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26화 (126/150)

126화 EU 받고 유로 내놔

싸늘하다.

12개국 정상들이 모였건만,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헛기침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뿐, 누구도 마이크를 당기지 않는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사람.

시혁이다.

미국 대통령의 특보가 아닌 특사 자격으로 참석했고 그 역시 말이 없었다. 어떤 설전이라도 벌어져야 조정자로서 발언 기회를 잡겠는데… 이건 불구대천 원수의 모임 같은 분위기. 냉랭하다 못해 손에 총을 쥐어 주면 거침없이 갈길 것 같았다.

이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 이번 회의의 주재국이고 의장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험, 험. 지금껏 수많은 날을 서로 고민하고, 협의한 결과 EEC(유럽경제공동체)를 거쳐 EC(유럽공동체)까지 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 둔 상황. 서로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말이 없다. 반대하는 건 맞는데 앞장서서 돌을 맞기는 싫은 것이다.

“자! 여러 정상이 어렵게 모인 자리입니다. 이리 주저들 하시니 난감하군요. 그렇다면, 이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미국 특사 마이다스 킴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어서 순서대로 발언을 듣겠습니다. 마이다스 킴,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게 물꼬를 트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로서는 기다리던 일.

“존 메이저 총리님, 발언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유럽 정상 여러분께도 인사드립니다. 미합중국 대통령께서 오셔야 할 자리지만, 취임한 지 얼마되지 않은 관계로 대신 참석한 특사, 마이다스 킴입니다.”

대부분 떨떠름한 표정. 그 가운데 일부는 은근히 눈을 맞춘다. 어서 포문을 열라는 뜻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지.

“유럽은 유구한 인류사 이래로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보자면, 불행한 과거사가 있었습니다. 지워 버리고 싶은 과거지만, 나치 독일이 전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

“그 독일이 삼 년 전 전격적으로 통일을 이뤘습니다. 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저라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아프게 맞았으니까요.”

“…….”

“여러분, 그 사건은 과거입니다. 또 그 사건의 당사국 독일은 끊임없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피해 복구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나 잘못을 합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시인하는 건 또 다른 사항입니다. 그렇다 해도 피해 당사국 입장에서 본다면 쉽게 용서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입니다.”

“…….”

충분히 뜸을 들였다. 이제부터… 진짜 내 시간이다.

“그래서 어쩔 겁니까?”

“……!”

“밉다고, 증오심만 가지고 계속 안 보실 겁니까? 그럴 수 있습니까? 싫으니까 이사 가실 건가요?”

당황한 영국 총리.

“저, 저, 마이다스 킴 특사, 말씀이 너무 절제되지 않았습니다.”

응, 알아. 너희들의 같잖은 유럽식 신사인 척하다가는 날밤을 까도 결과가 안 나오니까. 시혁은 못 들었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땅이 옮겨집니까? 이웃이 싫을 경우 이사 가면 되지만, 국가가 그럴 수 있나요? 결국 싫어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안 보고 살겠다 고개를 돌리고 있군요. 네, 그것도 한 방법이긴 합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러분이 그토록 고개를 돌리는 이웃이 지금 망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냥 서독으로만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의도치 않게 동독과 통일을 이루면서 만신창이가 되고 있어요.”

“…….”

“망하면? 이대로 통일 독일이 디폴트라도 선언하면? 혼자 죽습니까? 통일되기 전 서독의 경제력은 유럽에서 발군이었습니다. 싫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교역 대상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었어요. 틱틱틱! 도미노 아시죠? 그렇게 모두 쓰러집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리는 시혁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마이크를 당기는 덴마크 총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래서 당신이 참석한 것 아니오? 미국 FRB가 막대한 자금을 승인했고, 그 돈으로 독일 국채를 사 주기로 한 거 아니오? 마이다스 킴, 당신은 그 돈의 전권을 쥐고 있고… 그렇지 않소?”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겠냐? 그런데 세상은 너희들 마음먹은 대로 말랑말랑하지 않아.

“왜요? 제가 구세군입니까? 제가 있는 뉴욕에서 여기 영국까지 6시간 13분 걸렸습니다. 돈을 그냥 퍼 주러 그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다면 너무 순진한 말씀 아닌가요?”

“그건 독일과 협의할 문제이지, 우리 유럽 전체의 문제는 아니오.”

“아뇨, 절대… 저는 유럽 전체의 하나된 동의가 없다면 단 한 푼도 독일 국채를 매입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

“미합중국의 자산을 왜 이 먼 거리에 있는 독일을 돕는 데 씁니까? 아무 대가도 없다면, 왜요?”

충격이 큰 모양이다.

응, 내가 그래. 돌직구는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맞추거든. 많이 아플 거야.

“…그 대가란 게 뭡니까? 우리 모두 연대해서 보증을 서라는 말이면 단호히 거부합니다.”

“보증 설 만큼 여력은 있고요?”

“……!”

“선진국이라 하나, 몇 개 나라를 빼고는 경제 규모가 서독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나라들 보증을 왜 받습니까? 어디 쓰시려고요? 덴마크 총리님의 말씀이 조크였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유머 감각이 없어서요.”

이제 더 덤빌 놈이 없다. 조개도 저처럼 굳게 입을 다물지 못 할 것이다.

“독일이 죽으면 여러분도 다 죽습니다. 아마 10년 내 유럽이 세계 무대에서 큰소리치지 못할 겁니다. 일본의 뒤를 따라갈 확률이 100%라고 장담하죠.”

“…….”

이번에는 프랑스의 카르노 대통령이 마이크를 당겼다. 입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킴 특사의 협박은 충분히 먹혔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아요. 다만, 독일이 과거의 망령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확신과 특사가 진짜로 바라는 바가 뭔지 궁금하오.”

구렁이 같으니. 토탈 에너지 루이 자그레브 회장의 협박이 더 살벌했을 터인데. 슬쩍 명분 쌓기를 하다니.

“독일은, 다시는 과거 나치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왜 있습니까? 단순히 소련의 위협에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실상은 군비를 적절히 조절하고, 독일이 재무장하는 것을 막기 위함 아니던가요? 이를 강화하면 됩니다. 여러분께서 서로 감시하면 되겠네요.”

“좋습니다. 그럼 특사는 막대한 자본을 왜 만들었습니까? 미국 정부가 승인을 했지만, 실상은 특보 개인에게 집행 가능한 권한을 줬지 않습니까?”

“예, 지루한 과정을 생략하게 해 줘서 감사드립니다. 서독이 통일을 대비해서 비축한 자금, 다 해 봐야 1조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지금쯤 눈 녹듯 없어졌겠군요. 앞으로 얼마가 더 있어야 할까요? 우선, 이 대답을 독일 총리께서 해 주셔야겠습니다.”

맞다. 이 대답은 독일이 해야 마땅하다. 모두의 눈이 입에 꿀을 바른 듯 말이 없는 헬무트 콜 총리에게로 돌아갔다.

“예, 저는 뉴욕에서 킴 특사를 만났을 때 대략적인 금액을 말씀드렸던 바 있습니다. 너무 급작스러운 통일이었고, 동독의 재건을 위해서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특사의 말처럼 비축된 1조 달러는 거의 소진되었습니다.”

“…….”

“솔직히 완전한 통일과 동독의 재건을 위해서 2조 달러는 더 있어야 한다는 판단입니다.”

여기에서 모두의 머리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마이다스 킴이 쥐고 있는 자금은 10조 달러(1경)로 알고 있다.

왜?

그 정도 계산을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닐 터인데… 왜?

“존 메이저 의장님, 이제 다시 제 조건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예, 특사의 시원한 답을 모두가 기다리는 중입니다. 말씀하시죠.”

시혁은 얼굴 표정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여기가 승부처다!

“여러 유럽 정상 여러분, 저는 알다시피 10조 달러의 자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들으셨지만, 독일 통일 재건 비용은 2조 달러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 자금의 용처가 궁금할 것입니다.”

“꿀꺽!”

구석구석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저 감당 안 되는 놈이 어떤 폭탄을 던질지, 사뭇 떨리는 것이다.

“우선 지금의 EC(유럽공동체)에서 한발 더 나아간 EU(유럽연합)의 발족을 원합니다.”

“……!”

“다들 하고 싶어 하면서도, 독일의 지난 과오 때문에 차마 뭉치지 못하는 상황, 잘 알고 있습니다. 기회 아닌가요? 이미 독일은 여러분을 다시는 괴롭히지 못할 위기에 봉착했어요. 이빨이 몽창 빠졌습니다. 그럼 된 거죠.”

“…….”

“그다음!”

이게 진짜다. 지금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정말 두렵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EU라는 연합이 탄생하려면 무엇보다 각국의 화폐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화폐, 즉 단일화된 화폐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유럽연합이 완성되는 것이죠.”

“…….”

“그 EU에서 사용하게 될 공용 화폐, 즉 유로(Euro)를 발행하게 될 유럽 중앙은행은 필수적으로 창설되어야 합니다.”

“그만!”

벌떡 일어서는 폴란드 대통령과 네델란드 총리.

둘만이 아니었다. 스웨덴도, 스페인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 책상을 내려치고 난리가 아니었다. 시혁의 말을 더 들었다가는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던 것이다.

저… 악마는 지금 유럽의 모든 돈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독일 통일 채권 2조 달러를 매입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8조 달러를 가지고 유럽 중앙은행의 모든 권한을 가지겠다는 말이 아닌가?

유럽 정상들의 눈빛은 흡사 생사대적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시혁을 향했다.

“어? 더 안 들어도 다 이해들 하셨습니까? 다행입니다. 구구절절 설명 안 해도 되니… 하하하하.”

쳐 죽일 놈! 삶아 죽일 놈! 튀겨 죽일 놈!

결국 그게 목적이었구나. EU로 모든 나라가 한 몸이 되면, 마지막 공용 화폐의 통합은 무조건이다. 절대적인 것이다. 그걸 한 손에 쥐고 흔들려는 수작인 것이지.

그리되면 여기 있는 12개국과 앞으로 얼마나 더 가입할 지 모를 모든 유럽의 경제는 저자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좌향좌!’ 하면 왼쪽으로, ‘우향우!’ 하면 오른쪽으로.

악마 같은 놈이다.

그런데,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 더 문제……. 이를 거부하면 저 악마는 돈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그리되면 독일이 먼저 무너지고, 지금껏 서독의 첨단 기술을 통해 지탱해 온 유럽권 모든 나라가 연쇄적으로 절단 난다.

“이거, 제 말이 조금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부디 잘 상의하셔서 좋은 결과를 도출하시길 바랍니다. 서로서로 돕고 사는 거죠. 그게 미합중국의 우방에 대한 선의 아니겠습니까?”

“특사!”

“네, 나머지 문제는 내부에서 토론하시죠. 저는 어차피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언제든 의견 통일이 이뤄지면 연락 주십시오. 그럼…….”

단호히 등을 돌린 시혁.

선택은 내 몫이 아니다. 저들이 스스로 해야 한다. 저들은 아직 급속하게 93년 올해 말부터 세계경제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모른다.

이른바 IT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해인 것이다. 이 자금을 수혈받지 않아도 독일은 견뎌 낸다. 대단한 뚝심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 되어 유럽연합의 중심 국가가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극심한 공포와 눈앞에 닥친 위기 의식으로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화닥닥거리는 것이다. 공포는 세상 어떤 것보다 전염력이 강하다.

시혁은 다우닝가 10번지 회의실을 나서면서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세 곳 모두 똑같은 내용을.

이 메시지를 받은 이들은 또 각기 자국의 총리나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권유라고 읽고 협박이라고 생각할 그런 메시지를.

“회장님, 표정이 밝으십니다. 회의가 만족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윌슨, 김보성 비서, 영국에는 한국 식당 없나? 얼큰한 찌개에 소주 한잔하고 싶은데 말이야. 참 먹을 것 없어, 이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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