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지뢰 제거하기
시혁은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부시가 낙선한다는 것을.
부시가 37.5%를 득표하고, 클린턴이 43%를 득표한다. 그리고 로스 페로가 18%를 가져간다. 역사상 무소속이 거둔 최고 득표율이다.
다만, 로스 페로에게 표를 몰아준 건 모두 공화당원, 민주당원이 그에게 투표할 이유가 없다. 결국 공화당 표를 잠식했다. 로스 페로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백 퍼센트 부시의 승리였을 것이다.
겨우 삭발 건으로 부시의 지지율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판에, 강력한 지뢰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조차 부시의 삭발 미담이 폭발하면서 코를 빠트리고 있다가 로스 페로의 등장에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제발, 제발, 나와서 똥질해 줘. 네가 똥볼만 차면 내가 이겨……. 빌고 빌던 와중에… 나왔다, 만세!
결국 이 다크호스에게 빼앗긴 표 때문에 부시는 낙선한다.
시혁은 선거 본부를 만들기 전부터 공사홍과 박하송을 내세워 로스 페로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전방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가 하는 투자마다 간섭해서 재를 뿌렸고, 하다못해 그가 진행하는 프랜차이즈 사업, 텍사스식 레스토랑 옆에 더 큰 식당들을 열어 반값 할인 행사로 쑥대밭을 만들었다. 엄청난 자금이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치졸하지만 도저히 개인적인 약점을 찾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동원한 방법, 그래도 출마를 막지 못했다. 김양삼이 차용한 말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와 똑같이 되어 버렸다.
원래는 아랍 지역 속담인 ‘개가 짖어도 마차는 간다(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goes on)’가 원문인데, 이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클라크 게이블이 여자 주인공 비비안리에게 이 대사를 하는 바람에 유명해졌고, 정치인들이 종종 가져다 쓰는 말이다.
주변의 눈치 보지 않고 꿋꿋이 소신대로 전진하겠다는 뜻이다.
하하하. 그렇게 되어 버렸다. 죽도록 두드려 패서 거의 빈사 상태로 만들었건만… 그래도 출마를 해? 결과적으로 똥볼과 똥질은 내가 한 꼴이다. 참 쉽지 않네.
어쩌면, 회귀한 이래 겪는 첫 실패인지도 모른다.
“시혁아, 만만치 않다.”
“네, 삼촌. 강적입니다.”
“내가 살면서 겪은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니?”
“……?”
“센 놈도 아니고, 돈 많은 놈도 아니고, 고관도 아니다. 정작 무서운 존재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 이런 인간은 치킨 게임이 통하지 않는 법이야.”
“네.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질타하신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방법이 너답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다시 길을 찾을 거야. 시혁이니까.”
“그럼요. 하하하.”
공사홍도, 박하송도, 산드라와 윌슨도 마주 보고 웃었다. 저래서 우리 보스가 너무 좋아. 쿨 하거든.
“산드라!”
“예, 보스. 말씀하세요.”
“로스 페로의 중점 공약이 뭐죠?”
“균형 재정, 총기 규제 반대, 보호 무역. 세 가지예요.”
“철저히 분석하세요. 퍼피와 같이 약점을 찾으십시요.”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이 업무만큼은 퍼피의 지시를 받을 게요.”
“역시, 산드라. 좋습니다.”
다음은.
“삼촌, 하송이와 같이 로스 페로의 사업을 공격하던 것은 모두 중단하세요. 삼촌 말씀대로 치졸했습니다. 그는 신념에 차 있는 사람. 모든 재산을 다 잃어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헛짓이라고 판단했으니 과감히 손을 떼겠습니다.”
“알았어, 그러나 면밀히 살피도록 하겠다. 페로 시스템즈의 경영권을 위협할 정도까지 매입한 지분은 가지고 있는 게 좋겠다.”
“네, 삼촌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써야 할 카드.
“윌슨!”
“넵, 보스. 무슨 명령이라도.”
“응, 1980년 당시, 이란 미 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 알지?”
“당연하죠. 제 선배 델타포스가 투입된 첫 실전 작전이었으니까요.”
“그 선배들을 만나서 자세히 들어 봐. 왜 실패했는지를… 그리고 로스 페로가 자사 직원 2명을 구출하기 위해 고용한 전직 CIA 블랙 요원들, 전직 그린베레 요원들도 찾으세요. 그들을 지휘한 사람에게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들어 보세요.”
“문제없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지금은 보성 김이 보스 옆에 있으니까 자리를 비워도 안심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어떤 일이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그 문제는 발목을 조이는 덫이 된다. 이 덫을 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못 찾으면… 부시는 무조건 진다.
실타래가 엉켜 있을 때 푸는 방법.
한 올씩 정성 들여 꼬인 부분을 푼다. 또는 단칼에 잘라 버린다. 둘 중 하나밖에 없다.
그전에 한번 보자, 실타래를 꼬아 버린 로스 페로를.
* * *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분을 이렇게 보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로스 페로 회장님.”
“무슨 일이실까? 우리가 만날 이유, 별로 없어 보이는데?”
듣던 대로 직진이다. 이런 사람에게 술수는 통하지 않는다. 같이 해 줘야 한다, 발가벗고.
“사과드립니다. 제가 급한 마음에 많은 실수를 했어요. 방법도 거칠었고, 비겁했습니다.”
“……!”
“구차한 변명 따위 통하지 않을 분이란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지난 실수를 사과하는 겁니다. 진심입니다.”
“당신… 별종이군요. 내가 알고 있는 마이다스 킴은 상당히 악마화 되어 있었거든요. 이렇게 훅하고 들어올 줄 예상 못했습니다. 진솔한 사과는 뿌리칠 수 없죠. 쾌히 받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로스 페로 회장님.”
“자! 사과를 받았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는 서로 싸워야 할 상대, 왜 오셨죠?”
변함없는 직진.
“물론, 제일 베스트는 로스 페로 회장님을 단념시키는 것이죠.”
“하하하. 그건 아예 생각지도 마시고… 워스트는?”
“같이 망하는 거죠.”
“……!”
돌직구… 당신만 가지고 있는 건 아냐.
“뻔한, 너무 통속적인 이야깁니다만, 회장님과 프레지던트는 닮은 꼴입니다. 거의 쌍둥이죠. 두 분 다 부자에, 명예롭게 군 복무를 하셨고, 텍사스라는 출신지와 유권자도 보수 우파… 이대로 가면 둘 다 죽습니다.”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부시가 포기하는 건 어떻소? 시원하게!”
“현직 대통령입니다. 농담이라도 뱉을 말은 아닙니다만.”
조금씩 일그러지는 로스 페로. 거꾸로 시혁의 반발에 평정심을 잃고 있다. 시혁이 바라는 바다. 돌직구 던지기는 오히려 시혁의 장기다. 마음만 먹으면 더 잘할 수 있다.
“싸우러 온 거요?”
“아닙니다, 회장님. 설득하러 왔습니다.”
“말투는 싸우는 건데, 내용은 설득이다?”
“지혜를 이해하는 데도 지혜가 필요한 법입니다.”
“내가 바보란 말로 들리오만…….”
“팩트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은 절대 대통령이 못 됩니다. 지금은 열혈 지지자의 함성에 눈이 멀어 있고, 조금만 더 하면 기적을 일굴 수 있다고 믿겠지만… 허상입니다. 이걸 한국말로 미망(迷妄)이라고 하죠.”
“이익!”
“회장님 손에서 보수의 대궤멸이 시작됩니다. 회장님 때문에 공화당은 몰락하고 민주당에게 정권이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악몽이죠. 회장님이 평생 추구해 온 보수의 가치를 회장님이 망가뜨리는 겁니다. 확신합니다.”
“이봐요! 마이다스 킴! 특보라고 불러야 하는지, 선거 대책 본부장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완주해서 정권을 가져올 거요. 다음 대통령은 내가 됩니다.”
압니다. 당신은 물러서지 않아요. 그래서 더 문제라는 것이고요.
이제 무기를 꺼낼 시간이다. 날이 시퍼렇게 갈린 무기를.
“회장님,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일어나겠습니다.”
“뭘 두 개씩이나… 하시구려.”
“대법관은 항상 균형을 이뤄 왔습니다. 미국의 대법관은 본인이 사망하기 전이나 스스로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직이죠.”
“갑자기 웬 대법관?”
“설사, 병에 걸려 오늘내일 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사임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야… 서로의 진영을 보호하기 위함 아니오? 한번 임명되면 다시 바꿀 수 없는데, 자신이 사임할 경우 다수결에서 밀리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정이지만, 병석에 누워 있는 마이클 허큐리 대법관이 사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부시가 새로운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하겠죠.”
“그렇습니다. 수순입니다. 지명권은 현직 대통령에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이오?”
시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스 페로에게 차갑게 말을 던졌다.
“상원의 동의가 없으면?”
“……!”
“다음 대 대통령에 클린턴이 선출되기를 기다려서 인준을 거부하고 계속 계류시키면? 가부 투표는 고사하고 청문회 일정조차 안 잡고 몽니를 부리면?”
이건 다른 문제다. 로스 페로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미국의 대법관은 희한하게 종신직이다. 30년째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대법관이 있을 정도다.
미국 사법기관을 총괄하는 대법관. 대법원장과 8명의 대법관이 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 어마무시한 권한을 가진 곳이다.
지금껏 묘하게 4 대 6 혹은 6 대 4로 보수와 진보의 대법관이 균형을 맞춰 왔었다. 그래서 정권 교체기에 들어서면 버틴다. 절대 사임하지 않는다. 산소 호흡기를 낀 채 숨만 붙어 있으면 물러나지 않는다.
자기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신념은 이리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마이클 허큐리 대법관이 죽기라도 한다는 말이오?”
“예, 올해 10월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침묵에 잠긴 로스 페로. 생각이 많아졌다. 이놈의 예측이 맞는다면… 혹시라도 민주당의 클린턴이 당선되어서 부시가 후임으로 임명한 새로운 대법관을 취소하고 민주당 입맛에 맞는 대법관을 지명한다면… 공화당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대통령은 4년에 한 번씩 바뀌지만 대법관은 평생 그 자리에서 미국의 사법권을 총괄한다.
“두 번째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두 번째도 마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시오.”
“한 분이 더 있습니다, 퇴임하는 대법관.”
“……!”
“드문 일이긴 한데… 두 분의 대법관이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은 민주당이군요. 아주 골수 진보 계열입니다.”
“언빌리버블! 나도 꽤나 소식통들이 많아요. 지금 킴의 말을 믿을 수 없소.”
“후훗,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마이클 허큐리 대법관의 경우 병원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면 되실 터이고, 진보 계열 대법관 중 한 분이 9월 첫째 주에 퇴임하는지 안 하는지는 결과를 보고 말하십시오.”
“말도 안 돼. 지금 시점에 누가 스스로 사임을…….”
“9월 첫째 주말에 다시 만날 때, 확인시켜 드리죠.”
“으음.”
“프레지던트나 회장님이 당선된다면 보수 공화당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
“반대로 두 분이 다 낙선하고 클린턴 후보가 당선된다면, 두 분이 보수를 말아 드신다는 것, 재기조차 힘들 정도로 망가질 겁니다. 완전 폭망이죠.”
말이 없던 로스 페로. 숙고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눈에서 불이 나는 듯 번쩍였다.
“돌아가시오. 그대의 충정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내 앞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나는 클린턴과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 선서를 하게 될 거요.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돼요. 그렇지 않소?”
요지부동. 지금껏 벽 보고 이야기한 꼴이다. 이 사내는 멈추지 않는다. 이미 폭주 기관차가 되어 버렸다. 오직 대통령의 권좌만 머리속에 가득하다.
자동차가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줄 아나? 천만에, 멈추기 위해 있는 거야. 서야 할 곳에 제때 서지 못하면 그건 자동차가 아니라… 흉기에 불과한 것이지.
지금껏 당신을 존경했던 내가 잘못되었다. 직접 만나 보길 잘했어. 당신은 추악한 탐욕의 화신에 불과하다.
* * *
[보스, 찾았습니다.]
“어디로 가면 돼?”
[오시렵니까?]
“응, 어디든.”
[여긴 정말 지옥이거든요.]
“간다. 거기가 지옥이라면 나도 악마로 변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