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부시의 재선을 위하여
미국에 온 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다. 연말이 코앞이다. 며칠 후면 1992년이 시작된다.
박하송을 공사홍 부회장에게 붙여 놓고, 시혁은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였다. 시혁이 미국에 왔다는 소식에 가장 빈번하게 연락하는 사람은 당연 부시 대통령.
살이 홀쭉하게 빠졌다. 그럴 수밖에. 또 4년을 대통령으로 지내느냐, 대학을 기웃거리면서 강연이나 다니느냐가 결정되니까.
시혁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또한 성공 여부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금껏 몇 년간 많은 것을 이뤘다. 다시 회귀한 이후 가지게 된 치트키… 총명한 두뇌, 활성화된 육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무기는, 미래를 안다는 점. 이만큼 강력하고 확실한 것은 없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영역에서 빗겨 난 존재였기에, 남들은 모르는 영역과 사업을 선점했고 그로 인해 막대한 자본과 성공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시혁의 남다른 노력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시혁이라는 존재 자체가 기적인 셈이다. 어쩌면 세상에 반하는, 역사에 위배되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혁은 되도록이면 역사의 큰 흐름을 비틀지 않으려 조심해 왔다.
만약, 미래에 대한민국을 좀먹는 대통령이 될 현도건설 사장 이명보를 미리 쳐 낸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정조영 회장에게 언질만 해도 이명보는 아웃이다. 그의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다.
참았다. 그 쥐 같은 면상을 몇 번 보면서 욱하는 마음이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참았다.
이게 다인가?
아니,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 자신이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자연에 역행하는 것일 진대…….
또 무수한 역사를 알게 모르게 뒤틀어 버린 점이 없다 할 수 있을까? 많았다. 그렇게 따지면 너무 많았다.
시혁이 장악한 회사들 하나하나는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걸 미래를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시혁이 선점했다. 이건 역사를 바꾼 게 아닌가?
백악관으로 가는 와중에도 시혁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조시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 좋은 사람이다. 시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한 팔을 내줄 수 있는 텍사스 상남자. 한 번 입은 은혜를 뼈에 새기고 잊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지금 곤경에 처해 있다. 그리고 올해 선거에서 패배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도와야 하나? 또다시 미래 지식을 이용해 그의 재선을 일궈야 하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프레지던트?”
“하하하, 많이 놀랐나?”
“…지금 제가 헛것을 보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앉게, 그렇게 됐어.”
백악관 오벌 오피스가 아니라 숙소로 오라는 말에 무심코 들어섰더니… 세상에!
“별건 아니고, 내 경호원 중에 웨인이라는 친구가 있어. 자네도 알지?”
“네, 마샬 패트릭 웨인 요원. 옛날 한국 대통령 방문 전에 선발대로 왔던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에게 꼬장을 부렸던 사람입니다. 바로 화해를 하긴 했습니다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그놈도 텍사스 출신이라서 성깔이 좀 있긴 하지. 하여튼 웨인의 아들이 지금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라네.”
“……!”
“머리야 금방 자라기 마련, 조금이나마 웨인에게 위로를 하고 싶었어. 나도 둘째 딸 로라를 3살 때 백혈병으로 잃은 적이 있어서 그 슬픔을 누구보다 더 잘 아니까 말일세.”
하아…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린단 말입니까?
“다른 참모들이 반대하진 않았습니까?”
“껄껄걸, 아직 몰라. 자네 도착하기 얼마 전에 바바라에게 부탁해서 밀어 버린 거야.”
“영부인은 쾌히 승락하셨고요?”
“응, 바바라 자신도 밀겠다는 걸 말리느라 혼났네.”
“아아아… 그래도 너무 나가셨습니다. 부시 주니어는요?”
“방금 모자 쓰고 나갔네. 내일 텍사스 레인저스의 중요한 경기가 있거든.”
“똑같이?”
“당연하지. 아들에게는 로라가 바로 밑의 여동생이 아니겠나?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이는 모양이다. 슬쩍 눈물이 비친다.
아! 당신을 어찌하랴?
“조금 있으면 바바라가 담근 김치를 맛볼 수 있을 거야. 코리아 타운 한식당을 몇 번이나 찾아가 배웠다더군.”
“…….”
“맛이 없더라도 그냥 먹어 줘. 바바라가 슬퍼하면 감당이 안 되거든, 부탁함세.”
X발… 진짜 어쩌란 말입니까? 당신 가족의 무한 사랑을, 그 위대한 인간애를.
시혁도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감동이 넘치면 이렇게 슬프다.
그렇게 받아 든 저녁 식사.
바바라 여사가 담근 건 김치만이 아니었다. 잡채와 미역국……!
그랬구나.
오늘이.
시혁의 생일이었다.
한국인들이 음력 생일을 쇤다는 걸 모르는 부시 부부가 생일상을 준비한 것이다. 이를 위해 바바라 여사는 코리안 타운 한식당을 몇 번씩 가서 직접 배웠단 말이네.
나는 나쁜 놈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고민했던 이유도 이해득실을 따진 건 아닐까? 역사를 되도록 비틀지 말자는 어쭙잖은 핑계를 통해 피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제 충분한 힘을 비축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더 이상 미국 대통령에게 기댈 필요가 없다고, 자력으로 세상 꼭대기를 올라갈 자신이 있다고… 내심 생각한 것이다.
문득 정조영 회장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7가지 치명적인 죄악 중 피해야만 하는 두 가지, 교만과 나태……. 실은 자신이 하고 있었다, 나쁜 새끼.
나는 정말 나쁜 놈이었다. 큭큭큭.
“프레지던트, 부탁이 있습니다.”
“응? 자네가? 웬일인가?”
“네, 꼭 들어주십시오.”
“친구에게 부탁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 말하게, 뭐든지.”
“…….”
또 목이 콱 막혔다.
“자네, 오늘 조금 이상하네. 왜 그러나?”
“프레지던트, 오늘 이 시간부로 저에게 전권을 주십시오.”
“……!”
“지금 상태로 진행되면 프레지던트는 무조건 재선에 실패합니다. 백 퍼센트 낙선합니다. 인정하십니까?”
“…솔직히 쉽지 않아. 걸프전을 승리하면서 90%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이 완전 바닥을 기고 있어. 위험한 상황인 걸 인정하네.”
“맞습니다. 미국의 경제가 얼어붙고 있습니다. 거기다 얼마 전 벌어진 테일후크(Taklhook) 스캔들이 치명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항공모함에는 어레스팅 와이어가 급속 착륙하는 전투기를 잡아 준다. 그렇지 않으면 짧은 활주로 탓에 전투기는 항공모함에 기착할 수 없다.
여기에서 유래된 해군의 모임, 테일후크 심포지엄. 이 심포지엄은 해군 참모총장과 해군 장관도 참석하는 게 관례가 된 현직 해군 연합 모임이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 성공한 후 라스베이거스에서 ‘테일후크 91’이 열렸다. 이 모임에도 해군 참모총장과 해군 장관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참석해 해군 항공대 장교들과 사교의 장을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여군이 나서더니, ‘여군도 전투기를 타면 안 됩니까? 왜 여군은 전투 임무에 투입되지 않습니까?’라고 돌직구를 날려 버렸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싸하게 변했고, 그날 밤 힐튼 호텔 3층의 파티에서 자그마치 83명의 여성 해군이 성폭행 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완전 또라이들… 미친 짓이었다.
이때만 해도 해군에서는 남성이 절대 갑으로 여군을 전투기에 태우지 않았던 시절, 여성이 밥그릇을 탐낸다고 생각한 해군 남성들의 광기 어린 짓이 벌어진 것이다.
문제는 사건의 처리 과정.
사건은 지휘부에 의해 묻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군 인적자원차장으로 있던 바버라 포프(여성)가 사건을 다시 파헤치려고 해군 제독을 만났는데…….
‘a lot of female Navy pilots are go-go dancers, topless dancers or hookers. 해군 항공대 기집애들은 다들 창녀란 걸 모르쇼?’ (실화다. 정신 나간 수컷의 전형.)
포프는 피해자 몇 명을 설득, 해군 정복을 입힌 후 기자회견을 열어, 이를 다 까발려 버렸다.
미국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존경받는 미국 해군이, 그것도 참모총장과 장관이 참석한 파티장에서, 한 명도 아니고 83명이 집단으로 강간을 당해?
있어서도, 있을 리도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 뉴스를 접한 국민들은 시위에 나설 정도로 흥분했다.
그 여파가 엉뚱하게 부시 대통령에게 미친 것. 부시가 해군 항공대 출신이란 이유로 옴팡 뒤집어쓰고 있는 중이었다.
너도 그랬겠지. 부시, 너도 똑같은 놈이겠지.
“프레지던트, 국민들은 정부를 볼 때 딱 두 가지만 생각합니다. 복잡하지 않아요.”
“…….”
“내 삶에 정부가 도움이 되느냐? 이건 경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도덕적 흠결이 있느냐? 이 두 가지 모두 딱 걸린 상황입니다.”
“방법이 있겠는가?”
“찾아야죠. 그래서 저에게 전권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판세를 뒤집으려면 몇 가지 극약 처방을 해야 합니다. 앞 전 대선에서 프레지던트보다 훨씬 앞섰던 두카키스 후보를 생각하십시오.”
“음… 어찌하면 되겠는가?”
“지금까지 선거 전략을 짰던 팀들은 다 짜르십시오. 바보처럼 대응해서 프레지던트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제가 선거 대책 본부를 맡겠습니다. 제 지시를 바로, 즉각 이행할 수 있는 참모들로 판을 새로이 짜겠습니다.”
“…….”
“꼭 프레지던트를 당선시켜 역사에 남을 위대한 대통령 반열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시혁은 결심을 굳혔다. 역사를 뒤틀지 않는다고? 비겁한 변명이었다. 할 수 있으면서 애써 피한 자신을 질책하자. 더 이상 친구를 외면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
* * *
다음 날 뉴스는 온통 부시 대통령의 빡빡 깎은 머리로 장식되었다.
백악관의 정원, 로즈 가든은 대통령이 가끔 나서서 기자들과 격의 없는 말을 주고받는 장소였다. 나중에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정식 기자회견장으로 활용되지만.
대통령이 나타나자 기자들은 말을 잊었다. 순식간에 침묵에 잠긴 것이다.
저건 뭐냐?
왜 갑자기 대통령의 머리가 저 모양이야?
겸연쩍은 듯,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부시를 향해 기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아우성을 쳤지만… 부시는 그냥 웃기만 했다.
-부시, 드디어 미친 건가? 치매 초기 증상?
-대통령의 삭발, 무슨 의지를 담은 것인지 의문만 커져.
-또 전쟁을 준비하는 부시? 이란, 시리아, 북한 몸 사려.
-지지율 바닥, 여전히 불씨가 남은 테일후크 스캔들, 최후의 발악처럼 보이는 대통령의 삭발.
-꼴불견 삭발, 마치 일본의 스킨헤드족 연상케 해.
-부시, 탈모 증상을 숨기려는 듯.
-천만 탈모 환자조차 부시의 이번 행동을 비난하고 나서. 오히려 혐오감을 조성한다고 성토.
대부분 이런 식의 기사 일색이었다. 가뜩이나 지지율이 바닥난 대통령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어 기사의 값어치를 높이려는 기레기들의 기사는 며칠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백악관도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았다.
* * *
“이게… 사실입니까?”
“네.”
“보스, 혹시 부시의 재선을 도우려는 겁니까?”
“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만든 겁니까? 이건 저널리즘에 어긋납니다. 흡사 PPL 광고를 해 주는 것과 똑 같은 것 아닙니까?”
“버트, 제가 일부러 찾아온 이유는 분명 목적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체적인 어떤 자료나 증거를 제시하지 않을 겁니다. CMM이 자체적으로 취재를 하세요. 만약, 프레지던트가 의도적으로 이런 장면을 연출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 즉시 비난 기사를 내보내도 상관없습니다.”
“……!”
“저도 놀랐습니다. 그의 인간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머리를 밀어 버릴 줄은 상상을 못 했으니까요. 그는 진정한 남자입니다. 그리고 인간애를 아는 사람이예요.”
“알겠습니다. 저는 보스에게 어떤 말도 듣지 않은 겁니다. 지금부터 진짜 독한 기자들을 붙여서 티끌부터 모을 겁니다. 보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민들도 알아야죠. 그러나 조금이라도 트릭이 들어갔다면, 용서 못합니다. 저는 기잡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전에 자그마한 방송사였을 때나, 지금 미국 3대 방송사가 되었을 때나 변함없는 그 소신, 저는 버트와 CMM 기자들을 존경합니다. 하하하.”
“정말이길 바랍니다. 보스, 그렇다면 이건 또 하나의 특종이 될 테니까요. 생활이 팍팍한 국민들에게 가슴 먹먹한 소식이 될 겁니다.”
됐다. 이제 물러섬 없이 싸워 줄 선거전의 전사들을 모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반격의 순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