수행이 뭐라고.

그날 저녁, 이자룡이 두 번 띠동갑인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시혁은 차 안에서 기사와 대기하다가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오열을 멈출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김시혁 씨 맞습니까?

-예, 그런데 누구시죠?

-여기 영등포 경찰서인데요. 박하송이라는 분 아시죠?

-네, 친구입니다만.

-박하송 씨의 마지막 발신 전화가 김시혁 씨라 연락드린 겁니다.

-마지막… 발신 전화… 라고요?”

-네, 박하송 씨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가친척 누구도 확인을 거부하네요. 죄송하지만 잠시 오셔서 시신 확인 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보낸 친구였었다, 박하송은.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내 친구 하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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