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사냥
“1년 만에 뵙는군요. 다들 별일 없으시죠?”
“네. 총회장님.”
“덕분입니다.”
“총회장님 근황은 방송에서 자주 접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는 우리도 공화당에 많은 선거비를 냈습니다. 전 같으면 민주당에 올인했을 텐데 말입니다.”
“…….”
시혁이 첫 마디를 떼자 한마디씩 덕담을 나누는 회장들. 한 사람을 빼고 모두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다.
지금까지 세븐시스터즈의 정기 모임은 각 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에서 돌아가며 열렸다. 그러나 이제는 무조건 뉴욕에서 열린다. 총회장이 뉴욕에 있으니 도리가 없다.
“헨리 회장님은 어디 불편하신가 보죠?”
“…아닙니다, 총회장님.”
“다행입니다. 아프시면 안 되죠. 저보다 더 오래 사셔야 할 분인데.”
“……!”
잠깐 사이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다들 이 자리에 포커 쳐서 올라온 사람이 아니다. 총회장의 말에 삐죽삐죽 가시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곤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일이 총회장과 헨리 사이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이고, 오늘 왠지 오기 싫더라. 피할 수 없는 자리였기에 오긴 했다만, 심상찮다.
“제가 이번에 상당히 화가 났어요. 미국 정찰 위성 3대를 제 개인적인 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1급 전략 자산인 글로벌 호크 3기에 총 12발의 헬파이어 미사일을 장착한 채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
이 무슨 소리?
전쟁을 하려고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한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려고 했던가…….
회의실에는 침 삼키는 소리와 헛기침 소리가 조심스럽게 퍼졌다. 예감대로 너무 살벌하다.
“시신 한 구를 돌려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 걸고 적진에 침투했던 요원이 마지막 보고를 끝으로 폭사했거든요.”
“……!”
“이번 일을 실행하기 위해 프레지던트와 독대를 했고, 국방장관과 CIA 국장을 설득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통해 예멘 정부군도 움직여야 했습니다.”
“…….”
“저는 제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대!”
마지막 ‘절대!’라는 말을 할 때 시혁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자, 회장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은 뜻인데, 왜 이리 무섭지?
“반대로 저와 적이라고 생각하면… 묵과하지 않아요. 그냥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파멸시킵니다. 한 하늘 아래 같이 숨쉬며 살 생각, 없습니다.”
“…….”
“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식구죠. 한국말로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외에 동지가 있어요.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끝으로 동료도 있습니다. 같이 일을 하는 분들입니다. 여기까지가 제 울타리 안의 사람들…….”
“…….”
“여기 계신 분들은 식구입니까? 동지인가요? 혹은 동료?”
점점 말이 격해진다. 시혁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회장들의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특히 엑슨모빌의 회장 헨리 제리코는 안색이 까맣게 변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세븐시스터즈 회사 운영에 대해 한 번도 간섭한 적 없습니다. 회장님들이 계시는 동안 경영권을 보장하겠다는 약속, 지킨 것이죠.”
“…….”
“그 약속, 저는 지켰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눈을 맞추는 사람이 없다. 하나씩 다 찔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공룡 기업의 회장이 밝은 일만 했을까? 비자금은 꼬불치지 않았을까?
종신직이라 하나 지분 하나 없는 바지 회장으로 전락한 처지, 자기 뒷주머니에 먼저 챙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맺은 이면 합의서의 기본 정신은 상호 신뢰, 그 신뢰라는 게 박수와 같은 거예요. 서로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한쪽은 뒷짐 지고 있는데 한쪽이 풀스윙을 해 본들… 허당입니다. 뻘짓이란 말이죠.”
“…….”
“짝사랑은 항상 외롭습니다. 그런데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면, 그 순간 이별입니다. 내 울타리에서 지우게 됩니다. 내 식구도, 동지도, 동료도 아닌 울타리 밖, 남이 되는 겁니다.”
“…….”
“이면 합의? 신뢰가 없는 합의서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침 넘기는 소리조차 없었다. 오늘 총회장이 뭔가 마음을 야무지게 먹었다는 것을 느낀 회장들은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인가 있었다. 승부사이긴 해도 품위가 있었는데, 오늘 이토록 격노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때, 시혁의 눈짓에 따라 윌슨이 회의실 조명을 끄고, 산드라가 비디오 테이프를 밀어 넣자 한쪽 벽면의 대형 화면이 켜졌다.
처음 등장한 화면은 흡사 취조실 같은 분위기의 방.
천정에는 작은 갓등이 흔들리고 있었다. 외부에서 바람이 들어오던가 에어컨을 켜 두었다는 반증이다. 문제는… 가운데 놓인 책상 하나와 의자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한 사람, 또 건너편에 정장을 걸친 또 한 사람의 모습.
누가 봐도 범인을 취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 한마디 않던 헨리 제리코는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금테 안경이 콧등에서 흘러내려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며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다른 회장들은 아직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다. 다만, BP의 리처드 레드포드만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윽고 시혁의 입에서 냉기를 머금은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한번 들어 봅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이 나옵니다.”
-풀 네임?
-거기 적혀 있잖소.
-소속?
-그딴 거 없소.
-로버트 하일로, 릭 베니, 아나?
-…….
-알리 칸다프는?
-…….
-이봐, FBI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
-왜 각기 다른 나라 사람, 다른 여권마다 당신 얼굴이 박혀 있는 거지?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갈 때는 로버트 하일로, 홍콩으로 갈 때는 릭 베니, 두바이에서 수단으로 갈 때는 알리 칸다프, 마지막 수단에서 다시 로버트 하일로, 여러 번 변신했네?
-…….
-처음, 이탈리아의 UBS 은행 지점(스위스)에서 천만 달러를 인출했더군. 릭 베니 이름으로 계좌를 새로 개설하자마자 10분 만에 천만 달러가 입금되었어. 누가 보낸 돈이지?”
-…….
-그 수표 추심을 돌린 곳이 모로코의 UBS 은행 지점, 알고 있나?
-모르오. 나는 아무 것도 몰라.
거기까지 보던 시혁이 손을 들자 산드라가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정지시켰다. 윌슨은 즉시 회의실 조명을 다시 켰다.
“누굽니까?”
“…….”
“저는 지금 이를 악물고 참는 겁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나서세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헨리 제리코 회장은 탁자만 쳐다본 채 미동도 없었다. 리처드 레드포드는 그런 그를 측은한 듯 힐끔 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른 회장들은 진짜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끝까지 보시겠다면… 저도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산드라!”
또 회의실 조명이 꺼지고 화면 속 취조 장면이 계속되었다.
-당신, 발뺌한들 상관없어. 증거는 차고 넘치거든. 미스터 매튜 제리코.
-……!
-테러 단체 알 카에다에게 처음 천만 달러 그리고 일주일 뒤 또 9억 9천만 달러를 줬어. 그 돈으로 알 카에다는 아프간에서 예멘으로 거점도 옮기고 다량의 무기도 구매했지. 왜 줬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훗! 당신에게 선택지는 둘뿐이야. 모든 걸 뒤집어쓰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든가. 아니면 다 불고 20년 형을 받든가. 시원하게 실토하면 15년까지 줄여 주지. 아마, 10년만 살면 가석방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
-수표의 원출처도 이미 다 밝혀졌어. 그 수표, 돌고 돌아 알 카에다가 사용했다는 것도 확인했고. 이거 맞지? 당신 지문이 너무 선명하게 찍혀 있네?
-…….
취조를 하던 수사관이 천만 달러와 9억 9천만 달러가 적힌 수표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보였다.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도.
-좋아. 묵비권, 훌륭해. 그 희생정신에 경의를 표하지. 그런데 당신 5형제의 막내지? 이제 60이야. 다 덮어쓰기, 억울하지 않아?
-……!
-10년 후 당신 손자를 안아 보느냐, 아니면 감옥에서 평생 쓸쓸하게 죽어 가느냐……. 장담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살벌한 오하이오 남부 교도소로 보내질 거야. 거긴 일반 죄수들이 가는 곳이 아니거든. 연쇄 살인마와 강간범, 갱들만 수감하는 곳이라고.
-왜, 왜 그리 보낸다는 거요? 법치국가인 미국에서 그래도 되는 거요?
-매튜, 이 불쌍한 매튜 제리코 선생. 네 죄목이 뭔지 아직 몰라? 테러리스트야, 너는.
-나, 나, 난… 그냥 심부름을 했을 뿐이야.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그래, 알아. 너는 단순히 살인 청부를 대리한 놈에 불과해.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죄는 네가 뒤집어쓰는 거야, 병신아.
-정말… 다 불면 10년 만에 나갈 수 있는 거요?
또다시 화면이 멈추고 불이 켜졌다.
회의실은 정적에 잠겼다. 이 정도도 못 알아먹을 바보가 있을까? 리처드 레드포드는 더군다나 화면에 등장한 저 병신을 잘 알고 있다. 같이 어울려 골프도 친 적이 있을 정도로.
직접 본 적 없는 다른 회장들도 이젠 다 감을 잡았다. 매튜 제리코, 헨리 제리코… 형제였네.
여전히 테이블만 노려보는 헨리 제리코 회장. 차라리 성공이라도 할 것이지. 당신은 지옥의 악마를 결국 소환했구나, 이 자리로.
“헨리!”
“…….”
“고개를 들어, 헨리 제리코.”
거듭된 부름에 겨우 머리를 들었으나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길. 제정신이 아니다.
“왜 그랬는지 묻지 않겠다. 이유는 백 가지도 더 있을 테니까. 정말이야. 이해할 수 있어.”
“…….”
“나는 묻어 둘 수도 있어. 당신의 시도는 헛된 것이 되었으니… 단지, 그 과정 중에 내 수하 한 명이 죽었다. 당신의 그 욕심 때문에. 그 죄, 깊고도 깊다.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내 식구도, 동지도, 동료도 아니다.”
“으흐흐흐, 쿠크크크!”
순간, 괴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리처드 레드포드는 섬찟한 느낌에 외면하고 있던 헨리 제리코를 쳐다보았다.
‘완전히 실성했구나.’
“마이다스 킴, 아니 보스라고 불러야 하나? 그래, 나는 실패했어. 자그마치 30억 달러를 주기로 했다. 알 카에다가 아니라 북한의 김정일이라도 상관없었어. 너만 죽일 수 있다면, 너만 죽어 버리면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큭큭큭.”
“그래서?”
“이미 동생이 자백했으니, 나도 끝장난 거겠지. 억울하다. 너 같은 악마와 겜블을 해서 이렇게 몰락한 것이 너무 억울해.”
“우린 서로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레이즈를 한 거 아닌가? 너는 졌고, 나는 이겼을 뿐. 그걸 억지로 되돌리려 한 너의 노욕이 부른 결과야, 헨리 제리코.”
“내가 평생을 바친 회사, 내 삶의 전부였던 엑슨모빌이 너 같은 놈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 싫었어. 그래서 알 카에다에게 청부한 거다. 꼭 죽여야 했는데… 꼭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하는데……. 하늘이 원망스럽다, 킴.”
지금껏 얼음같이 냉정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시혁이 처음으로 빙긋 웃었다.
“산드라, 영화 마저 볼까?”
“네, 보스. 좀 싱겁긴 해도 틀겠습니다.”
산드라의 대답과 동시에 화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불을 끄지 않은 그대로.
-매튜, 약속하지. 정 못 믿겠다면 연방 검사의 형량 거래 서류도 미리 발급할 수 있어. 다 털어놔.
-아, 아, 아냐. 이건 아냐.
-매튜 제리코!
-다 내가 한 짓이야. 큰 형님께는 돈을 빌렸을 뿐이라고. 우리 집안을 거덜내는 마이다스 킴을 죽이라고 청부한 당사자는 나야. 다 내가 한 짓이야!
환한 회의실에서 헨리 제리코는 울부짖는 동생의 영상을 보면서 헤 벌린 입으로 침을 줄줄 흘렸다.
이럴 수가. 그랬단 말이네. 내가 지레짐작으로 다 털어놔 버렸어. 막내동생은 스스로 다 뒤집어쓰려 했는데…….
“이 개자식! 함정을 팠구나!”
“응. 맞아, 너 같은 저질보다 네 동생이 훨씬 더 나았어. 근데 어쩌나? 이처럼 확실한 자백이 나와 버렸으니. 이걸 한국말로 뭐라는지 알아? ‘빼박’이라고 해.
“우와악! 이 개자식!”
사냥이 끝났다.
준비한 올가미가 제대로 먹혔다. 가만 있었으면 풀고 도망칠 길이 있었거늘, 발버둥치다가 깊이 파고든 철사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굿 럭! 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