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16화 (116/150)

116화 복주머니의 방문

대기하고 있던 FBI 요원들에게 헨리 제리코는 끌려 나갔다. 당시 기준으로 부동의 1위 기업.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출액과 자본금과 주가를 가진 엑슨모빌의 창업자 헨리의 몰락은 너무 처참했다.

헨리는 제 발로 걷지 못했다. 수사관들에게 발을 질질 끌리다시피 부축받으며 회의실을 나섰다. 아마 평생 감옥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다른 6개의 메이저 석유업계 회장들은 그걸 지켜보면서 말이 없었다. 그들도 안다, 언제 자기가 저 꼴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덤덤할 수 있었던 것은 시혁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 식구, 내 동지, 내 동료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말했다.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은 어떤 태풍이 몰아쳐도 보스가 먼저 막아 주겠노라 했다.

신뢰는 박수와 같은 것이라 했다. 서로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박수. 그렇다면, 보스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 지금의 자리와 권세는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저 미친 헨리 제리코처럼 선을 넘지 않으면 된다. 뒷짐을 지지 않으면 된다. 그저 보스의 지시를 충실히 지키면 그만이다.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보스와는 절대, 어떤 경우에도 대적하면 안 된다. 같이 가야 한다.

그래야 산다.

“산드라, 엑슨모빌의 긴급 주총을 공지하도록.”

“네, 보스.”

“안건은 엑슨모빌의 회장 직제를 없앤다. 현행 대표이사가 모든 책임하에 전권을 행사토록 한다. 대표이사의 2년 임기를 보장한다. 단, 경영상 긴급한 사항과 회사의 재산 변동 등 중요 사항은 지주회사인 K 미르 컴퍼니의 지시를 따른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시혁은 거침없는 지시를 끝낸 후 좌중을 둘러보았다. 회장들은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선뜻 마주 보는 이가 없었다.

“여러 회장님, 변한 건 없습니다. 제가 먼저 약속을 깨지 않습니다. 상호 신뢰가 살아 있는 한.”

“…….”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일 대 일로 싸우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죠. 그런데 호랑이는 절대 사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자는 홀로 다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보스의 뜻을 알겠다. 경종을 울린 것이다, 헨리 제리코라는 희생양을 먹이 삼아서.

“세븐시스터즈는 전 세계 석유의 절반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강력한 힘이 있어요, 호랑이처럼.”

“…….”

“그런데 말입니다. 각기 따로 놀아도 그럴까요? 무서워는 하겠지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 호랑이는 피하면 그만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은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처럼 하나로 똘똘 뭉쳐 그 영향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

“이제부터 제가 여러분의 숫사자가 되겠습니다. 그걸 부정하는 분이 계시면 조용히 나가세요. 저 문이 제 울타리 경계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사자는 무리 생활을 한다. 한 마리의 숫사자를 중심으로 암사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산다.

숫사자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한다. 암사자는 그 보호 아래서 사냥을 하고, 새끼를 낳아 무리를 번성케 한다. 그게 자연의 논리다.

이윽고 BP의 리처드 레드포드가 일어났다.

회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커졌다. 미쳤나? 헨리 제리코와 가장 친한 사이였다는 걸 알지만, 감히 이런 분위기에서 반발을? 저 문을 나서겠다고?

짝짝짝-

응, 아냐.

리처드는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머지 회장들도 벌떡벌떡 일어나 리처드를 따라 박수를 쳐 댔다.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는지 경쟁하듯.

아뿔사… 한발 늦었다. 귀띔이라도 주지. 저 여우 같은 자식.

회의실이 박수 소리에 묻혀 버렸다.

한편으로 진심도 담겨 있었다. 뭔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하다. 지금껏 혼자 잘났다고 제 팔 흔들며 살아왔지만,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이 은근히… 괜찮네. 든든한 것이다.

곪아서 부풀어 오른 종기가 살이 되는가? 짜내고 나면 움푹 파인다. 헨리 제리코 사태를 거치면서 본의 아니게 속살을 드러낸 꼴이 되었다. 종기는 짜내야 새 살이 돋는 법이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면 세상에 본 적 없는 청명한 하늘이 보이기 마련이다. 거기다 무지개가 떠 준다면 최고지.

뉴욕을 떠나는 회장들의 표정이 편안했다.

“회장님.”

“응, 산드라.”

“일타쌍피!”

“너… 고스톱 배웠어?”

“예, 박하송한테요.”

“부탁하는데, 그놈 가까이 하지 마. 정상이 아냐.”

“요즘 윌슨하고 넷이서 밤마다 치는데?”

“넷?”

“예, 부회장님도요. 한 명은 광 팔아야죠.”

“삼촌이? 같이 고스톱을 친다고? 미쳤어?”

“쯧쯧쯧! 부회장님, 타짜야. 매번 몽땅 쓸어 간다고요. 진짜 몰랐어요?”

“…….”

“전에 하송이 밑장 빼기하다가 부회장님에게 걸렸거든요. 한국에서는 그런 경우 손목을 자른다고 하시던데? 하송이 싹싹 빌었어요. 엄청 무서웠거든.”

사람마다 하나씩 비밀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그 지성이 빛나는 공사홍 삼촌이… 타짜?

“혹시, 며칠 전 하송이가 내 지갑을 다 털어 간 적이 있는데…….”

“맞을걸요? 부회장님이 그랬거든. ‘오고 가는 현금 속에 싹트는 우정’이라고. 아! 신체 포기 각서? 그게 뭔지는 몰라도 사인하라 했어요.”

“……!”

으흐! 내가 너무 세상을 착하게 살았구나. 믿었던 삼촌이…….

하송아, 불쌍한 박하송.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었던 거야. 자동으로 장기 기증 서약을 해 버린 거네. 삼촌은 싱싱한 젊은 몸을 확보한 것이고.

* * *

92년 당시 통일 독일.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했지만 어지러웠다. 오랜 시간 통일에 대비하고, 통일 후 혼란을 최소화할 비용도 적립했건만… 막상 닥치고 보니 온통 난리투성이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일주일 만에 동독인 200만 명이 서독으로 밀려 들었다. 그들은 자유와 풍요의 땅 서독을 만끽했다.

청바지와 바나나를 싹쓸이했으며, 햄버거를 먹겠다고 식당 앞에 줄을 섰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차가운 현실과 직면해야 했다. 서독 정부가 긴급 지원한 일명 ‘환영비’는 겨우 100마르크(약 6만 원), 어느 상점도 동독 화폐를 받지 않았다. 결국 서독 마르크를 벌어야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쓴맛과 맞닥뜨렸다.

40년간의 분단이 끝났지만…….

동서독 게르만 민족이 꿈에도 바라던 통일을 했건만…….

막상 바로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동독의 경제는 사실상 붕괴 직전의 상태였고, 공산주의에 길들여진 동독인의 노동 생산성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 동독인을 냉큼 받아 줄 서독 기업주, 상점주는 없었다. 차라리 무료로 빵을 줄지언정… 그게 자본주의의 속성이라는 걸 비로소 동독인들은 알게 되었다.

정작 프라이팬에 콩 볶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은 서독 정부. 어떻게 하든 서독의 경제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같이 망한다. 같이 죽는다.

문제는, 앞으로 얼마의 돈이 들어갈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는 것.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아무리 서독이 빵빵하게 잘나가는 경제 대국이라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결국 독일 정부는 대규모 채권을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하여 ‘통일 채권’.

또 문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 그나마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30억 마르크를 내주었다. 또 동독 내의 소련 자산이 철수하면서 받아야 하는 120억 마르크도 탕감해 주었다.

솔직히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이걸로 퉁치자는 의도였다. 그동안 소련이 서독에서 빨아먹은 게 너무 크니까.

그 외에는 어떤 나라에서도 통일 독일의 ‘통일 국채’를 사 주는 곳이 없었다. 그런 판에 세계의 모든 돈이 모이고 흘러가는 월가에서?

턱도 없는 소리다. 쓰레기, 정크 본드(Junk Bond) 취급을 받고 있었다. 통상 국채 금리는 발행 국가의 신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 통일 전 서독의 3년 물 국채였다면 2%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 안전하니까. 서독이라는 국가가 망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지금은?

15%를 불러도 고갤 돌린다. 월가에서는 독일 소리만 나오면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린다.

여기저기서 갑자기 예고 없이 닥친 통일로 인해서 독일이 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바이겔 재무장관님.”

“아… 만나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아직 정식 직책을 받지 못했습니다. 재선이라 인수위원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전처럼 특보라고 불러 주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부시 대통령 취임 준비 위원장을 맡으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뭐, 제가 하는 일은 없습니다. 백악관의 의전 비서관과 홍보 기획 비서관실에서 다 알아서 합니다. 저는 그냥 들러리에 불과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시 세간의 하마평이 사실이었군요. 대통령과 무릎을 맞대고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더니.”

“…네, 너무 구름 위로 띄우면 나중에 엉덩이 아픕니다. 꼭 저를 만나야 한다고 몇 번 요청을 하셨다는데, 좀 들어 볼까요?”

시혁은 통일 독일의 재무장관과 면담 중이었다. 선거 후 뒷처리와 취임 준비로 바빠 여러 번 거절했건만, 줄기차게 들이 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만난 것이다.

빨리 커피나 한잔하고 빠이빠이 할 생각이었다.

“특보님! 우리 독일은 미국의 절대적 우방국입니다.”

“네.”

“지금껏 미국의 정책에 무조건 협조해 왔습니다.”

“네.”

“그런데, 우리 독일이 통일 이후 많이 어렵습니다.”

“네.”

“이럴 때 미국이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되겠습니까?”

“…….”

“부탁드립니다, 특보님. 미국의 도움이 너무 절실합니다.”

“어떤 부분을 도와 주길 바랍니까? 그런 문제라면 저를 찾아올 것이 아니라 귀국의 총리께서 프레지던트께 말씀하시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왜 안 했겠습니까?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다고 저 마귀 같은 FRB(연방 준비제도 이사회)가 달러를 찍어서 퍼 줄 것도 아닌데.

“우리 통일 독일은 금방 안정됩니다. 미국이 먼저 ‘통일 국채’ 매입에 나서 주면 다른 나라들이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재무장관님,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특보님, 제발 부탁합니다. 대통령을 움직여 우방인 우리나라를 돕도록 해 주십시오.”

절박하구나. 막바지에 몰렸다.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서독 정부는 동독에 있는 산업 자산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최소한 6,000억 마르크는 될 것으로 생각했던 동독의 산업 자산은 통일 후 실사를 해 보니 2,000억 마르크도 되지 않았다. 결국 동독을 재건하기 위해 40년 동안 모았던 1조 달러의 통일 기금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상황.

서독 주민들에게 통일세를 부과해서 일부 충당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였다. 그래서 국채를 찍겠다 공표를 했지만 막상 눈길도 주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겠지.

“재무장관님, 지금 국제 경기가 썩 좋지 않습니다. 거기다 통일 독일의 국채는 거의 CCC- 투기 등급 아래로 취급받고 있어요. 그런 판에 미국 세금을 정크 본드 매입에 쓴다면 정권이 위험해집니다.”

“……!”

바로 고개를 처박는 바이겔 재무장관.

더 이상 매달릴 곳이 없는 자의 절망감……. 시혁을 제외한 그 누구도 베를린 장벽이 일시에 붕괴한다는 사실을 예측한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부시가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상대로 내기를 했겠는가?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독일에게 통일은… 이토록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통일은…….

독약이었다.

그런데… 어라?

가만있어라. 가만가만!

순간 시혁은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알잖아!

곧 세계 경제는 급속도로 상승 곡선을 그릴 테고, 미국은 G1의 지위를 이용해서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고, 여기 고개 숙인 남자의 조국 통일 독일도… 회복한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유럽 최대의 강국에 등극한다.

그간 10년 동안 물밑에서 조율 중이던 그 공룡, EU(유럽연합)의 극적 타결로 인해서.

‘이 양반, 커피 한 잔 먹여서 보낼 사람이 아닐세. 귀인이었잖아?’

“장관님, 커피가 식었군요. 제가 다시 한 잔 내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특보님. 바쁜 분 붙잡고 떼를 써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냥 가면 안 되지, 내 자산을 몇십 배로 불려 줄 돈주머니!’

“그대로 보내면 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습니다. 정부 차원에서는 안 되지만, 제가 돕겠습니다, 통일 독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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