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12화 (112/150)

112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그 전에 제가 먼저 세 분의 약점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

“…….”

“…….”

“부시 후보께서는 테일후크 스캔들로 휘청하다가 삭발이라는 정말 멋진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 화려하게 부활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클린턴 후보는 부인 힐러리 여사에게 너무 꽉 잡혀 있다는 세간의 평이 있습니다. 그런데, 와우… 무소속으로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우리 로스 페로 후보는 현재까지 어떤 것도 약점이 없어요. 대단합니다.”

그래, 알았어. 왜 오늘 이 방송이 잡혔는지 알겠다.

오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부시를 까기 위해서, 거꾸로 로스 페로의 입지를 올려 같이 나락으로 처박히도록 기획된 것이다.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빌어먹을 놈들. 지금 내부 총질을 하다니.

“머리가 많이 자랐습니다. 부시 후보, 한 말씀하시죠.”

“사람의 신체는 신비롭죠. 매일 100억개의 세포가 죽고 태어납니다. 손상된 세포는 새로 합성된 세포로 대체되지요.”

“네, 과학 방송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죠.”

은근 비아냥거리는 자니 카슨.

“제 머리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근을 뽑은 것도 아니고 그저 위로를 전하기 위해 잠시 깎았을 뿐이거든요. 그건 매일 생기는 암세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작 힘든 사람은 백혈병과 싸우는 아이인 거죠.”

숙연해지는 장내. 자니 카슨은 일순간 당황했는지 어버버거렸다.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여기서 억지로 더 공격하다간 냉혈한으로 찍혀 프로그램이 폭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화살을 돌려야 했다.

“네. 이번에는 클린턴 후보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부인께서 너무 똑똑해서 휘둘린다, 잡혀 산다, 꼭두각시다, 종이 인형이다……. 이런 세간의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쁘지 않습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죠. 저는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져 주는 콘셉트를 잡았어요. 그게 나쁜 건 아니지 않나요?”

노련하게 빠져나가는 빌 클린턴. 이 정도는 충분히 대비했겠지. 아니면 미리 질문지를 입수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한편일 테고.

“역시 우문에 현답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로스 페로 후보.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억류된 포로 수용소에 비행기로 식료품을 투하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예,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란 미국 대사관과 테헤란이 온통 광신도들에게 점거되었습니다. 정부는 특수부대를 출동시켰는데 애먼 항공 승무원 시체 8구를 놓고 도망쳤어요. 하지만 후보는 사비로 용병을 고용해 자신의 회사 직원 2명을 구조했습니다. 언빌리버블!”

“네. 그것도 사실입니다.”

“덕분에 오늘 이 자리까지 오셨습니다. 따로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시죠.”

이건 완벽한 함정이다.

부시는 돌려 까고, 클린턴에게 빠져나갈 기회를 주면서, 로스 페로의 기를 살려 주는 각본에 의한… 결국 부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송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 버리면 로스 페로는 그만두고 싶어도 못 한다. 혹시 모를 마지막 변수를 틀어 막기 위해 철저히 기획된 음모랄까?

어제 발표된 여론조사를 로스 페로인들 보지 못했을까? 자신은 15% 내외의 지지를 받았다. 선거는 겨우 2주 남았다. 갈등이 없을까? 이대로 가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 긴급 방송이 편성된 거네? 의도를 가득 담고?

미안해. 이제부터 반격의 시간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주마.

부시는 방청석의 시혁과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미스터 자니 카슨.”

“오! 부시 후보님, 말씀하시지요.”

“네, 저는 로스 페로 후보와 쌍둥이처럼 닮은 점이 많습니다. 같은 텍사스 출신에, 해군 장교, 그것도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으니까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테일후크 스캔들이 터지자 대통령이 옴팍 뒤집어쓰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 새끼… 때에 따라 부시에서 대통령으로 말을 바꿔? 교묘한 그 입놀림. 너도 기다려. 살생부에 올려 두마.

“그러니까 말입니다. 테일후크 같은 파렴치한 범죄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피해를 입은 여성 해군분들에게 사죄드립니다.”

“예,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 좋습니다. 그렇다고 그 과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아… 갈수록 태산이다. 이젠 스스로 감추지도 않는다. 나는 네 편이 아냐!

“사회자, 로스 페로 후보와 저는 똑같은 테일후크 스캔들 범인들의 선배죠, 맞습니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들어요. 왜? 왜? 한쪽은 죽일 놈들의 선배로서 욕을 먹고, 한쪽은 영웅적인 일만 부각될까?”

“…의도적인 프레임이다……. 이런 말로 들리는군요.”

“글쎄요? 그건 내가 대답할 말이 아니라 로스 페로 후보가 입장 표명을 하는 게 맞지 않겠소?”

한 밤에 진행된 투나잇 쇼는 역대 최고의 시청율을 갱신 중이었다. PD와 연출진은 난리가 나 버렸다. 공식 선거운동 토론회 때와 비교도 안 되는 열기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터진 부시의 역공. 로스 페로는 예견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방어했다.

“부시 후보님, 당신은 대통령이고, 나는 일개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처럼 영웅적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미 대사관 점거 사태 때 투입된 특수부대는 완전 망했죠. 투입된 요원들은 바보처럼 어설프게 실패했어요. 어처구니없는 작전을 지휘한 당신도 당시 부통령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흠, 발언권을 얻지 않은 채 해도 되는 모양이군요. 그럼 저도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좀 바빠서 말입니다. 이번 방송이 끝나면 같이 술 한잔할 영웅들이 이 자리에 와 있거든요.”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요?”

“지금 로스 페로 후보가 그렇게 비난하는 ‘독수리 발톱 작전’에 투입되었던 전직 델타포스 대원들이 여기 와 있다는 말입니다.”

“……!”

“그들의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이것도 팩트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잘못인가요? 아닙니다. 저처럼 작전을 지휘한 멍청한 이들의 잘못이죠. 그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작전에 투입된 죄밖에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설마 그들의 면전에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방송사의 카메라가 왠지 심상치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을 비추었다.

처음부터 일반 방청객과 다른 비장한 이들이 눈에 거슬렸던 카메라맨은, 부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직감적으로 그들이 전직 델타포스 대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작전이 성공해야 영웅입니까? 저들은 작전 중에 헬기 충돌로 사망한 승무원의 시신을 데리고 오지도 못했습니다. 인정합니다. 각 부서가 공을 탐내다가 작전을 망쳤습니다. 그게 저들을 비난할 이유가 됩니까? 국가의 명령을 받든 저들이 바보… 맞습니까?”

“…….”

“당신이 그토록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핫풋 작전’, 훌륭한 결과를 냈습니다. 자사 직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출한 그 공로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

“그 과정 중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총도 없는 젊은이들이 당신이 고용한 용병들에게 죽었죠. 이해합니다. 시간이 촉박했고, 직원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 죄도 없는 이란의 대학생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한 건… 범죄였습니다.”

“…….”

“당신이 그랬다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직원들을 구해라. 그 과정 중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책임지겠다.”

“……!”

“바로 당신이 말입니다. 성공만 하면 그만이라는 당신의 생각…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정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로스 페로 후보.”

입담 좋은 자니 카슨도, 빌 클린턴도, 방청객도 입을 닫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말 로스 페로가 그런 인물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핫풋 작전은 내가 사비를 들여 내 직원을 구해 낸 것뿐이오. 그런 부당한 사건은 없었어요.”

로스 페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부시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악을 썼다. 이를 바라보는 시청자와 방청객의 눈길은 싸늘했다. 저건 인정하는 것이네.

그리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 순간의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미합중국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고?

그때, 마지막 비수가 날아와 로스 페로의 심장에 꽂혔다.

“앉으시오, 로스 페로 후보. 당신이 알았건, 몰랐건, 그 핫풋 작전으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는 건 감출 수 없는 팩트요.”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이야.”

“참, 내가 말을 다 못 했는데, 오늘 술자리에 한 사람이 더 참석하기로 되어 있어요.”

“…….”

“아서 D. 시몬스 예비역 대령. 당신이 작전 총괄 지휘자로 영입한 분이죠. 7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전장을 지휘하고 있는 분입니다. 물론, 여기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의자에 털썩 넘어지듯 로스 페로의 몸이 떨어졌다. 팔걸이가 없었다면 나뒹굴었을 것이다. 눈동자의 초점은 바닥을 향해 있었고, 손이 덜덜 떨리는 게 확연히 보였다.

이쯤 되면, 방송 사고다.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다. 자니 카슨도 끼어들 수 없었다. 어쩌라고?

그러나 담당 PD는 이 침묵을 가감 없이 내보냈다. 시청률 짱이니까. 웃대가리도 뭐라 말 못 할 것이다.

이 침묵을 깬 사람은 부시였다. 조용히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작전이 실패했다고 비난받아야 할 우리 병사들은 없습니다. 성공하면 더 좋았겠지만, 동료의 시신을 적지에 놓고 돌아와야 했던 그들의 비통한 심정… 누가 알겠습니까? 욕을 하려면 저같이 멍청한 지휘부에게 하십시오. 저들은 영웅입니다.”

“…….”

“방청석에 있는 시몬스 대령, 당신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었겠지요. 자국민을 구출한 당신, 오늘 불명예를 감수하고 나와 주신 그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당신도 영웅입니다.”

부시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였다. 놀랍게도 그는 카메라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카메라 앵글은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 눈물로 젖은 모습을 당겨 잡았다.

로스 페로는 두 손으로 맨 얼굴을 비볐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더 이상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렸다.

부시를 죽일 함정이 아니라 자신의 지옥문이었던 것이다.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열렸고 모든 게 나와 버렸다.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빠져나오지 못한 채 홀로 남아 있었고, 세상의 온갖 추악한 질투와 시기와 더러운 것들이 NBC 방송국 공개홀을 가득 채웠다.

‘끝났다. 이걸로 게임 오버다.’

* * *

“씁쓸하군, 그래.”

“예, 비록 공소 기간은 지났지만, 노병을 불명예스럽게 은퇴시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 나도 마음은 항상 일본군과 싸우던 그때를 생각한다네. 그래서 더 가슴 아파.”

“프레지던트, 그냥 앞만 보고 가십시오. 욕은 제가 먹겠습니다. 빌런의 역할을 기꺼이 맡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네 정말 대단해. 그 짧은 시간에 모가디슈까지 들어가 대령을 설득하다니. 거기서 습격을 받았다고?”

“네. 대령과 제 경호원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체첸 용병들, 이번 기회에 시민권을 줄 테니 모두 SS에 공식 등록하는 게 어떤가?”

“아닙니다. 그리되면 프레지던트에게 똥물이 튈 수도 있습니다. 또 체첸 용병들만 있는 게 아니고요.”

“응, 그것도 알아. 한국에서 자네를 지켰던 구르카 용병들 말이군.”

“예, 차라리 개인적으로 경호 회사를 발족시키겠습니다. 시민권만 배려해 주신다면 나머지는 제가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게. 자네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시민권 주는 게 뭐 대수겠나?”

“감사합니다. 선거, 이제 2주 남았습니다.”

“로스 페로는 어찌하고 있나?”

“이제 사퇴하건 완주를 하건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신경 끄십시오.”

“…….”

“원래대로라면 18% 이상 득표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 국민들이 그의 비정함을 알아 버린 이상 3% 득표도 힘듭니다. 부자니까 선거비 보전을 못 받아도 상관없겠지만… 이미 식물인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킴.”

“네. 프레지던트.”

“제발 자네도 시민권 받으면 안 될까? 내가 불안해서 그래.”

진심 같다. 질렸을 것이다.

시혁은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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