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21화 (121/150)

121화 오랜만의 귀국

메리웨더는 결국 해내고 말았다.

일개 펀드 매니저에 불과했던 그는 어느새 월가의 일진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역사가 유구한 투자은행들조차 그가 시키면 빵셔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백 원 주면서 빵하고 우유에 아이스크림까지 사 오라고 안 시키거든. 만 원짜리를 척 빼 주고 사 오라니까 다들 미친 듯이 그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이다. 무조건 남도록 만드는 그의 마술에 홀린 거지.

5%만 이익을 내도 대접받는 곳, 클릭 한 번에 몇 백만, 몇 천만 달러를 굴리는 곳, 월가.

백 달러의 5%는 오 달러에 불과하지만, 천만 달러라면? 일억 달러, 십억 달러의 5%는 상상을 초월한 금액이 된다.

그런데 자그마치 5년간 매년 40%를 넘나드는 수익율을 기록하는 그의 펀드에 발만 걸쳐도 돈벼락 아닌가? 제발 간택해 주소서… 돈? 투자금? 당신 원하는 만큼 줄께. 이런 상황이었다.

그런 메리웨더가 또 왕건이를 하나 물고 왔다는 소문에 월가의 모든 투자은행이 숨을 죽였다.

이번엔 어떤 펀드를 꾸리는데?

쉿! 괜히 따지다가 ‘너 가!’ 이럴까 봐 묻지도 않고 백지수표를 건네기 일쑤였다. 대충 보니 이번 건은 담보도 확실하단다. 더 좋을 수 없지.

그렇게 해냈던 것이다, 1조 달러라는 전무후무한 자금을.

그리고 이를 종돈으로 신청한 레버리지 금액 9조 달러가 하루 만에 FRB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10조 달러.

대충 한화로 1경(京)이다.

빛이 1초에 30만km를 간다. 그 빛이 천 년 동안 달려도 1경 km에 도달할 수 없다. 고려시대에 출발한 빛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무리 상상을 해도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돈의 단위, 1경……. 93년 당시 미국 전체 GDP를 살짝 넘는 돈이었다.

왜?

FRB가 미치지 않고서야 미국을 통째로 넘기는 짓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아는 이도 없었고 FRB도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다.

인류가 생긴 이래로 이런 금액의 등장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에게 이 금액의 사용 권한을 부여한 것도 처음.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다.

다만, 이 발표로 인해 전 세계 경제계가 요동칠 뿐이었다. 각국의 재무부는 해저 모래사장에 내려앉은 광어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저 무지막지한 자금이 어디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다.

만약에 직접 공격 대상이 된다면 쑥대밭이 아니라, 국가가 휘청거릴 수 있다. 그럴 경우 바로 손 들어야 한다. 항복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쓰나미가 해안가를 휩쓰는 정도가 아니라 온 나라를 덮친 거니까. 쫄딱 망한다. 뒈지는 것이다.

뉴욕이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스파이 천국이 되고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K 미르 그룹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금값으로 거래되는 상황이다. 메모 한 줄이라도 찾으면 즉각 본국으로 보내져 분석에 들어갔다.

“쿠퍼, 부탁이야. 자네에게 평생 쓸 돈을 줄 수도 있어.”

“안 돼. 그 돈 먹었다간 내 목이 뎅겅 짤려.”

“무슨 소리야? 아무도 몰라. 그리고 어차피 버리는 쓰레기 아닌가?”

“소용없을걸? 먼저 사무실에서 나오는 서류는 다 파쇄기를 거치고, 비닐 팩에 물을 부어서 완전히 곤죽을 만든 다음에 밖으로 배출된단 말이야. 그것도 중량을 달아서 내보내거든. 최종적으로 우리 같은 폐기 업체가 그 중량만큼 소각했는지 확인서까지 제출해야 해.”

“그러니까, 소각로로 들어가기 전에 그 곤죽이 된 쓰레기를 넘겨 달라는 말 아닌가? 분석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넘겨주기만 하면 돼. 그 무게에 해당하는 금값을 쳐 줌세.”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다.

“거기까지, 움직이지 마.”

“……!”

“병신아, 그만 좀 와라. 네가 몇 번째인지 알고는 있나? 숫자 세는 것도 지겹다.”

“…….”

“환기통으로 침투하는 거, 네가 처음 같아? 조용히 내려와, 벌집되기 전에.”

보안실로 끌려온 검은색으로 칭칭 감은 사람을 보면서 김보성은 하품을 했다.

“강 하사, 또냐? 얼굴에 뒤집어쓴 복면 벗겨 봐. 면상이나 보자.”

“팀장님, 이거 야시꾸리하지 말입니다.”

“복면 벗기라는데, 싸가지 없게 쪽바리 말을 씨부려? 한따까리 할 때가 되긴 했지. 암!”

“에이… 팀장님. ‘야시’는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고, ‘꾸리’는 실타래를 뜻하지 말입니다. 무식하기는.”

“너, 뒈질래? 이 새끼… 빌빌거리는 놈을 구제했더니만. 너, 개기냐?”

“아니지 말입니다. 제가 감히 하늘 같은 고참한테 개기면 죽지 말입니다.”

“그런데 왜 토를 달아?”

“…이번 침입자는 좀 다르지 말입니다.”

“……?”

“여자 같습니다. 가슴이 봉긋하고 궁뎅이가 빵빵한 것이 분명 여자지 말입니다.”

앗! 뜨거워라는 표정으로 한발 물러서는 김보성. 소문난 쑥맥이다. 무슨 귀신을 본 듯 팔의 소름을 비볐다.

“거, 저기, 그렇니까… 아이고, 모르겠다. 같이 가두면 문제가 생기겠네. 다른 방 없냐?”

“없지 말입니다. 방 두 개에 열 명 넘게 바글거리는데, 더 이상 어디에 가두란 말입니까?”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 그만 좀 들어오면 안 되나?”

그때, 또 한 명을 데리고 들어오는 구르카 대장 캄퐁. 에구에구… 저놈, 안 죽은 게 용하다. 얼마나 맞았는지 피투성이다.

“아이고, 또, 또? 이 새끼는 어디로 기어 들어왔는데?”

“지붕, 와이어 타고, 유리 깼다. 화났다. 그래도 안 죽여.”

대충 감 잡았다. 보나마나 며칠 전 83층을 임대한 놈 중 한 명이다. 요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공실이 없다.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올 틈을 찾느라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야! 이게 목숨은 붙어 있다만, 걸레를 만들어 오면 어떡해? 병원비만 더 들고 귀찮게시리.”

“우리 구르카 잠자는 방, 추워졌다. 유리 없다. 그래도 살렸다.”

미친놈, 하필이면 구르카가 묵고 있는 곳의 유리를 절단하고 기어들었구나. 매를 벌었어.

“어이! 어디 놈이냐? 유 컨츄리 웨얼이냐고, 새끼야.”

“…….”

“다 나온다. 너 말고 먼저 온 놈들도 그랬어. 펜치로 생어금니 몇 개 뽑으면 십팔 대 조상까지 다 말하게 되어 있거든… 아, 씨. 영어 속성으로 배울 방법이 없네. 하여튼 유, 컨츄리, 웨얼?”

“…한국말 조금 함미다. 나로 말하면 외교관 신분으로 신변 보장을 요청함이다.”

“너, 이 새끼… 쪽바리지? 혹시 재일 교포면 왼손, 그냥 일본 놈이면 오른손!”

“소데스까? 일본분임미다, 외교관 일본분.”

김보성의 웃는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캄퐁아, 너 K 타워 습격 사건 기억나지? 그때 그놈들이랑 같은 족속이다. 이 새끼는, 너희 숙소에 가둬라.”

캄퐁의 눈빛도 스산하게 변했다.

“보성, 보스가 안 죽이라고 했다. 그래서 숨만 쉬면 된다. 맞지?”

“응, 맞아. 너 한국말 진짜 많이 늘었네. 귀에 쏙쏙 들어온다. 내일 각국 대사관에서 사람이 오면, 이 새끼는 제일 마지막에 넘겨주자, 숨만 붙여서.”

하지만 정작 화들짝 놀랄 말이 뒤에서 나왔다.

“저… 저는 한국말 정말 잘해요.”

“…그쪽 분은 어디서 오셨는데?”

“러시아에서요.”

스스로 복면을 벗는 여자, 누가 봐도 한국 여자다.

“고려인 출신입니다. 저도 외교관 여권이 있어요.”

“끄응! 가지가지 한다.”

“저는 어디에 가둘 건데요?”

“뭘 가둬? 험한 꼴 보지 말고, 그냥 가쇼. 강 하사야, 같은 민족이란다. 입구까지 배웅해 드려라.”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강형규.

“어쩐지 찰떡같이 알아듣고 내려왔지 말입니다.”

“뭐라 했는데?”

“저도 영어 울렁증 때문에… 한국말로 했지 말입니다. 벌집되기 전에 내려오라고.”

“너, 너, 너, 진짜 큰일이다. 나처럼 유, 컨츄리. 훼얼? 이 정도도 안 돼? 그래가지고 미국 생활 어떻게 할래? 걱정이다, 이 자식아.”

“김 중사님, 훼얼 아 유 프럼? 이게 맞는 표현이지 말입니다.”

“…….”

여자도 거들었다.

“What is your nationality? 이렇게 해야 정상인데요? 두 분 다 틀렸어요.”

* * *

한국 대선은 원 역사대로 김양삼이 승리를 움켜쥐었다. 군부 정권에서 벗어나 32년 만에 탄생한 문민정부.

부시가 취임하고 한 달도 채 안 되어서 김양삼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린다. 비록 시혁이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까지 빠질 수는 없었다.

“프레지던트,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무슨 보고씩이나… 편하게 말해도 상관없네. 자네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희소식이면 제일 좋겠는데 말이야.]

“하하하. 뉴요커 중 저에게 눈길을 주는 미녀가 아직 없는 걸 보면 별로 매력이 없나 봅니다.”

[그거 농담이면 성공했어. 최근 들은 것 중에서 제일 웃겼거든. 지금 자네 손에 어떤 나라든 사 버릴 돈이 있고, 젊고 탄탄한 육체와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두뇌 그리고 각국 정상들이 자네 눈길 한번 받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 어허… 나 같으면 매일 다른 여자를 만나겠다.]

“부시가의 전통은 오직 한 여자에게 헌신하자… 저도 그 전통에 전염된 모양입니다.”

[그래, 자네도 반은 부시가 사람이지. 피만 섞이지 않았을 뿐… 그 말에 진한 감동을 느끼네. 나이가 들긴 했나 봐.]

“에이… 또 갑자기 센치해지십니까? 장수가 집안 내력인데.”

[껄껄걸… 그것도 맞아. 보고할 게 뭔가? 무엇이든 말하게나.]

“네, 프레지던트. 며칠 있으면 한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립니다. 잠시 다녀와야 겠습니다.”

[오! 그렇군, 가 봐야지. 알다시피 나도 가고 싶지만, 취임 한 달도 안 돼서 말이야. 부통령과 국무장관을 보냄세. 그 정도면 의전상 격이 맞을 거야. 자네가 에어포스 원을 타고 다녀와.]

“……!”

대통령이 탑승하면 에어포스 원, 다른 용도로 비행할 때는 공군 1호기라 부르는 미국 대통령 전용기. 보잉사의 747을 베이스로 개조한 VC-25비행기를 말한다. 한 대가 아니고 두 대로 쌍둥이다.

항상 비행할 때면 두 대가 동시에 뜬다.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한 페이크인 셈이다.

물론 대통령이 타는 순간, 어떤 비행기든 에어포스 원이라는 호출 부호를 쓴다. 설사 대통령 전용기라 해도 부통령이 사용한다면 에어포스 투로 바뀐다.

이 대통령 전용기를 내준다는 것.

그냥 옆집 아저씨가 타던 승용차를 빌려주는 것과 같을까?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아닙니다, 프레지던트. 제 전용기가 더 편합니다. 저는 기자단을 태울 필요도 없어서 겨우 50인승으로 개조했거든요. 훨씬 넓고 아늑합니다.”

[이 사람아, 그것도 농담이라면 성공했어. 자네 전용기는, 거… 뭔가? 체첸하고 구르카 경호원들 태워서 먼저 출발시키면 되지. 자넨 핵심 참모들과 에어포스 원으로 다녀와.]

폼 내라는 말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귀국길에 소홀히 대우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참 찐 사랑이다.

“오, 오, 오! 내가 드디어 에어포스 원을… 가문의 영광입니다, 보스.”

“방정 떨지 말고 좀 앉아. 저기 정복 입은 승무원들 보기 창피하잖아.”

“뭔 상관이래? 저기 침실 보셨어요? 회의실은? 기내에서 브리핑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네. 한마디로 쥑입니다, 보스.”

“하아… 산드라, 제발 좀.”

“그런데 우리 비행기보다 화장실이 좀 좁다. 일반석은 다른 이코노미랑 별 차이도 없고.”

“산드라, 그 찻잔 좀 꺼내 놓으면 안 될까?”

“원래 기념품으로 주는 거 아니었어요?”

“여기 호텔 아니거든? 그리고 호텔에서도 커피 잔을 기념품으로 주진 않잖아. 그냥 좋은 말 할 때 내려놔.”

“여기 대통령 문장이 떡하니 찍혀 있단 말예요. 엄마에게 자랑해야 하는데… 못 본 척해 주면 안 돼요?”

“아이고, 머리야. 나는 봐주고 싶은데, 저기 좀 볼래?”

공군 정복을 착용한 승무원들이 일제히 산드라를 향해 이글거리는 불꽃을 쏘고 있었다.

마치 테러범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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