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유로를 한 손에
“소문대로 미친놈이오. 거론할 가치도 없소이다.”
“당장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저놈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대해 항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유럽이 똘똘 뭉치면 미국인들 도리가 없어요. 이럴 때 강력하게 우리가 단합해서 힘을 보여 줘야 해요. 다시는 저런 놈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완전 미친놈이요. 유럽연합을 만들되 화폐 발행권, 유통권을 한 손에 쥐겠다는 발상을 할 줄이야……. 미쳤어, 진짜 미쳤어.”
한결같이 성토 일색이다. 여기서 괜히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커피 잔과 재떨이가 날아올 판이다.
그러나 낙엽과 바위의 차이.
낙엽은 바람이 한번 휘몰아치면 이리저리 날릴 수밖에 없다. 반면 바위는 꼼짝하지 않는다. 의지의 문제다.
이미 바위들은 똘똘 뭉쳐 있었다.
“자, 자, 너무 감정에 치우치지 마시고, 우리 유럽의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우선 당사국인 독일 총리의 말씀을 한번 들어 봅시다.”
“…일단, 저희 통일 독일로 인해 유럽의 여러 국가에 피해를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 당신들이 초래한 일 아니오?”
독일 헬무트 콜 총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친 말을 쏟아 내는 폴란드 대통령. 앙금이 깊고도 깊다.
“거, 참 말을 끊지 말고 들어 봅시다. 개인적인 감정은 나중에 충분히 푸시고, 지금은 위기 상황 아니오?”
“맞소이다. 다 죽자는 게 아닌 바에야 현실적으로 대안을 마련해야지요. 폴란드 대통령은 좀 진정하시오. 폴란드가 이 상황을 풀 자신 없으면 나서지 마시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동시에 폴란드 대통령의 성급하게 말꼬리를 잡는 행동을 성토하자, 장내에 이상한 기류가 확 번졌다.
이것 봐라?
유럽의 각국 정상이 모였다고 하지만, 실제 4강에 속하는 프랑스, 이탈리아가 독일 편을 들어?
일단 들어 보자는 말은 독일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지.
“의장의 권한으로 독일 총리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기를 권고합니다. 폴란드 대통령께서는 잠시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총리도?
그럼 독일을 포함한 4강은 말을 맞췄다는 이야기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예, 의장님. 감사합니다. 짧게 저희 독일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세계경제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독일의 상황이 그때까지 버틸 수 없다는 겁니다. 당장 발등의 불을 끄려면 마이다스 킴의 자금은 필수적입니다.”
“…….”
“그리고 여러분이 걱정하는 독일의 재무장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나토는 군사동맹입니다. 지금 소련 연방이 무너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독일은 나토의 일원으로 적절한 무장만 할 뿐, 더 이상 군비를 늘리지 않을 것입니다.”
“…….”
“남은 것은 ‘유럽연합이 발족할 것이냐?’ 하는 것과 ‘마이다스 킴이 제시한 유럽 중앙은행의 유로 발행권을 넘겨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건 우리 모두 중지를 모아야 할 일, 독일은 그저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진솔한 독일 총리의 말이 끝났다. 자신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한때 유럽을 넘어 소련, 미국과 맞짱을 떴던 독일의 현실은 처량한 거지 꼴이다. 뭘 더 숨기랴?
폴란드 대통령도, 네델란드 총리도, 다른 여타 국가의 정상들도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뱉어 냈다.
저렇게 납작 엎드리면, 사실 민망하지.
“자, 이번에는 프랑스 대통령… 발언하시겠습니까?”
“네, 기다렸습니다.”
“제한 시간 같은 건 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여러분, 저도 여러분 못지않게 독일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예요. 지금 헬무트 콜 총리의 선한 독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상을 정확히 합시다. 이전 독일과 지금 독일.”
“…….”
“그리고 현실을 직시합시다. 여기 모든 나라 중 독일과 교역하지 않고 자생할 수 있는 나라 있습니까? 저는 자신 없어요. 그만큼 독일 경제는 전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이를 포기하겠습니까? 일본의 버블 붕괴가 우리에게 닥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
“논의된 첫 번째 주제, 유럽연합… 합시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골라야죠.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어쩌면 이게 차선이라 봅니다.”
세다. 첫 발언치고는 너무 강했다, 반발할 수 없을 만큼.
“다음 이태리 총리님, 발언하시겠습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 준다.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게 낙엽과 다른 바위의 위력이다.
“우리는 달의 뒷면을 보지 못합니다. 앞면만 보고 살죠. 우리 유럽이 항상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미합중국도 밝은 면만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미합중국의 어두운 면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국제 관계에서 그냥 공짜로 무한정 퍼 줄 나라는 없다는 말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거꾸로 여러분 같으면 하실 수 있습니까?”
“…….”
“우리는 사상 초유의 파산 위기에 처해 있어요. 독일이 무너지면… 수긍하기 싫지만 마이다스 킴의 말대로, 도미노처럼… ‘틱, 틱’ 다 넘어갑니다.”
“…….”
“다 죽어요.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지고, 국민들은 아우성치겠죠. 그 원성…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게 치명타.
정치인의 숙명이다. 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민심이 요동치는 것이다.
“여러분, 솔직해집시다. 계속 달의 밝은 면만 보면서 정신 승리 하다가 시위대의 돌팔매를 맞을 것인지… 아니면 달의 뒷면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리를 보전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마이다스 킴의 손을 잡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사정하겠습니다. 제발 손을 놓지 말라고.”
고요하다. 침묵에 잠긴 회의실. 회의 시간이 길어지고 주제가 벽에 막히자, 담배를 꺼내 무는 정상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짜증을 낼 수 없었다. 담배를 30년간 끊었다는 폴란드 대통령도 담배를 하나 얻어 피우는 상황이다.
길고 긴 침묵, 자욱한 담배 연기,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는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독일 총리, 이탈리아 총리, 프랑스 대통령이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험, 험, 험… 여러분,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마이다스 킴은 더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떠나 버리면, 우리가 지금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다 끝이죠. 끝! 디 엔드!”
“의장님 말이 맞습니다. 지금 포크를 들고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예요. 손으로 먹을 수 없는 뜨거운 음식, 포크가 없어요, 우리에게는.”
“그렇소이다. 그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정해야 할 판 아닙니까?”
“동의합니다. 그를 부릅시다.”
승부가 났다.
독일은 차마 나서지 못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작당한 이상 낙엽들이 이 상황을 뒤집기란 불가능하다. 그냥 바위가 아니라 유럽 4강 아닌가?
유럽에서 제일 힘이 쎈 4대 강국이 일제히 동의한다면?
끝난 거지.
“그래도 모르니 다수결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는 요식 행위였다. 작은 소국이 반대해 봤자, 대세에 지장이 있을까? 네델란드 총리도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쪽팔리게.
“좋습니다. 이제 킴을 불러 다시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서라.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가더냐? 비서실장의 전언을 들은 영국 총리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의장, 뭐하는 거요? 표정이 왜 그런 거요?”
“…미안하지만 여러분, 내일까지 런던에서 머물러야 겠습니다.”
“무슨 소리, 국내에 처리할 일이 산더미거늘… 오늘 오후에 바로 귀국해야 한단 말이오.”
“저… 킴이, 마이다스 킴이 지금은 올 수 없답니다.”
“…왜?”
“한국 식당에서 식사 중이라고… 내일 오겠답… 니다.”
“X발!”
* * *
“아이고, 시원하다. 역시 한국 사람은 얼큰한 국물이 있어야 해.”
“네, 회장님. 영국에서 이런 찐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 변호사, 많이 먹어요. 미국에서도 시간을 쪼개느라 한인타운에 통 못 갔죠? 이집 삼계탕, 맛있네.”
이걸 보는 산드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보스, 이래도 되는 거예요?”
“뭘?”
“어쩌면 역사를 쓰는 건데, 회의 참석 안 하시고 여기서 막걸리? 술을 마시다뇨?”
“흐흐흐, 산드라도 그냥 긴장 풀고 마셔. 미국에 도착해서 일에 치여 정신없었잖아? 쉴 땐 그냥 다 잊는 거야.”
“보스!”
“깜짝이야, 나 심장 약하다니까?”
“헹, 보스 심장이? 세상을 다 씹어먹는 양반이 할 말이예요?”
“산드라, 연애 안 해 봤지?”
“뭐요?”
“연애도 밀당이 있는 법이야. 그런데 유럽 전체와 승부를 보는 순간 아닌가? 여기도 아슬아슬하게 애간장을 녹이는 밀고 당기는 시간이 필요해.”
“…….”
“잔뜩 웅크리고 있는 고슴도치를 다 잡은 줄 알고 삼키다가 가시에 박혀 죽는 호랑이도 있더라고. 스스로 가시를 다 털어 낸 착한 고슴도치가 되어야 먹을 수 있거든.”
“악마!”
“뻑하면 악마래? 나는 원래 그래, 몰랐어?”
“히잉… 나도 영국인이란 말예요. 보스에게 잡아먹힐 유럽 사람들 불쌍해.”
이 망나니 같은 산드라. 저 입, 막을 방법이 없다.
“산드라, 발등에 불이 붙었어. 그 불이 온몸으로 옮겨붙어서 그냥 죽는 게 좋을까? 아니면 식초라도 들이부어 빨리 끄는 게 좋을까? 유럽은 지금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어.”
“씨잉.”
“살아 있어야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거야. 죽어 버리면… 없지, 기회가. 혹시 회귀라도 하지 않는 한.”
“그런 게 어딨어요?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나 회귀를 한단 말이예요?”
“…그렇네. 불가능한 일이네.”
시혁은 가슴 한편이 아렸다. 왜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지, 아직 모른다. 어떤 존재가 자신을 회귀시켰는지,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 백정의 쟈스민 향수 샤넬 No. 5와 입으로 코로 차오르던 흙냄새. 나중에는 눈까지 덮었지만 시혁은 끝내 눈을 감지 않았다. 너무 억울했기에.
“보스, 제가 너무 심했어요?”
“아냐, 산드라.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어쩌긴? 유로 발행권을 장악해야지. FRB보다 더 강력한 권한도 받아 내고.”
“이럴 때 보면 참 궁금해. 우리 보스의 최종 목표는 뭘까?”
“최종 목표라… 언젠가 내 동생 태식이라는 놈에게 말했던 적이 있는데 말이야.”
“예!”
눈이 초롱거린다. 되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천성이 착한 매력적인 변호사. 일 하나는 똑소리 나지만, 한 번씩 두통을 유발하는 허당 같은 모습, 귀엽다.
“전 세계 모든 돈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일명 무한 자본, 끝이 없고, 셀 수도 없으며, 가늠이 안 되는 돈을 가질 거. 그게 내 꿈이야.”
“갓뎀! 그,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응,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최소한 유로와 달러 그리고 엔화를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거의 무한 자본에 가깝지 않을까?”
“유로에 달러? 그리고 엔화까지?”
“엔화에는 일본과 중국까지 포함해서 말하는 거야. 두 화폐는 같은 통화 기호 ¥를 쓰고 있으니까.”
“맙소사, 세계를 다 지배하겠다?”
“그럴지도… 어차피 전쟁으로 세계 통일하는 시대는 지났으니, 돈으로 할 수밖에. 하하하.”
시혁을 수행해 영국까지 따라온 이현 변호사는 산드라와 시혁의 대화를 듣다가 국물을 뿜었다. 옆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보스의 정신감정을 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몸을 의탁하기는 했는데… 여기 조금 이상해.
일본 명문 대학 회계학과를 다녔던 빛나는 지성의 소유자, 공사홍 부회장은 은근슬쩍 고스톱을 가르치더니… 벌써 몇 년치 연봉을 빨렸다.
처음에 푼돈을 따기에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조금씩 판돈이 올라가? 그래도 백전백승 하는 재미로 콜!
그게 함정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왜 할머니 재산 10%를 상속받은 박하송이 생거지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이현도 젖어 버린 것이다. 이젠 본전 생각에 그만둘 수 없었다. 오늘 밤에도 멤버들은 모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쭉쭉 빨려 생거지가 된 박하송도, 음흉한 지성 공사홍도, 살벌한 얼굴의 김보성과 윌슨조차도… 전혀 동요하는 사람이 없… 어?
분명히 다 같이 들었는데?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산드라와 나였구나. 이현은 외로웠다.
‘여기는 안드로메다였어.’