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04화 (104/150)

104화 팀원 구하기

퍼피 홀던은 사고뭉치였다, 적어도 조직 입장에서는.

겨우 초급 공무원 주제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며칠에 걸쳐 하나씩 정책 제안서를 올리는 퍼피. 그 제안서는 한결같이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저, 이번에 오, 오, 올린 제안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위에 보고했네. 마찬가지로 회신이 안 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하, 하, 한 번도 회신이 없었는데.”

“아, 거 말 좀 더듬지 말고 천천히 제대로 해 봐. 답답해서, 원.”

“…….”

저 새끼, 보나마나 위로 올리지 않았을 거다. 퍼피는 절망했다.

말더듬이에 160이 될까 말까 싶은 단구, 100kg에 육박하는 뚱땡이, 거기다 흑인이다. 최악의 조건은 골고루 갖춘 셈이다.

그래도 퍼피는 최고의 수재였다. 노스캐롤라이나 더럼의 듀크대학교 정치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직원만 4만 명에, 1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사립 명문 대학이다.

그런들… 아무리 빛나는 지성을 가지고 있어 봐야 갈 곳이 없었다. 아니, 받아 주는 곳이 없었다. 공대 출신 연구직이라면 모를까, 누가?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요즘 뜨고 있는 컴공과를 갔어야 했어. 평생 꿈이 정치였다. 말은 더듬지만, 정책을 만들고 기획하는 건 자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시궁창이다. 빛나는 듀크대학교 졸업장으로 겨우 찾은 직장은 중앙 정부도 아니고, 주 정부도 아닌, 더럼 지방 정부의 말단 주민센터. 여기서 아무리 기똥찬 정책 제안서를 올려 봐야 중간에 다 커트 당하는 신세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틈나는 대로 제안서를 들고 워싱턴을 찾았다. 의원실을 기웃거리며 슬쩍슬쩍 디밀었지만, 차가운 냉대와 비웃음만 돌아왔다. 의원실 보좌관들에게 말까지 더듬는 퍼피의 생김새는 혐오, 그 자체였던 것이다.

너 같은 주제에 무슨 정책 제안을… 유권자라 뿌리치지는 않지만 냉소에 가득 찬 그들의 얼굴, 퍼피는 점점 지쳐 갔다.

그나마 이곳 직장이 좋은 점은 비싼 컴퓨터가 있다는 것. 전기세 걱정없이 고사양 컴퓨터를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퍼피는 요즘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이라는 세상. 여기서는 아무도 퍼피를 향해 말더듬이라고 비웃지 않았다. 뚱땡이라고 놀리지도 않았고, 짜리몽땅한 흑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맞는 사람끼리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도 했었고, 간혹 자신이 올린 정책 제안서를 보며 호응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열렬한 팬도, 한 명이지만 생겼다.

퍼피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벌써 10시. 이 시간 이후에는 건물을 관리하는 경비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전체 소등을 실시한다. 있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숙소에 가 봐야 먹을 것이 없다. 마트를 가 본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할 수 없다. 24시간 열린 곳은 오직 편의점뿐. 터덜터덜 걸어 편의점에 도착한 퍼피.

“퇴근이 늦으십니다.”

“…….”

“그 도넛 맛있어요? 내가 보기엔 딱딱하게 굳었는데?”

“…….”

“커피도 싸구려 원두를 썼고 로스팅이 잘못됐는지 쓰기만 해요, 그렇죠?”

입을 열면 더듬는 말 때문에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 생각한 퍼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답하기도 귀찮고.

“미스터 퍼피, 제가 제대로 된 근사한 저녁을 사고 싶은데… 어때요?”

“……!”

“예, 맞아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저도 아직 저녁을 못 먹었어요, 당신 덕분에.”

“나, 도, 돈 없어요. 그렇다고 대, 대, 대출 같은 거 받을 생각도 없고.”

“스튜피드 피플(Stupid People)에서 쓰는 별칭이 골든 마이다스, 기억나지 않아요?”

“다, 당, 당신?”

“네, 접니다. 당신의 팬, 골든 마이다스. 진짜 이름은 마이다스 킴이라고 하죠. 어때요, 제 식사 초대?”

그렇게 엉겁결에 편의점에서 끌려간 퍼피는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미친! 여길 왜?”

“여기 와 봤어요?”

“다, 당, 당연히. 평생 여기서 살았는데, DPAC(더럼 아트 센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냥 들어가요. 여기에 멋진 저녁을 준비해 놨거든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넉넉히 줬으니까 이해할 겁니다.”

“여, 여, 여기서? 저녁을? 당신 진짜 미쳤군요. 여긴 공연장이라고.”

“맞아요, 공연장. 제가 하루 빌렸죠, 멋진 오케스트라도.”

“……!”

퍼피는 아이디 골든 마이다스, 실명을 마이다스 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을 익히 안다. 인터넷 모임인 스튜피드 피플(멍청한 사람들)에서 곧잘 자신의 정책 제안에 대해 답글을 달던 사람이었다. 대충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같이 고민하고 더 발전된 의견을 제시하던 유일한 팬.

그런 이가 찾아와 밥을 한 끼 사겠다며 데려온 곳이… 더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더럼 뮤지엄 아트 센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식탁 주위로 오케스트라가 은은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실제 지휘자까지 있는 오케스트라가.

한쪽에서는 온갖 주방 도구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쉐프들이 요리를 하고, 각 입구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오직 무대 한가운데 놓인 하나의 식탁. 눈보다 더 흰 식탁보에 단 두 개뿐인 의자로 안내된 퍼피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호, 호, 혹시 마피아세요?”

“흐흐흐. 야무지게 먹어 둬. 이게 퍼피, 당신이 당분간 즐길 수 있는 최후의 만찬일 테니까.”

“…저, 저, 진짜 돈 없거든요. 그리고 무슨 국가 기밀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니, 그동안 당신이 올린 정책 제안서… 그거 다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이야. 할 수 없어, 당신 입을 막는 수밖에. 어서 먹어!”

“으, 흐, 흥… 나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그 제안서 다 내가 만든 거라고요. 기밀 훔친 거 아닌데…….”

“그러니까 더 위험한 거야. 당신 같은 존재들은 그 자체가 흉기야. 알아?”

“…그냥 살려 주면 안 되나요? 앞으로 절대 제안서 같은 거 안 만들게요. 약속합니다.”

“어? 지금은 안 더듬네? 고칠 수 있겠는데?”

“…….”

시혁은 유쾌했다.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미국 땅에서 유일하게 시혁이 인정한 찐 천재. 숱한 이공계 천재들은 만나봤건만 정책 분야에서는 퍼피만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간간이 올리는 제안서는 시혁조차 무릎을 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이봐요, 퍼피. 내 장난이 좀 심했어요. 나는 마피아도 아니고, 비밀스런 CIA도 아닙니다. 그저 정부 일을 돕는 한국인에 불과해요.”

“……?”

“나는 당신의 천재성을 압니다. 그래서 스카우트를 제안하러 왔어요. 당신을 사고 싶습니다, 퍼피.”

“딸꾹, 딸꾹!”

* * *

러셀 홀스타인은 천생 기자다.

NBC 방송국의 임원까지 올라갔지만, 사장을 들이받고 사표를 던졌다. 현장에서 몇 달에 걸쳐 취재한 기자의 폭로 기사를 깔아뭉개는 사장에게 분노한 것이다. 이렇게 광고주 눈치를 보려면 왜 언론사를 하나? 이건 저널리즘이 아니라 광고를 파는 장사꾼에 불과한 거다.

그리곤 받아 주는 곳이 없었다. 이미 블랙리스트에 찍혀 어떤 언론사도 그에게 콜사인을 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쾌히 불러 준 곳이 바로 CMM.

24시간 뉴스와 심층 보도만 전문적으로 하는 방송사. 그러나 탄생한 지 9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버벅거리고 있는 가난한 언론사였다. 연봉도 NBC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었지만 입사하면서 러셀이 요구한 것은 딱 하나였다.

죽을 때까지 현장 기자로 있도록 해 달라.

그 뒤 처음 타깃으로 삼았던 취재거리가 유령처럼 모습을 감춰 버린 의문의 인물,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을 당선시킨 세기의 천재, 거기다 죽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의 현 주석이 조언을 구한다는 지략가.

공식적으로는 부시 대통령의 정책 특별 보좌관, 차관급 예우를 받고 있지만 절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마이다스 킴을 만나기 위해 한국까지 갔었다.

웬걸?

한국에서 제일 큰 영향을 끼친다는 자산일보의 편집국장도 손사레를 쳐?

그때 접근한 CIA 한국 지부장을 통해 ‘오프더레코드’ 조건으로 인터뷰를 성공시켰다. 성공한 취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마이다스 킴의 역제안으로 인해 CMM은 대박이 나 버렸다. 마이다스 킴에게 경영권을 넘기면서 막대한 자본도 수혈받았고, 무엇보다 그의 신기 어린 예측대로 걸프전이 터진 것이다.

이를 철저히 준비한 CMM은 전 세계 시청자 10억 명에게 생생한 전쟁의 참상을 생중계할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 3대 방송국 위치를 공고히 다지는 중이다. 모든 방송사가 실시간 생방송을 카피해서 따라하고 있지만, 이미 시청자들 기억에 뉴스하면 CMM이라 박혀 버렸다.

그랬던 보스 마이다스 킴이 버트 사장을 찾아와 던졌다는 화두.

몇 가지 퍼즐만 던졌을 뿐 구체적인 자료나 스토리는 주지 않았다 한다. 편견없이 취재해서 알아내라는 뜻이라나?

마이다스 킴다운 행동이라고 이해했다. 지금껏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 뒤, 보스는 한 번도 경영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기사에 대해 이런저런 요구를 한 적도 없었다.

CMM이 앞장서서 테일후크 스캔들을 도배했을 때도 전화 한 통 없었다. 킴과 부시가 피보다 진한 혈맹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침묵했었다.

그랬던 보스가…….

이건 정말 철저히 파야 한다. 그게 보스의 진심에 화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무조건 팩트만 캐겠다고 다짐하고 팀을 풀가동했다.

“보고해.”

[러셀… 이거 조금 심각합니다.]

“짧게, 팩트만.”

[그게, 제가 감성적인 성격이라 말로 하기 힘들어요.]

“기다려, 삼십 분이면 도착한다.”

킴이 던진 조각 단서를 가지고 샅샅이 훑었다. SS 요원들의 신상은 2급 비밀이다. 대통령과 그 일가족을 지키는 비밀 경호국 요원들 신상이 공개되면 어떤 역공작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일 부딪치는 백악관 출입 기자를 통해 거의 파악했다. 절대 외부에 공개를 안 한다는 조건으로.

그 요원들 하나하나, 가족들 하나하나를 일일이 구분했다. 그중에 어린 아이가 있는 요원을 따로 추렸다. 아직 남아인지 여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일이 학교를 방문해 아이가 건강한지 확인했다.

그렇게 하나씩 지워 나가다가 최종적으로 남는 세 아이. 그 세 아이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을 또 찾아냈다. 그 병원에 고참 기자를 한 명씩 보내 확인하다가 방금 전화를 받은 것이다.

잘하면 보스의 말이 사실일 수 있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자에게 특종은 대부분 더러운 사연이다. 전쟁이나 대기업의 나쁜 짓… 예컨데 세금 탈루, 횡령, 환경 파괴, 군의 비리, 정치인의 배신 같은 것들일 수밖에 없다.

매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경우도 90%가 그런 내용이었다. 미담이나 의인의 이야기는 잠시 반짝할지 몰라도 세간의 주목을 오래 받지 못한다. 금방 잊혀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본인 입에서 커밍아웃 한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기자가 취재로서 확인한 것이라면…….

핵폭탄이 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니까. 그도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러셀의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따라 더럽게 트래픽이 심하다. 할 수 없이 100달러 지폐를 꺼냈다.

“러셀!”

“조용, 아직 신분 안 깠지?”

“예, 운이 좋았어요. 제 여동생 친구가 여기 수간호사로 근무 중입니다.”

“상황은?”

“정식으로 취재 요청을 한 것도 아니고, 슬쩍 지나가는 말로 물어봤을 뿐입니다.”

“뜸 그만 들여, 네 공은 인정할 테니. 지금 중요한 건 팩트야, 팩트!”

“거의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새끼, 그게 기자가 할 소리냐? 거의라고? 아니면 어떡할 건데?”

“에이… 씨, 맞다니까요.”

“애 아버지, 곧 퇴근할 시간이지? 그럼 여기로 바로 오겠네.”

“그렇답니다. 매일 퇴근하면 병실 간이 침상에서 애랑 같이 잔답니다.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요.”

러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바로 핸드폰을 눌렀다.

“버트, 99%는 확인되었어. 이제부터 정식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방송 송출 차량 보내고, 모성을 자극할 수 있도록 가장 엄마스럽게 생긴 아나운서, 한 명 보내 줘.”

지금부터 실전이다. 러셀의 심장이 미친듯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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