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간신과 비선
“우리… 오늘 처음 만났소. 왜 이리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하는 거요? 내가 실수한 부분은 사과를 했잖소?”
“후우… 오늘따라 담배가 쓰네요.”
“…….”
“사랑에 이유가 있나요? 얼굴이 예뻐서, 몸매가 늘씬해서, 성격이 좋아서, 마음이 착해서… 이런 조건 때문에 사랑한다면 이상한 거죠. 그냥 좋아야 진짜 사랑 아니겠습니까?”
“…….”
“저도 그렇습니다. 그냥 싫어요. 거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젠장, 아무리 당신이 국제적인 거물이라 해도 말조심하시오. 굉장히 모욕적이야.”
“네. 말을 하고 보니 그렇군요. 간단합니다. 서로 마주치지 맙시다. 우리는 삶의 궤적이 너무 다릅니다.”
시혁은 진심이었다. 너무 싫었다. 이 사람의 앞으로의 행보를 아는데, 도저히 좋아하는 척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네가 주범이야.’ 할 수는 없잖아.
김형철도 시혁이 너무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이자 어쩔 줄 몰랐다. 처음 만남이 조금 어색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일 줄 몰랐던 것이다.
이때, 예상외의 반전이 일어났다.
시혁도 김형철도 몰랐던 반전.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들어서는 검정 양복. 익히 아는 경호원이다.
“김시혁 씨.”
“어! 상호 형.”
“죄송합니다, 지금은 임무 수행 중이라 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곧 대통령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김시혁 씨, 경호원들을 좀 물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태후의 경호 3과장이었던 이상호.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지인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이 바뀌면 다 물갈이를 하지만, 총잡이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김양삼 대통령을 모시면서 경호 1과장이 된 이상호.
그런데 몰골이… 엉망이다. 인어어도 귀에서 빠져 데롱거렸고, 상의가 군데군데 찟어진 흔적도 보였다.
또 열린 문으로 힐끔 보이는 광경.
아이고! 또 난리가 났었구나.
김보성은 숨을 헐떡이며 문에 기대고 있었고, 가장 가관인 건… 쿠크리를 움켜 쥔 구르카 요원들이 밖을 장악하고 있었다. 청와대 경호원들은 한쪽 구석으로 몰려 총을 겨눈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구르카나 김보성이 아닌데…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로테 호텔이 피바다가 될 것이다.
“그만! 김 비서 그리고 캄퐁, 길을 열어 줘. 대통령 방문이다.”
그제서야 한쪽으로 도열하는 김보성과 캄퐁을 비롯한 구르카 요원 다섯 명.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체첸 요원들까지 다 데리고 왔으면 벌써 로테 호텔이 무너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장내가 정리되자 십 분도 되지 않아 김양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입구에 살기 띤 모습으로 도열한 구르카 요원과 청와대 경호원의 대치를 보더니, 기가 막힌 모양이다.
“여기 대한민국 맞나?”
“어서 오십시오, 대통령 각하.”
“오! 김시혁, 이제 보네. 내일 출국한다캐서 급한 마음에 달려왔다.”
김형철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김양삼을 보더니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김양삼이 이런 얄팍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아, 아버지!”
“형철아, 니는 나가 있어라. 내가 김시혁 씨랑 쪼매 할 이야기가 있다.”
“아니, 어떻게 아시고…….”
“당장 안 나가나? 내가 그리 경고를 했건만, 바보 같은 놈.”
김형철은 김양삼 대통령의 등장에 이를 악물었지만, 쫓겨나듯 방을 나섰다. 치욕감에 몸서리를 치면서. 눈에 살기가 가득하다.
“시혁아, 이거 억수로(대단히) 미안타.”
“각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아니지, 비서실장이라는 공식 라인을 움직있다이가. 또 아들놈 잘못은 원래 아부지가 책임지는 기 갱상도 사나이다.”
그놈의 경상도, 전라도 타령. 이 좁은 반도에서, 그조차 지키지 못하고 절반으로 갈라진 섬나라에서 또 편을 나누는 그 말투… 참 거시기 합니다.
차라리 잃어버린 간도나 만주를 부르짖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실소가 나왔다.
“하여튼, 예기치 못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우리 이야기 쪼매 할 수 있겠나?”
“예, 저도 취임식에 못 가서 죄송한 참인데 잘됐습니다.”
“그래, 들었다. 백 할매, 돌아가싰다메? 내도 사실 조문 갔어야 하는데 하필 취임식하고 겹치가 고마 몬 갔다. 내하고도 인연이 꽤나 많다, 그 할매.”
“네, 두 분 관계는 할머니 생전에 많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편안히 손자 품에서 떠나셨습니다.”
“글나? 하여튼 니는 뭐가 그리 급해서 퍼뜩 나갈라카노?”
“미국에서 벌려 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요. 내일 아침에 갈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라도 뵙고 가니 다행입니다.”
취임하고 한 달 반, 많이 수척해졌다. 여전히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얼굴이 말한다. 나 힘들다고.
“시혁아, 우리 인연도 그렇네. 그때 마이 놀랐다. 노태후 면전에서 쿠데타가 주홍글씨로 따라댕기다가 결국 감옥에 갈 거라고… 그냥 국민만 보고 일하는 기 그나마 역사에 죄를 씻는 거라 캤제?”
“예, 기억납니다.”
“누가 대통령 앞에서 그리 말할 수 있겠노? 천하에 니 하나뿐일 끼다. 그런데 그 말이 내 가슴에 대못으로 남았다. 아나?”
“예……?”
“그동안 민주화를 목이 터지라 외치면서 여기까지 왔다. 내 나름대로는 평생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꼬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게 진짜인지, 아니면 권좌에 대한 욕심이었는지 헷깔리더라.”
“…….”
“내라믄 니 같이 할 수 있을까? 저 어린 친구도 하는 일인데, 와 못 하지? 쪽팔맀다, 솔직히.”
“…….”
“다들 3당 합당이 야합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저 늙은 놈이 대통령 한번 할라꼬 군바리랑 손을 잡았다며 비난했지. 다 맞다, 내 본심은 대통령을 꼭 하고 싶었다.”
“……!”
“그기 잘못된 기가? 정치판에 들어온 이상 최고 목표가 결국 대통령 아이가? 그기 잘못되었다 할 수 있냐 이 말이다. 내는 적어도 자신에게 떳떳하게 살고 싶다.”
그래, 시혁이 보기에도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된 후가 문제지.
“시혁아, 노태후하고 니하고 특별한 관계라는 거 알고 있다. 부탁하는데, 내한테도 노태후처럼 해 줄 수 없나? 내 면전에서 쫑코(창피)를 주도 괜찮다.”
“…….”
“괘안타, 내가 너무 답답해서 그렇다. 니는 마이 알잖아? 고마 서로 알고 있는 거 나눈다 생각하고 빡시게 들이받아 봐라.”
“주변에 많은 가신, 그분들 식견이 저보다 더 낫습니다. 그분들이 직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십시오. 거침없이 대통령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럼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가 기록할 겁니다.”
“그기 쉽지 않다. 타성에 젖었거든, 글마들도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니처럼 막 대놓고 내한테 쫑코 주기 어렵게 길이 들어삤다. 내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조언 좀 해 주라. 내가 뼈에 새기고 잊지 않을께.”
아닙니다.
당신은 가신들의 충언과 고언을 새겨듣지 않습니다, 그 아집과 자식에 대한 부정 때문에. 훌륭한 민주 투사들, 그분들이 그토록 김형철을 유학 보내자고 했건만.
시혁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렇게 나오는데……. 그렇다면, 직진이지. 돌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음, 쫄린다만… 그래도 듣고 싶다.”
“각하는 아마 퇴임하고도 돌아가실 때까지, 온전히 대한민국 대통령의 예우를 받는 유일한 분이 될 겁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흠, 글나? 좋은 말이네.”
“그렇다고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
“한 달 반이라는 기간 동안 하늘회라는 적폐 중의 적폐를 쳐 내셨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독재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가지셨던 대통령님이기에 할 수 있는 결단이었어요.”
“그런데?”
“아마 재임 중에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제 예측으로는 세계화를 구상할 것이고, 혼탁한 지하 자금 정리와 무질서한 금융 시스템을 손볼 것이고,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할 겁니다.”
여기까지 들은 김양삼은 ‘끙’ 하고 머릴 짚었다. 이놈은 대충 두드려 맞추는 박수무당 수준이 아니다. 고리타분한 학자의 예상 정도가 아니다. 거의 족집게 예언에 가깝다.
정녕 귀신이 아니면 속마음 깊숙이 꼭꼭 숨겨 둔 생각을 저토록 정확하게 집어낼 수 없다.
귀신인가?
“다 좋습니다. 훗날 역사는 이를 높게 평가할 것이고요. 그러나…….”
“이제 본론이 나오는 기네. 쫄깃쫄깃하다, 어서 해 봐라.”
“항상 외환 보유고를 직접 체크하십시오. 그리고 무리한 기업들의 문어발식 경영과 지나친 대출 위주의 사세 확장을 자제시키십시오.”
“그래, 다른 건?”
“비선을 쓰지 마십시오, 이게 만병의 근원이 됩니다.”
뜨끔한 표정,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비선이라… 대통령은 때로는 공적인 보고 라인보다 비선을 통해 밑바닥 민심을 가감없이 듣기도 한다. 그건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공무원은 임명직이건 정무직이건 영혼 없는 놈들 천지빼까리다. 이놈들은 나쁜 건 절대 보고를 안 해.”
“그래도 안 됩니다. 종기를 방치하면 온몸의 살이 썩습니다. 나중에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져서 암이 되면, 그때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암행어사를 와 두는데? 그것도 일종의 비선 아니겠나?”
“암행어사는 마패라도 줍니다. 비공식이되 공식 임명된 종기 제거 팀으로 봐야죠. 비선을 그와 비교하면 절대 안 됩니다.”
팽팽하다. 이 부분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제가 왜 이런 쓴소리를 드리는지, 재임 말이면 알게 됩니다. 권력이 분산되면, 정권이 흔들립니다. 간신과 아첨꾼들이 공식 라인을 통하려고 하겠습니까? 비선이 더 가깝고, 빠르고, 약빨이 바로 나오는 걸 알 텐데요?”
“끄응…….”
“이해합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민주화 투쟁 중 가장 가까운 동지가 아드님이라는 것. 야당 때는 그게 통했어요. 하지만, 투쟁과 통치는 완전히 상극입니다. 국가를 투쟁할 때의 방식으로 이끌면… 사달이 납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시혁아, 그건 내가 알아서 수위 조절을 하마. 하여튼 네 말은 내가 꼼꼼하게 머리속에 박아 두마.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충고 고맙데이.”
하아! 실패했다. 김양삼은 설득당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우물에 갇힌 사람이다. 아무리 간절히 말해도 결국 김형철을 소통령으로 만들어 나라를 혼란에 빠드릴 것이다.
시혁의 충고 중 자신에게 맞는 부분은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겠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완고하게 문을 닫아 걸었다.
이런 고집쟁이가 재임 중에 닥치는 그 불행을 막을 수 있을까? 그래도 막아야 하는데, 시혁의 시름이 깊어졌다.
* * *
“전에 미안했다.”
“상호 형, 뭘요?
“대통령을 모시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어.”
“뭘요?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는데,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그나저나, 살벌하더라. 막상 목숨을 걸고 붙으면 장담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예, 그나마 경호원들이 총을 안 쏴서 다행입니다. 그랬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저도 아찔해요. 하하하.”
“구르카… 말로만 들었지. 그리고 밖에 있던 수염 난 사람들도 보통이 아니던데?”
“체첸 전사들 말이군요. 총 한 자루만 있으면, 만부부당이죠. 전장에서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젠장, X나 쪽팔리네. 너를 만나고 나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물씬 든다. 저기 김보성? 저 친구도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더라, 대단해.”
“나중에 만나게 될 윌슨 경호실장을 보면 진짜 기겁할걸요?”
김포공항의 귀빈실.
청와대에서 공식 지시가 내려온 모양인지 시혁이 일반 출구를 통해 나가겠다 했지만, 다시 등장한 이상호 경호 1과장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더 우기면 여기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힘들어진다.
“참! 고맙습니다. 이현 변호사 출국 문제 도와주셔서.”
“뭘, 그까짓 것 가지고. 미국 비자가 없는데 괜찬… 겠구나. 너랑 같이 미국 대통령 공군 1호기를 타고 들어가는데.”
“상호 형, 청와대 생활이 힘들면 언제든 미국으로 오세요. 같이 할 일이 많습니다.”
“아니, 나는 여기에 뼈를 묻을 거야. 그게 내가 할 일이다. 나중에 나이 들어 퇴직하면 후진 양성이나 할 생각이다.”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지금은 이상호가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신분이 된 시혁.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가치는 신분으로 나뉠 수 없는 것이다. 시혁은 이상호와 깊은 포옹을 나누고 공군 1호기에 올랐다.
다시 시작되었다, 무한 자본을 향한 본격적인 발걸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