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20화 (120/150)

120화 진짜 가지고 싶은 건?

다우닝가 10번지. 영국 총리의 관저가 있는 곳을 그렇게 부른다. 여기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총리,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시오.”

“나도 월리엄 회장과 똑같은 생각이오.”

“월리엄 경, 귀하는 백작 작위를 받은 귀족입니다. 그리고 리처드 레드포드 회장, 당신도 명문가의 후손 아니오. 그런데 이토록 예의 없이 정부를 공격하면 안 됩니다.”

로열 더치 쉘의 회장 윌리엄 쉘던과 BP의 법인장 리처드 레드포드에게 단호하게 쏘아붙이는 존 메이저 총리.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실제 월리엄 쉘던은 귓밥을 파고 있다.

“묘하단 말이야. 왜 영국은 섬나라 근성을 버리지 못할까? 저 동양의 쥐새끼 일본과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명색이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영화는 다 어디로 시집보내고 이따위 겁쟁이 남자만 득실거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하아… 그만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숙고한 뒤 장관들과 논의토록 하겠습니다.”

파낸 귓밥을 손가락으로 돌돌 뭉치더니 튕기는 월리엄 회장. 존 메이저 총리는 기겁한 채 몸을 피했다. 하필 자신에게 날아왔던 것이다.

“총리, 왜 섬나라들이 갈라파고스가 되는지 아시오?”

“…….”

“일단 침략을 잘 안 당하거든. 험한 바다가 막아 주니까 안전해.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 바다 너머 세상의 흐름을 놓치고 말지. 그 대표적인 것이 2차 대전이었소.”

“…….”

“결국 나중에는 너희 따로, 우리 따로 이렇게 살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되는 거야. 슬픈 일이야. 섬나라 근성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도 그리될 거요.”

최종적으로 발화점이 된 독일 총리 공관.

처음 독일 공화국 수립 후 베를린이 수도였지만, 동독에 둘러 싸인 지역적 한계 때문에 본이 실질적 서독의 수도 역할을 해 왔다.

통일이 되었으니 다시 베를린으로 수도 이전을 추진할 생각이나 아직은 본의 샤움부르크 궁전에 총리 집무실이 있었다.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총리님.”

“얼마나 도와준답니까?”

“놀라지 마십시요. 자그마치 10조 달러랍니다, 10조 달러.”

“이… 미친! 나라를 통째로 다시 세우라는 말인가?”

“우리 입장에서 따질 게 뭐 있나요? 그저 고마울 뿐이죠.”

“조건은? 그냥 퍼 주지는 않겠지?”

“…저, 그래서 말입니다.”

“뭐야? 왜 말꼬리가 길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한국 속담이라며 마이다스 킴의 핵심 측근이 말했습니다.”

“답답한 놈이 와서 사정해라?”

“솔직히 우리가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니까요. 사정해서 된다면 백 번이라도 해야지 않겠습니까? 총리님,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그마저 등을 돌리면… 우리는 파산합니다.”

“진짜 엿같은 일이야. 우리 게르만 민족의 운명이 그까짓 동양인 손에 달렸다니.”

“마침 곧 부시의 취임식, 체면 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길! 제기랄! 제엔장!”

* * *

1993년 1월 20일, 조시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여 취임식을 하는 날이다.

미국은 11월에 선거를 치르고 다음 해 1월 20일에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전통을 고수해 왔다. 워낙 역사랄 것이 없는 미국이기에, 작은 것들조차 하나씩 하나씩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것들이 쌓여 역사가 되니까.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국회의사당 계단에 서서 선서를 한다. 먼저 부통령의 선서가 끝나면 정확히 12시에 새 대통령이 선서하는 방식이다.

부시는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었다. 부통령의 선서가 끝나고 초침이 12시에 닿았지만, 그는 국회의사당 광장에 앉아 있는 내외 귀빈들의 모습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전면 첫 줄에 앉아 있는 한 사람과 눈을 맞췄다.

그가 누구인지는 이제 모두 안다. 이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는 미국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짐작하고도 남을 사람.

김시혁이라는 이름 대신 마이다스 킴, 일명 골든 보이라고 불리는 킹 메이커.

혜성처럼 등장해 각국 정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제일 앞 줄에 앉아 조용히 미소 짓는 시혁과 몇 초간 눈을 맞춘 부시 대통령은 대법원장이 내미는 성경에 입을 맞추고 선서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4년간 세계 대통령으로서 직분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저 사내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처음 대권에 도전했을 때는 그럴 수 있다 생각했었다. 시혁이 내세운 네거티브 전략도 좋았지만, 워낙 두카키스가 뻘짓을 많이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 선거는 달랐다. 이리 보고 저리 재 봐도 이길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로스 페로는 그만큼 복병이었고, 암초였으며, 강적이었다. 민주당의 클린턴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로스 페로를 제압하기 위해… 그의 치부를 찾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지옥, 모가디슈까지 들어갔던 사내.

입장을 바꿔서 자기라면 할 수 있을까? 부시는 선서를 하면서도 시혁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신이여, 저를 도우소서!”

부시가 이 말을 마치면 선서는 끝난다. 이제 대통령 취임 연설이 시작된다. 이걸 마치면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국회의사당에서 백악관까지 행진을 하는 순서가 남는다. 군중들이 국가의 수장을 조금이라도 지켜볼 수 있도록 팬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부시는 계단을 내려와 곧장 시혁에게 걸어갔다.

“골든 보이라고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멋진 작명 센스야, 킴!”

“프레지던트, 오늘따라 더 멋있습니다.”

“자네 덕분일세. 내가 세월이 흘러 죽더라도 바바라와 내 아들을 부탁하네.”

“이 좋은 날, 무슨 말씀이십니까? 집안 대대로 장수하는 게 전통이지 않습니까?”

“껄껄걸! 그런가? 같이 걷지 않겠나? 날씨가 너무 화창하군그래.”

“프레지던트, 내방해 주신 각국 정상들이 기다립니다. 잠시 인사라도 나누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제서야 부시는 아차 했다는 듯, 첫 줄의 각국 정상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미 다 들어 버렸다. 소련 연방을 승계한 러시아 대통령도, 전통의 맹방 영국 총리도, 중국 주석을 대신해 참석한 총리도, 이탈리아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도 입을 삐죽거렸다.

특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한 사람.

통일 독일의 총리 헬무트 콜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잘 왔다. 안 왔으면 진짜 새 될 뻔했구나. 진짜였어. 당장의 위기를 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해야겠다. 앞으로 독일의 운명은 골든 보이 마이다스 킴의 손에 달렸어. 살 떨린다.

* * *

“워싱턴에서 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가 조금 바빴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특보님이 계신 뉴욕으로 와야지요. 만나 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다름입니다.”

“우선 통일을 축하드립니다. 같은 입장의 제 조국 생각을 하면 부럽습니다.”

“아! 한국도 북한과 같은 민족이니 조만간 우리처럼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솔직히 부러웠다. 비슷한 처지의 독일은 무슨 복을 타고 나서 저렇게 쉽게, 어이없도록 허무하게 통일을 하는데 우리는 그 장구한 세월,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까?

콜 총리의 말대로 조만간 하나가 되지 않는다. 시혁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고 있었으니까. 철천지원수처럼 서울 불바다를 언급하면서.

“운명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귀국의 통일을 보면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예, 특보님. 정말 느닷없이 닥친 통일이 좋기는 합니다만, 상황이 너무 녹록치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민족 특유의 근성과 서독 시절 축척한 과학기술 덕분에 빨리 극복할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독일은 소련의 지배를 받는 동독과 민주 자유 진영이 된 서독으로 양분되었다.

동베를린에는 소련군이 진주했으며, 서베를린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결국 동서 베를린장벽이 세워지면서 완전히 갈라지고 말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동서가 뭉치는 계기가 된 것이 실수와 오해에서 비록되었다는 것이다.

주변의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 민주주의로 갈아탈 무렵. 당시 동독의 공산당 지도부는 어쩔 수 없이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 완화’라는 법령을 만들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해외여행을 강력히 단속하다가 이를 조금 완화한다는 내용을 담은 개정 법률안이었다.

이를 동독 정부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내용을 약간 잘못 읽고 말았다. ‘동독 국민은 베를린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 출입소에서 출국할 수 있다.’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를 접한 기자가 하품을 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개정 법률안은 언제부터 시행됩니까?”

하필이면 대변인이 건네받은 서류에 언제부터 시행된다는 날짜 표기가 없었다. 대변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즉시, 지체없이.”

이때까지만 해도 외신 기자들은 ‘뭐야? 별거 아니잖아?’라고 생각했지만…….

유일하게 이탈리아의 일간 신문사 기자 한 명만 이 내용을 잘못 알아들었다. 독일어가 짧았던 그 기자는 ‘동독 정부가 베를린장벽을 즉시 철거한다.’로 해석한 것이다.

이탈리아 기자는 즉시 본사로 긴급 타전을 날렸다. 하지만 짬밥이 찬 본사의 데스크는 이를 비웃었다. ‘너 뻥치지 마, 미친 새꺄!’. 딱 이 수준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X발, 내 명예를 걸고 보증한다니까. 진짜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 철거 결정을 했다고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기사는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점점 살이 붙더니 기사의 내용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가짜가 진짜로 바뀐 것이다. 이 기사가 전 세계를 돌고 돌아 동독과 서독에 도착하는데 정확히 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순간 독일의 통일은 결정된 것이다.

그다음은 국민들이 알아서 했다.

손에 망치와 곡괭이를 들고 중장비까지 동원한 양쪽 국민들이 동시에 베를린장벽에 달라붙었다. 모인 군중들의 숫자는 국경 경비대에서 통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손을 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변인의 말실수와 무식한 이탈리아 기자의 오보, 거기에 가세한 군중심리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하룻밤만에 어처구니없게 동독과 서독의 국경은 무너졌다.

이를 바라보는 각국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영국은 결사 반대, 생사대적이었던 독일이 통일된다고? 다시 그 악몽을 겪으면 어떻게 하나? 내 시체를 밟고 넘어가라… 때려 죽어도 안돼!

당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총리는 서독 총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 악마의 군대로’라고 할 정도였다.

프랑스도, 폴란드도, 하다못해 통일의 주역이 되어 버렸던 기사를 써낸 이탈리아도 반대했다.

과거가 참 아팠거든.

옛날 독일이 오죽해야 말이지. 나치 휘하에서 유럽이 쑥대밭 되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모든 나라가 반대했다.

그런데, 어쩌라고?

이미 한 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동독과 서독은 신혼부부처럼 단꿈을 꾸고 있는데…….

우리 결혼할 거예요. 다시는 전처럼 여러 어른들 괴롭히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통일 독일 정부는 이탈리아 기자에게 최고 공훈 훈장을 수여했다. 그의 무식이 나라를 통일시켰으니까.

“특보님, 우연이지만 이미 통일을 이뤘습니다. 다만, 예상보다 너무 빨리 이뤄진 탓에 통일 비용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금 모두 외면하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솔직하게 털어놓는 헬무트 콜 총리.

감을 잡은 것이다. 이런 사내에게 잔머리 굴려 봐야 가슴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뭘 주실 수 있습니까?”

“……!”

알아야 답을 하지. 시혁의 노골적인 되물음에 콜 총리는 눈만 끔뻑거렸다. 소냐?

“국채는 원하는 만큼 인수해 드리겠습니다. 무한정으로요. 그럼 총리는, 아니 귀국은 저에게 뭘 주실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원하는 바를 말씀하시면 경청하겠습니다, 특보.”

“그래요? 뭐든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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