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11화 (111/150)

111화 지옥으로의 초대

“말도 안 나오는군.”

“칼리프.”

“한 명도 생존하지 못했단 말인가?”

“…네, 소말리아 정부군 장군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전원 확인 사살 흔적까지 있었다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이냐? 어떻게 백 명의 추리고 추린 정예들이?”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

“칼리프, 백 명입니다. 알라의 요술봉도 5개나 가지고 갔습니다. 거기다 모가디슈까지 바로 직진했습니다. 반군 지역을 통과할 때도 목적지를 말한 적 없고, 모가디슈의 정부군에게도 호텔 위치를 알린 적 없습니다. 그럼에도 먼저 함정을 파 놓고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정보가 샜다?”

“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보고를 받는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여기 차다르(본부)에 있는 사람들 모두 알라께 맹세한 사람일세. 누가 정보를 유출한다는 말인가?”

“칼리프, 본의 아니게 여러 국가에서 모인 이들이 있습니다. 비록 같은 무슬림, 같은 수니파라고 해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금의 알 카에다는 원래 뿌리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무자헤딘에서 출발한 조직이었다. 미국과 사우디가 자금을 지원하고, 파키스탄이 이들을 훈련시킨 후 중국제 무기로 무장시킨 것이다. 당연히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이 섞인 짬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입조심하게. 아무리 국가가 달라도 우리는 같은 알라를 모시는 종들이야. 소련과 싸우고, 다시 공산당 아프간 정부 놈들에게 피를 흘렸던 동지들 아닌가?”

“칼리프, 너무 공교롭습니다. 한 명도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이건 미리 알고 함정을 파지 않았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흠… 알겠네. 차다르(본부)에 상주하고 있는 전사들 그리고 어제 작전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 은밀히 살피도록 하게. 진짜 쥐새끼가 있다면, 그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친척, 친구 할 것 없이 싸그리 죽여 먼저 간 원혼을 달래야지.”

“네. 칼리프.”

“그나저나 망했구먼. 헨리 제리코에게 뭐라 변명할까나. 허허허.”

“미국에서 다시 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거기 형제들에게 연통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동굴 밖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쿠잘도 이 대화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낮춘 대화였지만 막혀 있는 동굴의 특성상 소리는 흘러나온다.

쿠잘은 모른 척 숯불을 불었다. 재가 조금 날렸는지 눈이 쓰렸다.

* * *

1992년.

한국도 선거전에 돌입했다. 미국과 맞물렸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열리는 것이다.

어떤 선거도 대통령을 뽑는 대선만큼 치열하지 않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재임 기간 동안 국민들의 삶을, 나라의 명운을 가른다. 이들의 결정은 그만큼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놈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잘하셨어요, 할아버지.”

[깃발만 들면 우리 현도 식구들이 들불처럼 나설 텐데.]

“하하하. 아쉽겠지만, 깨끗이 마음 접으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그럼 무조건 감양삼이네?]

“네. 절대 그분과 부딪치지 말세요. 은근 뒤끝도 강하고, 고집도 센 분입니다. 한번 가슴에 새기면 잊지 않는 성격이고요.”

[알았다. 그나마 좋구나. 네 말대로 김양삼이 되면 32년의 군사 정치가 비로소 끝나잖냐?]

“순리대로 가는 겁니다. 군인이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면 안 되죠.”

[시혁아, 너 아느냐? 군 내부에서 불만이 많다. 특히 특정 집단들… 위험한 놈들이 말이다.]

“하늘회를 말하는 거라면 아무 걱정 마세요. 김양삼 대통령이 취임하면 한칼에 정리할 겁니다. 그 양반, 승부사 기질이 농후하거든요.”

[그래?]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성희 씨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희 씨 귀국하거든 걸러 들으세요. 제 의견은 반영만 하시되 결정은 할아버지께서 하시고요.”

[네 말이면 다 맞는 거지, 뭘 걸러 들어? 알겠다. 좋은 시간 보내거라. 아예 성희 귀국 안 시켜도 상관없다.]

“에이… 씨, 끊을래요.”

전화를 끊고 몸을 돌리자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한 여자. 정조영 회장의 큰손녀 정성희다. 뉴욕까지 찾아온 사람을 박절하게 돌려보낼 수 없었고, 또 급변하는 사태에 대한 조언도 해 줄 생각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뭐라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서울에 가시면 꼭 전하실 말씀이 몇 개 있습니다.”

“멋있다…….”

“네?”

“일에 열중하는 남자, 뇌섹남, 잔근육 짐승남, 이게 여자들이 열광하는 세 유형이라는데, 시혁 씨는 다 해당되잖아요?”

“제가요?”

“당근이죠. 만점 수집가니까 뇌색남에,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몰라도 와이셔츠 속에서 꿈틀거리는 잔근육 가득한 짐승남에, 일도 미친 사람처럼… 딱 맞네.”

“성희 씨, 미안하지만, 제가 다음 일정이 가득해요. 당분간 한국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성희 씨에게 전하는 겁니다. 굉. 장. 히. 중요한 내용이거든요.”

“아! 알겠어요. 굉. 장. 히. 중요한 내용 경청할게요.”

“농담 아닙니다. 메모 안 됩니다. 녹음도 안 되고요. 다른 사람에게 절대 전하지 마세요. 오직 할아버지 한 분만 알아야 합니다. 약속하실 수 있죠?”

“네… 그렇게 정색을 하시니, 조금 무서워요.”

“첫째, 할아버지의 비자금을 조금씩 조금씩, 나중에는 모두 실명으로 전환하라고 하십시오.”

“……!”

“만약, 그게 힘들면 전부 외국으로 보내 놓던가. 아니면 저에게 보내도 됩니다. 한국 내에 차명으로 두지 마시라 하세요.”

“설마……?”

“네. 김양삼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겁니다. 경제 부총리도 모르게 별도의 TFT를 구성해서 준비를 할 테니, 정보가 새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벼락처럼, 급작스럽게 발표하고 바로 시행합니다.”

“진짜라면, 진짜 벼락이군요. 된서리 맞는 재벌들 눈물 콧물 흘리겠네요.”

“아마 졸지에 돈벼락을 맞는 사람이 전국에서 들썩일 겁니다. 내 이름이라고 배 째라면 답이 없거든요. 돈의 주인은 전처럼 공권력을 동원해서 압박할 수도 없죠. 그냥 홀랑 떼먹히고 마는 겁니다.”

“후와!”

“이 이야기는 성희 씨 아버지에게도 흘리면 안 됩니다. 절대! 아셨죠?”

“……!”

“안 됩니다. 부친께서 알게 되면 당연히 자신의 비자금부터 정리하려고 하겠죠. 그 과정 중에서 무조건 새 나갑니다. 워낙 형제들이 많으니까요.”

정성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버지와 엄마도 만만찮은 비자금을 꿍쳐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말하지 말라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도 그럴까? 거의 대부분 차명일 것이고 상당 부분을 날리게 될 텐데.

“정명구 회장님의 비자금 이동 상황 정도는 제가 체크할 수 있어요. 만약, 사전에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현도그룹과 저는 같이 갈 수 없습니다.”

“헉!”

딴소리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다, 독한 놈.

“저는 현도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력을 발휘할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정으로 다가와 주신 할아버지께 할 도리를 다하는 겁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독심술도 할 줄 알아요? 에휴… 알았어요. 약속합니다, 정성희의 이름을 걸고.”

그제서야 표정이 풀리는 시혁. 어찌 모를까? 그래서 더 모질게 대못을 박는 것이다.

“다음으로, 곧 중국과 수교가 됩니다. 그건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서 익히 짐작할 정도니까 부언 설명은 빼고요. 현도그룹은 중국을 먼저 선점하세요. 앞으로 수십 년간 벌꿀 창고가 될 겁니다.”

“예.”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철저히 임가공으로, 싼 인건비를 따먹기 위한 생산 기지로, 한국의 부자재를 팔아먹을 시장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고급 기술? 첨단 제품? 안 됩니다. 남들이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현도는 하지 마십시오.”

“……?”

“언제든 발을 빼도 타격이 없도록 스탠스를 취해야 합니다. 얻을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금방 턱밑까지 따라옵니다. 그 빌미를 주면 안 됩니다.”

“이해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1월 부시가 재선에 성공할 겁니다. 한국에서는 12월 감양삼 대통령이 당선될 거고요. 나머지 전략은 거기에 맞춰 하라고 전해 주세요.”

“시혁 씨, 미국의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요? 로스 페로가 끝까지 완주하면 공화당은 필패라고 연신 뉴스에서 나오던데… 부시 재선, 괜찮나요?”

“걱정 마십시오. 로스 페로는, 그는 찻잔 속의 태풍처럼 사그라들 겁니다.”

* * *

미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민주당에서는 빌 클린턴이 기가 막힌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mimy, stupid!)

노태후의 ‘보통 사람’만큼이나 강렬하게 사람들 뇌리에 남는 짧은 문장. 유권자들이 흔들렸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빌 클린턴이라면 우리 살림살이를 좀 펴주지 않을까 싶은 유혹을 갖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러나 공화당은 잠잠했다.

모든 초점이 로스 페로의 출마 여부에 맞춰진 것이다.

그가 나오면 공화당은 괴멸한다. 무조건 진다.

그가 나오지 않으면 공화당이 이긴다,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재임 중에 전쟁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낙선한 경우는 없었다. 부시가 그랬다. 그는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이끌어 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라크를 박살 내고, 세계가 미국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경제로 헛발질을 조금 했다지만 유권자들 가슴속에 국뽕을 한 사발 안겨 준 부시를 찍게 되어 있다.

그러나 로스 페로는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려는 듯, 공화당 강세 지역을 중점적으로 두드리고 다녔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은 노골적인 광고까지 내보냈다. ‘남자라면 끝장을 봐야 한다.’ 누가 봐도 이건 로스 페로에게 보내는 메시지. 졸렬하지만 로스 페로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로스 페로는 더 악에 받쳐 공화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결과는, 어부지리로 빌 클린턴이 승리하는 듯했다.

지옥문이 열리는 그 날만 없었다면…….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NBC 투나잇 쇼의 자니 카슨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입니다. 투나잇 쇼 역사상 가장 비중 있는 거물 세 분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초반 소개 발언치고는 유난스러웠다.

“오늘 방송 시간은 밤 11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벌써 꿈나라로 갔겠군요. 그래도 제 충성 시청자들은 눈을 비비면서 굳건히 저를 기다리셨을 테고요. 하하하.”

웃음이 터지지 않았다. 서두에 시덥잖은 너스레를 떠는 이유가 이제부터 나올 것이라는 것을 다 아는 것이다.

“역시 우리 시청자와 방청객은 촉이 좋습니다. 예. 오늘은 그저 가볍게 웃는 방송이 아닙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그리고 무소속이지만 한 개 당과 맞먹는 엄청난 분을 초청했습니다. 조지 부시 후보, 빌 클린턴 후보, 로스 페로 후보를 동시에 모시겠습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비로소 방청객들은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예고에 없던 일이었다. 곧 투표용지가 인쇄에 들어갈 시점, 공식적인 방송 출연을 마친 세 명의 후보가 이 밤에 왜?

이윽고 세 명의 후보가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단상이 아니라 각기 의자에.

“자, 갑자기 요청드렸음에도 흔쾌히 응해 주신 세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거가 겨우 2주일 남았습니다. 2주일 후면 이 세 분 중의 한 사람은 오벌 오피스에 멋진 모습으로 앉아 있을 테고… 뭐, 나머지 두 분이야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그 말에 세 후보의 표정은 일제히 찡그려졌다. 빌어먹을 놈.

자니 카슨은 원래 코미디언 출신이다. 그래서 정제되지 못한 발언으로 출연자를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진솔하다 못해 모욕적인 표현까지 거침없이. 그게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이기도 했다.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찝찝해서 말입니다. 세 분도 그런 기분이 들었기에 초대에 응했을 것이라 봅니다. 엄숙하게 단상에서 날선 공방을 하는 것보다 좀 편하게 마음속에 품었던 얘기들을 가감없이 나눠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동의들 하시나요?”

먼저 부시가 고개를 끄덕이고, 클린턴과 로스 페로도 웃음으로 동의했다.

시혁은 방청석 한구석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와… 지옥문을 열어 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