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고스톱 잘 쳐?
이현, 조금 특이한 삶을 살아온 변호사다.
소위 지잡대를 나왔다. 이현은 순정파였다. 고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일찍 결혼한 후, 고향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하반신을 못 쓰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여자였다. 그냥 이유 없이 처음 보는 순간부터 해맑게 웃는 얼굴만 가슴에 박혔다. 그 뒤로 이현은 아내의 휠체어를 밀면서 3년간 등‧하교를 같이 했다.
충분히 한국대 법학과를 갈 수 있는 성적을 받았지만, 이현은 그대로 고향의 지방대학에 입학했다. 둘 다 쌀 한 됫박 보탤 형편이 안 되는 고만고만한 집안. 이현과 아내는 대학교 1학년 때, 혼인신고만 하고 쪽방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나? 다행히 4년 전액 장학금이 나왔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아내는 집에서 온갖 부업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개천용이 의례 그렇듯 이현은 오로지 사법고시를 목표로 학교와 집을 오가며 법전을 끼고 살았다. 하루 3시간 이상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법고시는 이현에게 문을 쉽게 열어 주지 않았다. 1차만 세 번 합격, 번번이 2차에서 낙방하기를 반복했다. 총 6번 떨어졌다.
그럴 수밖에.
왜 명문대에서 고시를 싹쓸이할까?
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이쪽 세계도 일종의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유명한 교수의 수준 높은 강의, 학교의 뒷받침, 선배들의 대를 이어 내려오는 노하우, 현직에 진출한 동문들의 지원. 이런 것들이 지잡대에게 있을 턱이 있나. 모든 것이 허들이고 격차를 벌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졸업을 했지만, 여전히 이현은 좁은 골방 책상을 떠나지 못했다.
다른 길을 생각 안 한 것이 아니다. 슬쩍 신문의 구인란을 살피기도 했고, 교수들에게 취업 추천서를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완고한 아내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당신은 합격할 수 있다고, 생활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오로지 공부만 하라고.
사슴 같은 아내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이현은 엉덩이에 종기가 잡힐 정도로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이현은 드디어 7년 만에 1차와 2차를 연달아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갔다.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것이다.
또 하나의 개천용 신화 탄생, 그런 줄 알았다.
연수원 생활 중 아내는 주말에만 볼 수 있었지만 행복했다. 일단 5급 공무원에 준하는 급여가 나온다는 사실. 물론 여타 수당은 없지만 그래도 매달 돈이 들어온다는 게 이현 부부에겐 꿈 같은 일이었다.
그 사건만 없었다면…….
이현의 부인은 한 달 동안 작업한 청바지 지퍼를 잔뜩 휠체어에 매달고 집을 나섰다.
매달 통장에 꽂히는 월급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건만, 이현의 아내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소중한 남편의 월급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통장에 쌓았다.
곧 남편이 연수를 마치면 판사로 임용될 것이다. 이대로 조금만 더 모으면 남편의 부임지 근방에 전세라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그러나 보행자 신호를 보고 건널목으로 들어선 이현의 부인은… 급하게 우회전을 하던 차량에 치이고 말았다.
이현은 사법 연수원 수업 중에 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 갔으나, 병실로 안내된 게 아니라 지하 시신 보관소로 가야 했다. 아내는 현장에서 즉사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현에게 아내는 삶 그 자체요, 기둥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다니.
오열하는 이현에게 경찰은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조사 결과서를 내밀었다. 무단 횡단을 했다는 것, 그것도 건널목이 아니라 일반 도로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 아내는 평생 휠체어가 아니면 외출 자체가 불가능한 장애인. 절대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아니면 건너지 않는다.
너무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다. 의혹을 품은 이현은 현장 주변을 탐문했다.
역시 경찰의 조사와는 너무 상반되는 증거들이 나왔다. 목격자도 여럿 있었고, 특히 근처 상점주들의 증언을 들어 보건대, 아내를 친 운전자는 당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는 걸 확인했다.
이 증언을 토대로 이현은 즉시 경찰서에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현은 자신이 곧 판사로 임용될 사법 연수원생임을 밝혔으나… 사고를 낸 운전사의 신분이……. 현직 지검장!
결국 사건은 유야무야 묻히고 말았다, 몇 푼의 보험금과 함께. 지검장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실로 아내는 억울한 개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현은 절망했다. 세상에 대한 증오심만 가슴에 남았다. 지금껏 그토록 믿고 있었던 법과 정의는 힘과 권력 앞에 너무 무기력했다.
이게 나라냐? 이게 내가 그토록 추구하던 정의냐?
이현은 연수원에서 남은 6개월을 멍한 상태로 보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판사 임용? 이 증오심을 가진 채로 정의의 법봉을 두드릴 자신이 없었다.
이현은 연수원 교수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이현은 막변(연수원을 마치고 바로 변호사가 된 사람)이 되었고, 당연히 그에게는 의뢰인이 없었다. 서른도 안 된 젊은 변호사, 판사 경력이나 검사 경력 하나도 없는 막변… 누가 이런 변호사에게 돈을 지불하며 변호를 맡길까?
이현은 개의치 않았다. 바로 장애인 단체를 찾아가 책상 하나만 빌려 무료 변론을 하기 시작했다. 숙식은 사무실에서 해결했다.
아내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둔 월급을 쪼개고 또 쪼개서 최소한의 먹는 것 외에는 쓰지 않고 버텼다. 매일 밤, 아내가 그리워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때 만난 허름한 차림의 할머니. 이 할머니는 한 번 올 때마다 거액을 기부하는 천사 같은 분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말 한마디 없이 오고 가던 그 할머니가 어느 날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이 변호사, 수구레 국밥 먹으러 갈까?”
“괜찮습니다, 할머니. 저는 김밥 한 줄 사 왔습니다.”
“그래? 배고픈데, 절반 나눠 줄 테야?”
“예……?”
“반만 할미 달라고, 안 돼?”
“아이고, 아닙니다. 할머니. 다 드셔도 됩니다.”
“자네는?”
“저야… 나중에 또 한 줄 사 먹으면 되죠. 드세요.”
“지금 통장에 겨우 몇만 원 남은 주제에, 그 돈 다 떨어지면 뭐 먹고 살려고?”
“예……?”
“노가다는 아무나 할 것 같지? 그것도 해 본 사람이 하는 거야. 이 변호사처럼 공부만 하던 사람은 반나절도 못 버텨.”
“…….”
“길 건너 보람은행 지점장이 자네 대학 선배라며? 정확히 사만구천 원 남았더군. 재킷도 사철 한 벌, 와이셔츠 목깃이 다 헤진 걸 보니 그것도 한 벌, 넥타이는 그나마 두 개로 돌려 매고, 구두 뒷굽은 더 수리할 수 없을 정도에다, 슬리퍼 사이로 구멍 난 양말 꼬라지 하고는… 쯧쯧!”
조금 창피했던 이현은 할머니의 거침없는 말투에 반발심이 생겨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할머니,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많이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또 거기에 맞춰 살면 됩니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불편할 뿐이죠. 저는 지금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러나, 대뜸 호통을 치는 할머니.
“시끄럽다, 자기 자신도 건사하지 못 하는 놈이 무슨 봉사를 한다고… 우선 자신이다. 아무리 세상을 향해 잘 살고 있다고, 나는 행복하다고,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해 본 들 누가 알아주더냐?”
“…….”
“이 건물, 내 거다. 마침 위층 계약 기간이 끝났으니, 거기 네 이름으로 된 변호사 간판을 걸어라. 지금까지 하던 무료 변론을 계속하되, 내 잡다한 일도 같이 맡아라.”
“…왜?”
“몇 년을 그냥 지켜봤다. 네놈 통장에서 매달 빠져나가는 잔고를 보면서. 오래 버티더구나. 그래도 네놈 정도라면, 최소한 도둑질은 안 할 것 같으니 됐다.”
“할머니.”
“내가 돈이 주체 못할 정도로 많아. 그래선지 주위에 온통 도둑놈 천지다. 어떡하든 나를 이용해 한탕 하려는 놈, 투자를 미끼로 사기 치려는 놈, 주가 조작으로 다른 이 주머니 털려는 놈… 다 쳐 죽일 놈들뿐이다. 네가 지켜라, 지금부터.”
* * *
“이현 변호사님.”
“아! 예, 박하송 대표님.”
“에이… 새삼스럽게, 그냥 ‘하송아’라고 부르세요. 할머니가 20년 동안 다 맡겼던 분이 있는 줄 몰랐어요. 치사하게 그런 것까지 숨기고… 히히히.”
“이해하세요. 워낙 조심스러운 성품이셨습니다.”
“아뇨, 변호사님이 미리 노출되었다면, 이렇게 만나 뵙지 못했을 수도 있었죠. 그냥 할머니가 그리워서 애교 부린 겁니다.”
하송의 애잔한 말이 끝나고 시혁도 이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유언장 집행이 끝나고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달랑 가방 하나 집어 들고 따라 나선 괴짜 변호사.
“이 변호사님 덕분에 잘 처리했습니다. 할머니도 좋은 곳에서 편히 쉴 겁니다.”
“네, 저도 회장님 전화를 받기 전까진 돌아가신 것조차 몰랐습니다.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제가 제대로 뜻을 받들었는지 걱정됩니다.”
“아닙니다, 이 변호사님. 너무 깔끔하게 정리되어 놀랐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 유언장은 언제 쓰셨데요?”
“제가 사무실을 열고 처음으로 받은 의뢰가 그 유언장이었습니다.”
“그럼, 20년 전?”
“예, 그때 손자에게 10퍼센트를 남긴다고 작성한 이래로 한 번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유언은 간단했다. 모든 재산의 90%를 다섯 개 재단과 열 개의 시민 사회단체에 기부한다. 10%는 손자 박하송에게 남긴다.
그리고.
따로 시혁에게 남긴 게 전부였다.
이건 최근에 추가로 작성된 것이다. 시혁은 그 서류를 넘겨받고 또 목까지 넘어오는 먹먹함을 삼켜야 했다.
수구레 국밥을 사 들고 가서 사정을 했지만, 넘겨 주지 않았던 동방보험의 BW(신주 인수권부 전환사채). 이를 삼송생명이 승계했으니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귀물이다. 자그마치 전체 발행 주식의 30%.
그리고 또 하나, 용인 자연공원의 30%에 해당하는 주권도 있었다. 그 땅을 삼송에 넘겨주면서 토지 대금 대신 확보한 것이다.
하아… 한동안 잊고 살았던 삼송.
백 할머니가 시혁에게 넘겨준 것이 뭔지 알아? 삼송그룹의 전체 지배 구조에서 가장 최상층에 있는 회사들이잖아. 이건 그냥 폭탄이 아니거든.
여기에 삼송물산만 더 얹으면… 누가 진정한 주인일까?
너희들 어쩔래? 진짜 X된 거야.
“이 변호사님.”
“아, 네. 회장님.”
“하송이처럼 저도 편하게 대해 주세요. 할머니가 너무 큰 선물을 주고 가셨네요.”
“회장님, 저는 할머니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평소에 그러셨습니다. 저 같은 촌 놈의 가치를 알아 줄 사람은 김시혁 회장님이라고… 당신 사후에는 무조건 몸을 의탁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도 선뜻 따라나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오히려 거두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예, 영어를 잘하시니 한국 내 자산뿐 아니라 그룹의 법무 총괄을 맡아 주세요. 산드라는 비서실장 역할만으로도 정신없거든요.”
그때 슬그머니 다가와 이현의 손을 이끄는 사람.
“이 변호사, 이 비행기 끝내주지?”
“네, 공사홍 부회장님.”
“저기 회의실도 굉장히 좋아, 구경하러 갈까?”
“…네, 저야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처음 타 보니 눈이 돌아갈 지경입니다.”
“그래, 곧 익숙해질 거야. 이 공군 1호기 말고 먼저 출발한 우리 그룹 전용기는 더 좋아. 여기는 아무래도 사무적인 공간이 많지만, 거기는 오만 국왕이 돈을 처발랐거든.”
“네, 나중에 태워 주시면…….”
그래, 이렇게 한 몸이 되는 거다. 시혁은 공사홍 삼촌이 고마웠다. 뒤늦게 합류한 이현을 알아서 챙기는구나. 마침 나이도 삼촌이 5년 위, 저렇게 서로 알아가면서 비빔밥이 되는 거다.
하아! 시혁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속삭이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더 좋았을걸… 시혁의 청력은 한계를 초월한 상태라는 걸 공사홍 삼촌은 모른다.
“이 변, 혹시 고스톱 치나?”
“그냥, 짝 맞추는 정도밖에 모르는데요.”
“그래? 미국까지 먼 길인데, 내가 가르쳐 주지.”
“…….”
“산드라, 윌슨, 박하송, 나까지 네 명이 멤버일세. 그런데 박하송은 자격을 상실했어. 거지가 됐거든.”
“저, 이번에 상속받은 것만 해도 누만금일 텐데요.”
“응, 그거 사정이 있어. 걔, 거지야.”
“…….”
“인생 역전 안 하고 싶나? 내가 끼워 줌세.”
아이고… 삼촌. 또 새로운 먹이감을 찿으셨구나. 제발 순진한 이 변호사에게 신체 포기 각서는 안 받았으면 좋겠다.
무섭다. 삼촌의 진짜 정체가 뭔지 당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