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무한 자본을 향한 재시동
백악관 내 오벌 오피스.
“그래?”
“네. 프레지던트. 그동안 미국에 대항해 왔던 나라를 꼽자면 군사적으로는 소련이 있었고요. 경제적으로는 일본과 독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이미 소련 연방이 붕괴되면서 그 뒤를 이은 러시아가 새로운 복병으로 부상할 겁니다. 이건 장기적으로 대비를 해야 합니다.”
“러시아가 그 정도 힘이 있을까?”
“프레지던트, 한국 속담에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많은 나라가 떨어져 나갔지만, 러시아는 소련 연방의 70%를 승계했습니다. 만만치 않습니다.”
“좋아. 러시아는 가상의 적으로 상정한다치고, 독일과 일본은?”
“일본은 걱정이 없습니다. 적당히 칭찬해 주면 영원히 꼬리를 흔드는 개에 불과하니까요. 정작 문제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될 겁니다.”
“독일은 어차피 폭망하고 있어. 갑자기 닥친 통일의 여파로 무너지고 있지 않나? 앞으로 수십 년간 회복할 수 없다는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네만.”
지금 모두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의 국채가 북한과 같은 등급인 CCC-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를 쓰는 전문가는 오로지 하나만 봅니다. 자신이 아는 한계,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을 뛰어넘는 현상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는 경향이 있어요. 그들은 왜 바다 한가운데서 태풍이 생기고, 왜 땅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자연재해라 생각하니까.”
“자연재해?”
“그건 어줍잖은 핑계고, 자기 합리화예요. 만약에… 혹시라도… 어쩌면… 이런 가정을 하기 싫은 거죠. 자신의 전문성을 부정할 수 없잖습니까?”
“흠.”
부시의 표정이 바뀌었다. 비로소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수렁에서 허덕이는 국제 경기는 단숨에 살아납니다. 그걸 견인하는 것이 우리 미합중국이죠. 프레지던트께서 걸프전을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G1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세계는 움직입니다.”
“…….”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사항을 놓치면 큰일 납니다.”
“핵심적인 사항?”
“네. EU의 탄생입니다.”
“……!”
이번 독일의 사태를 빌미로 해서 유럽연합이 공식 출범하고, 그들이 단일 통화를 만든다면… 새로운 흐름이 형성됩니다. 그 과정에서 독일 경제가 단숨에 살아날 거고요.”
“흐음, 또 놀라고 말았네. 자네의 분석이 맞다면, 아니 맞겠지. 내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통일 독일의 연방 정부 내 총리의 집무실.
“사실입니까?”
“네. 아직 구체적인 안은 확정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그래 봐야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되겠습니가?”
“총리님, 아닙니다. 마이다스 킴을 일개 개인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는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재무장관, 우리가 통일이 됐다고 기뻐한 것은 순간이었습니다. 동독의 현실은 시궁창이예요. 열 집 가운데 전화가 있는 집이 한 집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의욕이 없어요. 생산성도 서독에 비해 절반이 안 됩니다. 스스로 일어나도록 의식을 개조하고, 산업 시설을 복구하려면 앞으로도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총리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마이다스 킴이 해법을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하아! 큰일이군요. 우리 게르만 민족의 운명이 한 사람의 손에 달렸다니.”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2층.
“부회장님, K 글로벌 USA 메리웨더 대표를 만나세요.”
“의제는?”
“메리웨더의 펀드 레버리지를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 독사 같은 놈이 협조할까?”
“할 겁니다. 메리웨더라면 알아먹을 겁니다.”
“그놈은 자기 펀드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일이라면 바로 고개를 돌릴 건데? 확실한 담보가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리 본사의 요청이라도 거부할 거다.”
“주면 되죠, 그 담보.”
“알았다. 나는 말만 전하마. 어차피 결정은 너와 메리웨더가 할 터이니.”
이번엔 산드라.
“산드라, 세븐시스터즈 다시 소집하세요. 만사 작파하고 지금 즉시 전용기를 띄우라고 통지해요.”
“네, 회장님. 어렵지 않습니다. 전과 다르게 나긋나긋해졌거든요.”
“좋아. 올 때 각 회사의 이사회 멤버를 같이 데리고 오라는 말 빼먹지 말고.”
“회장님, 그 말씀은……?”
“여기서 세븐시스터즈 각 회사의 임시 이사회를 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오라는 말이야.”
“오 마이 갓! 제3의 석유파동이라도 일으키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박하송.
“박 대표, 그동안 구축한 라인, 이제 써먹을 때가 왔다. 월가에 소문을 흘려.”
“내용은?”
“독일은 더 이상 버티지 못 한다. 독일 마르크는 대폭락할 것이고, 결국 디폴트 상황까지 갈 것이다.”
“벌써 그렇게 생각하는 판인데?”
“아니, 긴가민가하는 놈들이 있을 거야. 쐐기를 박으라는 말이야. 진짜구나. 독일이 막장으로 처박히는구나. 독일 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 이렇게 확신하도록 만들어.”
“아직 회장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체 그림이 이해 안 돼.”
“이 판때기에 어떤 놈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장막을 쳐야 해. Winner take all. 이건 철저히 승자 독식의 룰이 적용되어야 하거든. 내가 다 먹는다.”
각기 나름대로의 계산으로 정신없이 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시혁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월가에 입성한 K 글로벌 USA의 대표이사실.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메리웨더의 펀드에 돈을 넣지 못해서 애를 끓는 상황이다.
펀드 회사의 자산은 돈이 아니다. 실적이다. 작년에도 메리웨더 펀드는 39%의 경이로운 수익율을 기록했다. 난놈은 난놈이다.
“죄송하지만 부회장님, 이 건은 도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제 펀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입니다. 회장님께서도 분명히 약속을 하셨어요. 제가 수익을 내는 한 간섭하지 않겠다고.”
“맞는 말입니다, 메리웨더 대표. 그런데… 회장님께서 그러셨어요. 리스크 제로를 추구하는 메리웨더 대표라면 이해할 것이라고.”
“…예?”
“오히려 롱 텀 캐피널 매니지먼트(LTCM) 펀드의 위상이 한결 더 높아질 찬스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도 하셨거든요.”
“리스크 제로, 펀드 위상 강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하하. 저도 회장님의 속마음을 다 알지 못합니다. 아직 메리웨더 대표는 전에 쓰던 사무실 한 번도 안 와 보셨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82층 전망은 진짜 멋있더군요.”
“…….”
“회장님은 약속대로 메리웨더 대표가 근무하는 곳에 오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가셔야죠.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월가를 대표하는 투자은행 JP모건 회장실.
“감을 못 잡겠어.”
“나도 그래.”
“그래도 독일은 유럽의 맹주야. 2차 대전 때 박살 났던 경제가 거의 회복했단 말이지.”
“하지만 그들도 이처럼 갑자기 벼락 맞듯 통일이 될 줄은 예상 못한 거 아닌가?”
“흠… 찝찝하면서도 살짝 발을 걸치고 싶은 건 왤까?”
“이봐, 로버트 모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누구나 돈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생각할 수 있어. 이해한다고. 100달러 넣어서 만 달러를 만들 수 있다면 최고지. 암! 그런데 그건 기적이 동반되야 하거든. 우리는 금융맨 아닌가? 나는 빠지겠네.”
“…털어놔 봐.”
“…….”
스피커폰을 눌러 다시 커피를 두 잔 가져오라 명한 로버트 모건은 으르릉거리듯 말을 이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해도 우리는 같은 뿌리, 시티그룹도 우리 JP모건도 지옥 같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태인 아닌가? 혼자 살겠다고 이를 부정하면 나중에 왕따되는 건 시간문제일세.”
“어허, 살벌한 소리 말게나. 낸들 100% 정확한 정보를 얻을 방법이 어디 있겠나?”
“그럼, 99%는 있다는 말이군.”
“……!”
“우리 유태인의 정신적 지주는 로스차일드 가문일세. 그 가문의 가장 큰 기둥이 독일에 있어. 이를 모른 채 무시했다간 전 유태인의 원성을 살 수 있는 일. 아는 한도 내에서 정보를 공유하세. JP모건이 시티그룹에게 빚을 진 것으로 하지.”
“…나도 팩트는 몰라. 다만, 마이다스 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거야.”
“킴! 그 마이다스 킴?”
“응, 바이겔 독일 재무장관을 만났다는 정보가 있어.”
“겨우? 목이 마른 독일 입장에서 킴에게 청탁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겨우가 아니니까 문제지. 킴은 바이겔 재무장관을 만난 후 바로 부시와 백악관에서 두 시간 넘게 밀담을 했다네.”
“……!”
“그래. 어쩌면 미국 정부가 움직일지도 몰라.”
“말이 안 되잖아? 그런데 시티그룹은 왜 빠진다는 거야? 이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두고.”
“로버트 모건, 자네는 미국을 믿나?”
“…….”
“미국에게 독일이 친구일까? 혹시 손톱 밑의 가시는 아닐까? 이번 기회에 그 가시를 빼려고 하지 않을까?”
“알아들었네. 그 정보의 출처는?”
비서가 새로 가져온 커피를 그제서야 한 모금 마시는 시티그룹 회장 페니 하일로.
“로버트 자네, 찌라시라는 말 들어 봤나?”
“찌라시? 어느 나라 말이야?”
“B판이라고 하지. BR(블랙 루머)이라 하기도 하고.”
“제길, 그따위 타블로이드(황색 언론)에서 얻은 정보를 믿고 그리 위세 등등했던 거야?”
“아냐, 로버트. 타블로이드는 정식으로 발행이라도 하잖아. 이건 아주 은밀히 거래되는 고급 정보를 말하는 걸세. 매달 비싼 구독료를 내는 고객들만 받아 볼 수 있어.”
“그래서? 그 찌라시에 어떤 정보가 있던가?”
“월가에서는 몇 달 전부터 이를 안 받아 보는 펀드 매니저는 없을 거야. 지금까지 찌라시에 실린 루머가 거의 맞았거든. 결론은 내가 말했던 대로 딱 하나야.”
“미국 정부가 이번 기회에 독일이라는 가시를 빼 버린다?”
“그래. 일본은 이미 충견을 만들었으니 걱정 없고, 남은 건 유럽을 길들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 독일의 위기를 더 증폭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거지.”
“…JP모건도 빠져야겠군. 상당히 설득력 있어.”
“빚은 나중에 받겠네, 로버트.”
“그… 찌라시, 어떻게 구독할 수 있나?”
텍사스 주 어빙의 엑슨모빌 대표이사실.
“이사회 임원들 전부 말입니까?”
“예. 열외는 없습니다.”
“대표님, 다른 일로 출장 가신 분도 있습니다만.”
“부모님 상을 당했거나 자식이 먼저 죽지 않은 한,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12시간 내에 공항에 도착하라고 통보하시오. 집에 가서 잡초나 뽑기 싫으면.”
“…죄송하지만, 전직 헨리 제리코 회장이 재판 중이라는 걸 틈타 대표님이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봐요, 비서실장. 맘대로 생각하시오. 내가 왜 당신을 그대로 유임시켰다고 봅니까? 헨리 제리코 회장 사람이란 걸 뻔히 알면서 말이오.”
“…….”
“나는 다른 건 안 봅니다. 내 가치는 스스로 증명할 자신이 있어요. 다만, 나를 믿고 임명해 준 총회장님의 명령을 거부할 자신은 없습니다.”
“이 지시가 그럼…….”
“오든 안 오든 자유지만, 내 장담하지요. 12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하지 않으면 그 임원은 석유업계에서 영원히 퇴출될 거요.”
“…….”
“세븐시스터즈가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갈 곳이 있을까? 아직도 헨리의 향수에 취해 있다면… 전하시오, 꿈깨라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또다시 전용기들이 뉴욕을 향해 떠올랐다. 전과 다른 점은 거의 만석이라는 것.
회장을 위시해서 변호사 그룹, 거기다 이사회 임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탑승했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 모든 판을 주도하는 사람은 한 명.
김시혁 외에는 조각난 퍼즐을 맞출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무한 자본을 향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