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김양삼과 부시
[일마야, 니 내는 안 도와줄 끼가?]
“…….”
[테레비 다 봤다. 거기는 게임 끝났다매?]
“…….”
[와? 내는 노태후처럼 이쁜 막내 딸내미 엄다꼬 카는 기가?]
와아… 진짜 철판 죽인다. 그냥 자기 할 말만 속사포처럼 내리갈긴다. 상대방 반응이야 어찌 되었건 상관없다는 투다.
[니, 그때 학실히 말했제? 내가 된다꼬. 그라모 쪼매 와서 도와주야 정상 아이가 이 말인기라.]
“저… 후보님, 죄송하지만, 여기도 아직 끝난 게 아니라서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글나? 그래도 며칠 왔다 갈 시간도 업드나? 내도 전용기 몬 타 봤는데 니는 자가용으로 쓴다메? 한숨 푹 자믄 김포 공항인데 좀 오믄 안 되겠나?]
안 되겠다. 더 끌려다닐 수 없다.
“후보님, 저는 도와드릴 여건이 안 됩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요. 미국에 할 일이 많이 남아서 당분간 귀국할 입장이 안 됩니다. 양해 바랍니다.”
[음… 내가 마이 어렵다, 시혁아.]
“…….”
[걱정도 마이 돼고, 이번에 꼭 붙어야 하거등. 내가 모진 욕을 처먹으면서 호랑이 굴로 들어왔는데, 덜렁 떨어지믄 진짜 개쪽이다. 갱상도 말로 문디 피 칠갑 하는 기라.]
의외다. 지쳤구나.
그동안 강철 같은 사나이로 비춰졌지만, 3당 합당은 쉽지 않은 승부수.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며 뛰어든 길. 그 무수한 도전을 뚝심으로 이겨 내고 최종 외줄타기에 나선 김양삼.
내심으론 두려운 것이다.
“후보님께서는 각하라는 호칭을 받는 마지막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비로소 32년 만에 문민정부의 시대를 여는 분이 되실 거고, 군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 내는 분도 후보님이십니다.”
[시혁아, 솔직히 말이다. 니가 내보다 더 쎄다이가? 내가 대통령이 된다 캐도 니한테 몬 이긴다. 언젠가 우리 대한민국도 코쟁이들한테 큰소리칠 날이 오겠지. 하지만 솔직히 아직은 아이다.]
“네.”
[알겠다. 여기 일은 그만 징징거리고 내가 알아서 하마. 대신 거기서 부시한테 지원사격 마이 해도, 알겠나? 그라고 절대 니 정체성을 버리지 말그라. 니는 코리안이다, 슈퍼 코리안.]
깡다구는 정말 짱이다. 이 아저씨,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획을 그은 대통령인 건 분명하지. 마지막에 아들에 대한 과도한 편애 때문에 똥칠하고, 간신들에게 휘둘려 대한민국을 거덜 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IMF. 이 단어만큼 한국인들에게 깊은 상실감을 준 존재는 없을 것이다. 국가가 부도났다는 상징과 같은 말이니까.
세상에는 역기능도 있지만 순기능도 있는 법이다. IMF가 그렇다. 미래 대한민국이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뼈를 깎는 구조 조정을 통해 기업들이 건강해졌고, 구태의연하게 저질러 왔던 불투명성이 제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그렇다 한들, 그 치욕스런 IMF가 좋을 리 없잖은가?
막을 수 있을까?
다 알고 있는데…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
“후보님, 제가 몇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후보님은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 되십니다만, 조금 쉽게 가는 방법 정도는 조언드릴까 합니다. 다만!”
[고마 치아라. 조건이 붙는 조언은 사양할란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기 마련이다. 내가 김양삼이다.]
“…….”
[헵상은 겔렐되었다, 시혁아. 하하하.]
“후보님, 조건이 아닙니다. 이건 제가 미래의 대통령 각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엥? 부탁이라꼬?]
“예, 제가 나중에 대통령님 임기 중에 꼭 부탁드릴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제 얘기를 조금 귀담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수화기 너머로 말이 없었다. 오로지 돌직구만 던지던 김양삼의 침묵.
[알겠다. 뭔지 모르겠지만 니 사이즈에 무신 특혜를 달라고 할 리도 없을 끼고, 다 나라를 위한 고언이 될 낀데, 오히려 내한테 좋은 거 아이겠나. 언제든 하그라. 그 부탁, 기다리고 있으마. 됐나?]
지금은 이 정도만 하자. 아직 몇 년 후의 일, 미리 이야기해 본들 먹히지 않는다. 숨이 간당간당할 때 인공호흡은 금보다 무겁지만, 열심히 달리는 마라톤 선수에게는 아무 필요 없는 짓거리다.
근데, 저놈의 사투리.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더 심하다고 들었는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니까 편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걸러 듣기 힘들어.
빌 클린턴을 두 번째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너 누구야!)’라고 인사하자 화들짝 놀란 통역이 ‘How are you?(잘 지냈어?)’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었다.
나중에 왜 그랬는지 물어보자 김양삼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임마! 갱상도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한테 ‘이기 누꼬?’ 칸다. 좀 배와라, 짜슥이.”
이제 이 대사는 못 쓰겠구나.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면 그를 상대해야 하니까.
그리고 거제도 가라산을 관통하는 도로 준공식에서는.
“이대한(위대한) 거제도 도민 여러분, 오늘 가라산을 간통(관통)하는 도로가 완공되어 이제 거제도를 국제적인 간강도시(관광도시)로 만들겠심니다, 여러분.”
제발 ‘관광’을 ‘간강’이라고 안 하시기를…….
* * *
92년 8월 양국의 외무장관이 공식 서명하고,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마침내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노태후 대통령이 9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열었다.
그에 따라 대만과의 관계는 자동으로 단절되었다.
참으로 비정한 것이 국제 관계다. 지금껏 한국과 대만은 좋은 형제국이었다. 같이 아시아의 4용(龍)에 속하기도 했고, 같은 민주주주의를 공유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 앞에서 그런 도리 따위는 헌신짝보다 가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중국의 성장세가 무서웠다. 또 북한이 핵 개발을 노골적으로 하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한국보다 한 달 반 먼저, 11월에 미국 대선의 결과가 나왔다.
부시의 압승이었다.
투표일을 2주 앞두고 방영된 투나잇 쇼가 결정적이었다. 로스 페로는 완주를 하기는 했으나 2.8%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야심차게 무소속 돌풍을 일으킨 것에 비하면 실로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었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은 끝까지 경제를 외치며 분전했으나 42%를 얻으면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부시는 55.2%를 움켜쥐고 다시 4년간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이 무너진 지금, 미국은 세계의 경찰 국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위치를 공고히 하는 중이다.
감히 미국에 견줄 수 있는 국가는 없었다.
“이번 취임식은 꼭 참석하게.”
“…그냥 빠지면 안 되겠습니까?”
“명령일세. 자네 성격은 익히 알지만, 이번에는 특별하니까 꼭 자리하게.”
“…네.”
“흐흐흐. 이제 눈치 볼 일이 없어. 어차피 마지막 대통령이니까.”
“프레지던트, 무슨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응.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느낀 게 많아. 진정한 적과 동지를 알게 되었달까?”
“적과 동지?”
“그래, 그동안 나도 참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지. 이 거지 같은 놈, 마지막까지 나를 엿 먹이려고 하던 놈, 절대 용서하면 안 되지.”
“……! 루퍼트 마독 회장을 말하는 거군요.”
“그래, 이 빌어먹을 자식이 함정을 팔 줄이야. 우리 집안이 그의 미국 정착을 그토록 도왔건만 뒤통수를 때릴 줄 누가 알았겠나?”
부시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에 급히 편성된 NBC의 투나잇 쇼는 너무 뻔하게 의도가 보였었다. 이를 역이용한 것은 시혁이었고.
극적으로 등장시킨 전직 델타포스 대원들과 눈물짓는 시몬스 대령으로 인해 한 방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 결정적인 연출이 없었다면, 결코 부시는 재선에 성공할 수 없었다.
“나는 매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네. 자네가 아니면 처음에도, 지금도 오벌 오피스에 입성하지 못했어. 자네는 빛나는 선물이야.”
역사를 바꿨다. 처음으로 큰 물줄기를 틀어 버렸다. 저런 부시의 진심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갈등하고 망설였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서, 또는 행동으로 인해서 너무 많은 미래가 바뀌는 것을 경험했기에.
되도록이면 큰 역사의 줄기를 거슬리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부시의 진심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역사를 본격적으로 비틀어 버린 셈이다.
그래, 김시혁. 고민은 네 몫이 아니다. 너는 그냥 가는 거다, 네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때까지.
“루퍼트 마독 회장을 초청하지 않을 작정이군요.”
“그래, 앞으로 4년 동안 루퍼트 마독은 숨을 죽여야 할 거야. 그렇다고 두고 볼 나도 아니고……. 단단히 손을 봐줘야지, 빌어먹을 유태인 놈.”
의외로 거대한 적으로 생각했던 한 축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딴지를 걸기 시작하면 마독이 아무리 거대한 언론 제국을 만들었다 해도 견디기 쉽지 않을 터. 뒈졌다, 이 영감탱이.
미국의 선거가 끝난 후 한 달 반 뒤인 12월, 한국에서도 14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실로 감격적인 일이다. 32년간의 기나긴 군부독재를 벗어나 비로소 문민 대통령이 나온 것이다.
김양삼이 선거 관리 위원회에서 발부한 대통령 당선증을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보여 주는 사진이 신문의 첫 꼭지를 차지했다.
* * *
“시혁아.”
“응, 하송아.”
“기분이 묘하다.”
“왜?”
“그냥…….”
“새끼, 싱겁기는.”
“우리 법대는 조금 덜했지만, 얼마나 많은 선후배들이 죽고 상했는지를 생각하면, 저 당선증이 제대로 쓰여져야 할 텐데 말이다.”
“잘하겠지, 처음 탄생한 문민 대통령인데.”
“할머니가 김양삼 대통령하고 친했거든. 전에 들은 말이 있다. 신념, 철학, 사상, 정직과 도덕성, 다 좋긴 한데…….”
“뒷말이 더 있다는 거네?”
“응, 시혁아,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김양삼 대통령은 우선 머리가 깡통이라더라. 한마디로 텅텅 비었다 이거지.”
“대통령이 시험 쳐서 가는 자리도 아니고, 자기 머리가 부족하면 각 분야 사람을 잘 뽑아 쓰면 되는 거지. 별 걱정을 다한다.”
“또 있다. 저 양반, 아들을 너무 편애한다더라. 대충 우리보다 예닐곱 살 정도 많은 분인데, 그 아들 때문에 한번 난리 날 거라고 하시더라.”
“……!”
이런 걸 보면 세상에 숨은 현자는 많다. 백 할머니는 어떻게 족집게 무당처럼 정확히 예측을 하셨을까?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다는 말.
왜곡해서 해석하면 권력의 비정함으로 들릴 수 있다. 사실 역대 왕조가 그러했다. 왕이 왕좌를 물려주기 전까지 세자는 정적인 것이다. 권력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왕의 무겁고 무거운 어깨를 빗댄 말일 수도 있다. 모든 책임은 왕에게 있기 때문이다. 흉년이 들어도, 홍수가 나도, 가뭄이 들어도, 왕은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대통령인들 다르지 않은 자리다. 그런데 저 양반은 백 할머니의 예측대로 자식에게 권력의 한 축을 쥐어 주고 말았다. 세자라면 공식적인 권한이라도 있지. 아무 권한도 없는 자식을 소통령으로 만드는 실수를.
그로 인해 자신도 오욕을 맛보고 자식은 감옥에 가는 걸 알까?
“하송아, 그것보다 대한민국이 부도가 나면 어찌 될까?”
“미친 소리!”
“아니, 만약에 말이야.”
“만약이라도 그럴 일은 없다. 나도 인정하기 싫고 진짜 부정하고 싶지만, 군인 출신 대통령들 시절에 우리나라가 발전한 점 하나만큼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물론 그 발전이 무수히 많은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쌓았지. 그렇다 해도 지금 대한민국은 건강하다. 발전하고 있고… 그런데 무슨 국가 부도? 미친놈아.”
“…….”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잘하면 멱살 잡히고, 잘못하면 돌 맞는다.”
‘사실이니까 더 문제다, 하송아. 또 역사를 비틀더라도 이건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너무, 너무 아프거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