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악몽의 등장
불붙은 장작에 기름이 쏟아졌다.
뉴욕포스트 신문사는 모든 업무를 중단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육두문자는 예사였고, 폭탄을 던지겠다는 협박도 애교 수준이었다. 멕클레인 기자는 출근조차 할 수 없었다. 급히 가족들을 데리고 숨었다. 진짜 총맞아 뒈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전미 백혈병 환우 협회와 뉴욕 어머니회에서는 아예 신문사 앞을 가로 막았다. 건물에서 한 명이라도 나오면 예외 없이 계란과 페인트가 날아들었다.
사전에 신고된 집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공권력 집행을 칼처럼 하는 미국 경찰이 즉각 시위대를 해산시켜야 정상 아닌가? 팔짱만 끼고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NYPD(뉴욕 경찰).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다. 신고가 접수되었으니 출동은 했지만, 오히려 시위대를 위해 교통정리나 하고 있다. 차량들이 연신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창문을 내리고 주먹 감자를 먹이는 사람 일색이다.
단 하루 사이에 뉴욕포스트는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1801년 설립된 역사 깊은 신문사였건만, 루퍼트 마독에게 인수된 뒤 완벽한 타블로이드 황색 언론으로 색깔을 바꾸더니, 거의 찌라시 수준으로 전락한 대표적 보수 우파 신문사. 정론지 뉴욕 타임스와 질적으로 다른 곳이다.
루퍼트 마독은 부시 가문과 오래 관계를 가져온 동지였건만 한 기레기의 섣부른 질문 하나로 인해서 공들인 신문사가 나락으로 처박혔다.
독자들은 뉴욕포스트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내용증명으로 구독 취소를 통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른 언론사들은 또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시작했다.
-웨인 요원의 징계를 주장한 뉴욕포스트, 거센 독자 저항에 직면.
-백혈병 아들 간병 차 간이 침상에서 1년째 쪽잠 자는 아버지, 징계하라는 냉혈한 뉴욕포스트.
-법이나 규정보다 인간애를 강조한 부시 대통령, 뉴욕포스트에 일갈.
-대중들의 직접 항의에 부딪친 뉴욕포스트, 하루 만에 구독 취소 60% 폭주.
그리고 부시를 향한 언론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당신은 아이를 잃어 본 적이 있느냐? 오래전 골수 기증 서약한 부시 일가.
-대통령의 휴머니즘, 그의 끝없는 인간애, 진정한 사랑을 보여 준 부시.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저토록 인간적인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의 진심에 숙연해진다.
-테일후크 스캔들로 대통령 비난하던 민주당원들조차 한 목소리로 대통령 칭송.
-예일대를 휴학하고 직접 전투기를 몰았던 대통령과 테일후크 성폭행범을 동일시하는 건 억지라는 비난 폭증.
-더 이상 인간적일 수 없는 대통령, 백악관 담장은 장미(미국 국화) 다발 헌화하는 인파로 북새통.
-위대한 대통령의 우아한 위로, 나는 할 수 있는가?
-전국에서 삭발하는 사람들 넘쳐, 대통령 따라하기. 웨인, 힘내라!
거의 우상화하는 분위기다. 이때 부시를 비난이라도 했다간 바로 총맞을 것이다.
-전국이 눈물바다, 수많은 국민 백혈병 조혈 모세포 기증자로 나서.
-전국 병원들, 일제히 웨인 요원 아들에게 맞는 조혈 모세포 검색 중. 조만간 치료 가능할지도.
“자네, 이걸 노리고 기자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말라고 한 건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효과를 거둬 야죠. 그렇다고 프레지던트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알고 있네, 좋은 뜻이었다는 거. 하여튼 서로 다 잘되었으니 됐어.”
“쇼맨십은 탤런트만 하는 게 아닙니다. 프레지던트는 평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전략과 기획이 버무려져야 국민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습니다. 단 하루 만에 테일후크 스캔들로 까먹은 지지율을 회복했습니다.”
“으음… 인정! 역시 자네는 세기의 전략가야. 덕분에 살았네. 단순히 웨인 요원을 위로하려고 깎은 머리 하나를 활용해 판세를 뒤집다니… 대단해.”
“거짓과 위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통한 겁니다. 이건 전적으로 프레지던트가 만든 승리입니다. 저는 팩트를 조금 더 아름답게 포장한 것에 불과한 거고요.”
“아냐, 누가 이처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 이틀 떠들다 묻힐 미담을 전 국민이 감동하도록 만들었으니… 이건 실력이야.”
“여기서 더 불을 붙여야 합니다. 장작이 타서 재가 되길 기다리면 안 됩니다. 숯불처럼 은은하게 오래 타도록 만들어야 고지를 밟을 수 있어요.”
“공식 선거 캠프를 차렸다고?”
“예, 지금까지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별동대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선관위에 정식 선거 조직으로 등록도 마쳤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보고받기로는, 거기 정책 책임자가…….”
“하하하. 프레지던트, 제가 로스캐롤라이나 더럼까지 전용기를 띄워 스카우트한 최고의 인재고 천재입니다. 나중에라도 곁에 두시면 프레지던트의 든든한 꾀주머니 역할을 할 친굽니다. 정말 최고죠.”
“그래?”
“네, 말을 더듬는 것도 많이 고쳤습니다. 키도 작고, 뚱뜽하고, 흑인입니다. 그러나 백악관의 전략가 모두를 찜 쪄 먹을 찬란한 지성의 소유자입니다. 저는 그를 ‘자이언트 퍼피’라고 부릅니다.”
“호오! 자네가 그토록 극찬하는 인재라… 보석을 주웠구먼. 잘해 주게나.”
“네. 최고의 대우와 환경을 만들어 줬습니다. 행복해 죽을 지경이랍니다.”
* * *
“아… 미치겠네. 여기서 더 깊이 짜내라고? 어떻게? 사람이 만족을 안 해요. 진짜 돌겠다.”
“퍼피 팀장, 빨리 내려 주세요. 그래야 저희도 좀 쉬죠.”
“날 죽여, 더 이상은 못 해.”
“호호호, 그럴까요? 2번 전화 받으세요.”
“…설마?”
“아마 맞을걸요?”
“로라, 나 몰래 CCTV 설치한 건 아니지?”
“보스라면 몰래 카메라를 달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빨리 받아요, 박살 나기 전에.”
잔뜩 인상을 쓰던 퍼피는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뭐야? 핸드폰은 왜 꺼놨어?]
“…저 일할 때, 집중이 깨질까 봐 원래 끕니다만.”
[시끄러. 또 끄면, 뒈진다.]
“…예.”
[이번 사태로 바뀐 여론 지형, 각 주별 방송 노출 통계, 언론 반응, 지지율 상승 추이 분석, 어떻게 됐어?]
“……!”
[안 들려?]
“보스… 저 노스캐롤라이나 집에 가고 싶어요.”
[응, 안 돼. 자꾸 까먹는데, 노예 계약 기억 안 나?]
“…….”
[마음껏 일하고 싶다며? 일하다 죽어도 상관없다며? 그래서 계약서에 사인한 거 아냐?]
“…….”
[퍼피, 워싱턴에서 전용기를 타고 그 시골까지 가서 통째로 공연장을 임대하고, 오케스트라랑 힐튼 호텔 수석 쉐프에… 보자 보자, 돈이 얼마가 들었는지 계산이 안 되네. 이 비용의 천 배를 배상하기로 했으니까…….]
“씨…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저 오늘 하루만 숙소에 가서 푹 자고 오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지금부터 죽어라 제안서, 보고서 써. 내가 세 시간 있다가 다시 전화할 거야, 퍼피.]
진짜 잘못 걸렸다. 저런 악덕 상관인 줄 알았으면 절대 사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전 악질이다.
코피가 터져 흘렀지만 대충 휴지를 뭉쳐 막고 모니터에 머릴 처박는 퍼피. 한두 번 나와야 놀라지.
그런 퍼피를 야간 지원조로 채용된 비서 로라가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노예 상인에게 붙잡힌 퍼피 팀장… 불쌍해.
전화를 끊은 시혁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윌슨, 산드라,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보다 퍼피의 업무가 너무 과중한 거 아녜요?”
“응, 안 죽어.”
“또 여실히 발동한 악마 기질.”
“산드라, 아직 모르는구나. 낙타는 말이야. 사막을 횡단하기 위해 혹에다 지방을 축척해 두거든. 그래서 물이 없어도 버티는 거야.”
“갑자기 웬 낙타?”
“퍼피도 그래. 100kg이나 나가는 지방, 이번에 다 없애 줄 거야. 흐흐흐.”
“악마!”
“산드라, 사람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뭔지 알아? 그건 인정받는 거야. 그게 바로 목마름이지. 퍼피가 힘든 것 같아도 속에 묵혀 두었던 지성을 맘껏 발휘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할 거야.”
“…….”
“나는 그 덕분에 쏙쏙 뽑아 먹으면 되는 거고.”
“헷갈려요. 어떤 말은 현자 같고, 어떤 말은 벨제붑 같고.”
“산드라도 퍼피 사무실로 보내 줄까?”
그 말끝에 윌슨이 발끈해서 나섰다.
“우리 산드라를 그 지옥으로 보내면 결투를 신청할 겁니다, 보스.”
“근육돼지 씨, 당신이 뭔 상관있다고 결투를?”
“…나는 산드라의 수호천사니까.”
“세상 어떤 수호천사가 근육으로 똘똘 뭉쳐 있다고? 흥이다.”
“그래도 저는 산드라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해요. 헤헤헤.”
나쁘지 않다. 이 정도 팀워크면 못 이룰 것이 없다.
그러나.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세상사가 그렇다.
마침 들어오는 공사홍. 언제 장난을 쳤냐는 듯 테이블로 모여 들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뢰는 밟으면 무조건 터진다. 제일 좋은 예방법은 설치하기 전에 미리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늦었다. 이미 지뢰는 설치되고 말았다.
공사홍이 말없이 리모컨을 누르자 TV 쇼 화면이 나왔다.
제기랄!
* * *
시혁은 최대한 라인을 가동해 로스 페로의 정보를 입수했다. CIA와 FBI 파일만 뒤져도 산더미 같은 내용이 나왔다.
우선 부자, 겨우 천 달러로 창업한 IT 회사를 20년 후 GM에 넘기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 수완가다. 사업적으로 흠결을 찾을 수 없는 비즈니스맨.
부시와 비슷한 텍사스 남자. 또 해군 장교로 7년을 근무하다가 대위로 예편했다. 역시 비슷하다.
그 억만장자가 며칠 전 유명 TV 쇼 래리 킹 라이브 출연 중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무소속으로.
공화당은 호떡 집에 불이 나 버렸고 민주당은 이겼다며 만세를 부르는 상황이다. 눈 뜬 봉사가 등장한 것이다. 민주당의 수호천사 로스 페로.
선거란 것이 그렇다. 한 발만 떨어져서 보면 무조건 낙선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군중들의 환호성에 취하고 열성 지지자들의 성원에 맛탱이가 가 버린다. 소위 선거 뽕이다.
자신만은 기적을 일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공화당의 악몽, 로스 페로.
로스 페로는 부시처럼 돈도 많고, 같은 해군 장교로 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며, 무엇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면서 호메이니가 신권 통치를 시작할 때, 이란의 미국 대사관이 과격 학생 시위대에 점거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서 미국인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은 대사관 인질에 신경 쓰느라 일반 미국인에게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소홀했다. 그때 로스 페로의 회사 직원 2명도 이란에 잡혀 있었다.
미국은 특수부대를 투입했으나(독수리 발톱 작전) 항공기 충돌 사고로 애꿎은 수송기 승무원 8명의 목숨만 잃고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로스 페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직 CIA 블랙요원, 전직 그린베레 대원들을 자신이 막대한 비용으로 고용해, 결국 회사 직원 2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호메이니와 뒷거래를 통해 대사관 인질들도 석방되기는 했지만, 장장 1년이 걸린 것과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개망신이다. 국가는 실패했는데 일개 기업의 사주는 성공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직원들을 구출해 낸 로스 페로는 단숨에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 뒤 로스 페로는 노골적으로 현 정권을 비판하고 정치적 야심을 숨기지 않는 행보를 보이며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가 출마한다면, 같은 보수 성향 유권자를 가진 공화당은 진정 악몽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드디어 공식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고 말았다.
‘그래. 네가 문제다, 로스 페로.’
[킴, 방송 봤나?]
“네, 프레지던트.”
[가장 걱정하던 문제가 터졌군.]
“예상은 했지만, 아프군요.”
[그래서 자네가 로스 페로를 그토록 무참히 공격했었어. 이제 이해를 하겠네.]
“그런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실패하고 말았는걸요.”
[아냐, 나는 설마 로스 페로가 나올 것이라 예상조차 못했네. 자네가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도 했었으니까. 무소속이라니… 바보 같은 놈.]
“그게 선거입니다. 그게 또 선거 뽕 맞은 사람의 욕망이 분출된 거고요.”
[…자네, 모든 작전이 실패했으면서 의외로 덤덤한데?]
“네. 다시 찾아야죠, 그의 아킬레스 건을.”
‘그래, 로스 페로… 당신이 진짜 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